아이가 아플 땐 차라리 내가 아픈 게 낫다. 그렇게 부모가 되고 나서 희생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된다. 부모가 되어 봐야 부모 마음을 알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진 않다. 실제 부모의 삶이란 자기 것을 많이 내려놓아야 한다는 실감에서, 희생을 떠올리게 된다. 책 읽을 시간도, 자기 계발할 시간도, 경제적인 여유도, 젊음도, 유한한 시간 속에서 내려놓아야만 하는 것들이 자꾸만 늘어간다. 주말에는 엉덩이 진득하게 붙이고 영화 한 편 볼 시간도, 복잡한 쇼핑몰에 가서 천천히 쇼핑하는 시간도 포기해야 한다.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지만, 엄마가 되고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포기해야 하는 범위가 넓었다. 나의 경우엔 중국으로 발령받은 남편을 따라오며 영어로 이어지던 커리어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희생은 희생이다. 부모의 삶 어떤 부분은 희생이 아닌 다른 말로 설명할 수는 없다. 하지만 부모의 희생은 자식을 위한 희생이 아니라, 사랑하는 이들과의 ‘함께 하는 삶’을 위한 희생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렇다고 해서 부모 세대의 희생을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자식은 나처럼 힘들게 살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더 나은 삶을 바라는 마음, 생선 살을 발라 밥 위에 올려주셨던 그 마음을 어찌 비난할 수 있을까. 단, 경계하고 싶은 것은 부모의 희생이 우위에 있다는 느낌이다. 베푸는 자는 우위에 있다. 부모는 자식에게 응당 베풀어야 한다고 여기지만 내어주는 것만 계속되면 관계는 기운다. 희생은 너를 위한 것만이 아니라 나와 너 우리를 위한 자연스러운 삶의 과정이며, 나 역시 아이로부터 많은 것을 받고 있다.
You could be anything
but you’re nothing
조던 피터슨의 유튜브 강의에서 인상 깊게 들었던 문구이다. ‘뭐든지 될 수 있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다’ 안정만을 추구하고 희생을 감수하지 않으면 어른 아이에 머물러 있게 된다는 의미이다. 같은 희생이라도 어떤 희생은 타인에게로 투영되어 또 다른 안전한 울타리를 만들어 낸다. 나의 희생을 무릅쓰고 싶지 않아 내가 아닌 타인에게로 리스크를 전가하기도 한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서 희생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지만, 실은 부모의 빅 픽쳐, 또 다른 울타리 안에서 자식을 희생시키는 일도 빈번하다. 물론, 엄마도 사람이니까 ‘엄마 사람’이고 엄마도 엄마이기 이전에 모두가 귀한 딸이자 대체할 수 없는 하나의 존재이다. 하지만 가끔은 우리의 삶이 아닌 나의 삶에 너를 동참시키고 있는 건 아닌지, 그건 누가 누구에게 하는 희생인지 의문이 들 때가 있다. 엄마라는 이름으로 어쩔 수 없이 자식에게 희생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가끔은, 엄마라는 이름 뒤에 안온하게 멈춰 선 대신 아이를 내 삶 안에 희생시키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본다.
진정한 희생이란 울타리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나를 둘러싼 울타리를 부수고 나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 믿는다. 부모로서의 삶에서나 나 개인으로서의 삶에서 동일하게 필요한 것들이다. 익숙하고 편한 것, 수동적으로 받아들였던 것들에서 벗어나, 내 마음이 가리키는 것들을 찾아 나서는 인생의 모험이자, 도전의 과정이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함께 하는 삶을 선택했다는 의미이다. 함께 손 잡고 가기로 결심한 우리들은 가끔 멈춰 서서 다른 이의 디딤돌이 된다. 나의 마음은 잠깐 옆에 내려놓고 너의 마음을 먼저 들어보기도 한다. 나도 소중하지만, 그만큼 너도 많이 소중해서 나 먼저 앞서 갈 수가 없다. 그래서 엄마도 가끔은 멈춰갈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느릿느릿 걸어가는 이 길이, 혼자 빨리 걷는 길보다 아주 많이, 행복하다. 나에게 희생이란 그런 의미이다. 우리의 여정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리스크를 받아들이고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 함께이니까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