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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원 Oct 24. 2021

세상으로 향한 눈

아이를 키우면, 특히 전업맘이 되면, 세상이 좁아지는 거라 생각했다. 마음대로 여행 다니기도 쉽지 않고, 배우고 싶은 것들에 시간과 돈을 투자하기도 여의치 않으니, 넓은 세상을 경험할 수 없게 되는 거라 여겼다. 특히 두 아이들이 어렸을 땐 집순이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고, 해외에서의 언어 장벽까지 더해져 반경 몇 미터를 벗어나지 못하는 일상이 전부였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엄마가 되고 나서 전엔 흐릿하게 알았던 것들을 점점 뚜렷하게 볼 수 있게 되기도 한다. 엄마가 된 후 만난 사람들은 이전에 비슷한 집단 안에서 만나던 사람들보다 더 다양했고, 해외에서 만나게 된 사람들 역시 전에는 이어질 수 없는 인연이었을 것이다. 만약 내가 한국에서 계속 광고 일을 했었다면, 특별한 집단 안에 소속된 조금 더 특별한 사람으로 나를 인식했을지도 모른다. 무리에서 특별해지려 애쓴다 해도 어차피 그다지 특별해질 수 없을 것이므로, 특별한 무리에 속해 있는 쪽을 택한 것이기도 했다. 어쩌면, 어떤 모습이 되려고 부단히 애썼던 20대의 나는, 누군가의 눈에는 꽤 특별해 보였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두 남자아이를 키우는 엄마이고 아내일 뿐이다. 눈가에 주름도 늘었고 피부도 푸석해졌다. 하지만 지금 나는 더 이상 특별함을 위해 애쓰지 않는다.


둘째가 막 어린이집을 다니기 시작했던 때는 코로나가 터지기 전이었다. 이제야 내 시간이 생겼다고, 엄마가 아닌 나로 시간을 보내겠다고 한껏 들떠 있었다. 중국어를 배우면 나중에 중국어 선생님이라도 할 수 있겠지, 학교를 다녀야 하나 아니면 꽃꽂이나 요리라도 배워야 하나 이것저것 생각해 봤지만 들뜬 마음과는 달리 이것도 저것도 썩 내키질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가 다니기 시작한 어린이집 원장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어린이집 선생님 한 명이 그만둬서 공석인데, 반나절 동안 와서 영어 수업을 해줄 수 있냐는 제안이었다. 경험도 없었고 관련 자격증도 뭣도 없었기에 처음엔 거절했지만, 원장님의 설득에 생각지도 못했던 영어 선생님으로서의 경험을 하게 되었다. 아파트 단지 안에 있던 작은 어린이집이었고, 첫째도 다니던 어린이집이라 엄마들도 대부분 안면이 있었다. 마침, 아이의 영어 교육에 대한 관심도 있었고 중국 교육에 대한 아쉬움도 조금 있었기에 아이에게, 나에게도 좋은 경험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경험이 없으니 실습이라 생각하고 페이도 거절했다. 그리고 유튜브와 인스타에서 수업을 찾아보고 혼자 교구를 만들어 수업을 준비했다.  일방적인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아이들이 몸을 움직이고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서 따라 했다. 물론 중국에서도 큰 유치원에서는 외국인 선생님들이 퀄리티 있는 수업을 진행하지만, 작은 어린이집이었기 때문에 아이들과 학부모들이 무척 좋아해 줬다.


누구누구의 엄마가 아닌 선생님이 된 후로, 아이들은 내게 애정을 표현해줬다. 이미 몇 번이고 눈에 익은 얼굴들이었는데도 말을 주고받고 마음을 나눈 후엔 달랐다. 겉에서 봤을 때와 실제로 마주 했을 때 아이들의 모습도 조금씩 달랐다. 발달이 느리고 몸집도 작았던 한 아이는 의외의 집중력으로 나를 놀라게 했고, 모두가 똑똑하다고 귀엽다고 칭찬했던 한 아이는 수업시간에 매번 가장 먼저 큰 목소리로 대답했지만 틈만 나면 내 무릎에 앉으려 하거나 손을 만지작 거리는 등 불안한 눈빛을 보이기도 했다. 처음엔 내가 아이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고 아이들과 친해질수록 어린이집에 반나절만 와 있는 내가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다고 느낄 때도 있었다. 모든 아이들을 특별하게 대해줄 수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각자 집에선 거의 다 외동이었고, 왕자 공주처럼 특별하게 자란 아이들이 이런 기관에 오면 어떤 느낌을 받게 될까에 대해 생각했다. 말 잘 듣는 아이가 더 예쁨 받는 곳에서 아이들이 말을 잘 듣는 건 당연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즈음, 어린이집에 잘 적응하던 둘째가 갑자기 뒤집어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엄마와 함께 어린이집에 들어가는 게 좋아 신나 했던 둘째가, 점점 선생님이 된 엄마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다른 아이들과 소통하는 걸 질투해서 아무도 나에게 말도 못 붙이게 했고, 수업 시간엔 아이들과 함께 앉길 거부하고 내 무릎 앞에만 앉으려 했다. 또 시도 때도 없이 안아달라고 울고 떼를 써서 수업을 할 수가 없었다. 사실, 이 어린이집의 모든 아이들 중 나에게 가장 특별한 아이는 솔직히 내 아이였다. 수업이고 뭐고 만약 이대로 둘째의 어린이집 생활에 지장이 생긴다면, 여기서 선생님을 하고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원래 나의 커리어도 아니었고 돈을 받고 한 일도 아니었기에 그만두겠다는 마음을 먹기 쉬웠다. 하지만 이미 정이 들어버린 아이들이 눈에 밟혔다. 아이들은 내가 하는 수업을 좋아했고, 기다렸다. 아이들의 눈빛을 보면 차마 쉽게 그만 둘 수가 없었다. 둘째에겐 ‘다른 아이들에게 엄마를 뺏기는 게 아니야.’라고 끊임없이 말해줬고 내 무릎에서 내려올 줄 모르던 아이도 점차 엄마와 함께 하는 수업에 적응해 갔다. 코로나가 터져서 어린이집이 문을 닫으며, 6개월간의 짧은 경험은 끝이 났지만, 그때의 경험은 아이들 하나하나의 빛나던 눈빛으로 나에게 소중하게 남아 있다.


남자아이 둘을 키우면서 종종 그때의 경험을 떠올리게 된다. 엄마에게 더 사랑받고 싶은 마음, 내가 더 특별해지고 싶은 마음, 질투심은 자연스러운 본능이지만 그런 마음이 다른 누군가를 짓눌렀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일들에 대하여 생각하게 된다. 나에겐 첫째도 첫째대로 특별했고, 둘째도 둘째대로 특별했다. 나아가 어린이집에서의 경험에 비추어 보건대, 우리 아이들이 특별한 만큼, 다른 아이들도 저마다의 특별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특별함 들은 서로 달라서 비교할 수 없기에 어느 한 명을 특별하다고 할 수 없었다. 닮은 듯 다르게 생긴 만큼이나, 서로의 장점과 단점도 다 달라서 존중해 줘야 한다는 것, 형에게, 동생에게 각자 가장 소중한 장난감이 있다면, 혹은 그게 무엇이 되었든 존중이 필요하다는 것. 서로가 있어서 같이 놀 수 있고 이야기할 수 있는 즐거움에 대하여, 어린 형제에게 최대한 알려주고 싶었다. 그리고 유치원의 중국 아이들 사이에서 유일한 한국인이라는 점이 어색하거나 부끄러워지지 않도록,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한 인간의 고유함’에 대해 알려주고 싶었다.


친구들 모두가 자전거를 가지고 왔을 때, 자전거를 타고 오지 않은 두 형제는

이제 주먹을 힘껏 쥐고 자전거만큼 빨리 달리며 웃어 보인다.


나에게는 너희의 행복에 대한 책임이 있다. 그래서 가끔은 내가 서 있는 곳에서 벗어나, 너의 자리로 가서 서본다. 엄마가 되고 난 후에야 비로소, 그동안 한 번도 고개 돌려 본 적 없었던 타인의 세상을 바라본다. ‘공감’이라는 것,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일들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의 행복에 겹쳐지는 너의 행복에 예전보다 더 자주 웃는다.


언젠가부터 사회와 시대로부터 읽히는 수상쩍은 징후가 있었다. 자기애와 자존감, 행복에 대한 강박증이 바로 그것이다. 자기애와 자존감은 삶의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미덕이다. 다만 온 세상이 ‘너는 특별한 존재’라 외치고 있다는 점에서 이상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개인은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점에서 고유성을 존중받아야 한다. 그와 함께 누구도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점 또한 인정해야 마땅하다. 자신을 특별한 존재라 믿는 순간, 개인은 고유한 인간이 아닌 위험한 나르시시스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 완전한 행복, 정유정 ‘작가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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