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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원 Oct 24. 2021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을 자유

주변에 결혼하지 않은 친구들 또는 결혼했지만 아이를 갖지 않는 사람들이 꽤 있다. 두 아이의 엄마인 내가 아무리 자유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한들, 그들의 자유 발 끝에도 못 미치는 것 같은 느낌은 어찌할 수 없다. 엄마들이 모여 자유 부인 약속을 잡거나 아이를 데리고서라도 가고 싶은 곳을 갈 수밖에 없는 그 자유에의 열망 또는 좌절을 부인할 수는 없다. 실제로 아이 없는 친구 부부의 얘기를 듣다 보면 종종, 아니 많이 부럽다. 마음만 먹으면 ‘차박’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즉각성과 여유 같은 것들 말이다. 나는 ‘차박’이 뭔지도 몰랐음은 물론이고. 


아이를 낳지 않기로 결심한 친구가 말했다. 

“아이를 좋아하긴 하는데 키울 자신이 없어. 아이에게 힘든 걸 겪게 하고 싶지 않고 또 나에게 모성애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어. 무엇보다 아이가 없으면 시간이나 경제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고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잖아.”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남편도 어머니께서 자식 키우느라 고생하신 걸 봐서 그런지 딩크족에 동의한다고 했다. 

친구의 말을 듣고 보니 아이를 선택한 나의 인생보다, 친구 쪽이 훨씬 합리적이고 안정되어 보였다. 우리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부모님의 헌신이나 희생을 딛고 자라 왔다. 그런 부모로서의 삶이 행복해 보이지 않았던 건 아닐까? 친구의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졌지만 한편으론 조금씩 의문이 들었다. 


보통,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는 삶이 안정적인 삶이라 얘기하지만, 나에겐 반대였다. 경제적인 안정, 걱정 없는 삶을 기대하고 결혼한 게 아니었다. 어쩌면 요즘 세상에선 결혼은 모험이 맞을지도 모른다. 결혼 전 나는 나 한몫은 충분히 감수할 만큼의 돈은 벌고 있었으며 남편의 월급은 나보다 조금 적었다. 우리끼리 돈을 모아 집을 마련해야 했고 친정 부모님을 설득해 결혼했다. 결혼하고 1년쯤 뒤 남편을 따라 중국으로 함께 오기로 한 것, 아이 둘 엄마가 되기로 결심한 것 모두 나에겐 모험이었고 용기였다. 한국에서 대기업 광고 기획사에 다니며 나 혼자 때깔 나게 그럭저럭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던 나는 안정을 버리고 모험을 택했다. 


당연한 결과인지는 몰라도, 가끔은 표류했다. 그럴 때면 열심히 노를 저어 나가는 것 밖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돌아보면 언제나 제자리에서 맴돌았다. 다른 건 몰라도 성실함과 책임감만큼은 뒤처지지 않았는데 엄마의 삶은 그것만으로 되는 게 아니었다. 방법을 모를 때면 그랬듯이 습관대로 무작정 노를 움켜쥔 채 그저 열심히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좇았다. 열심히 하는 건 언제 어디서나 미덕이라 믿었다. 갖가지 재료로 열심히 이유식을 만들고, 아이 성장 단계별로 필요하다는 장난감들을 사들였다. 육아 책은 밑줄을 그어가며 읽었고, 육아 블로그는 매일같이 들여다봤다. 중국에 사니까 중국말이라도 배워야지. Bpmf도 몰랐던 나는 임신 때부터 무작정 학교를 등록해서 수업을 들었고 아이를 낳고 난 후에도 푸다오 (과외 선생님)에게 수업을 받으며 HSK5급을 땄다. 엄마가 되어서도 그냥 ‘엄마’ 앞에 붙는 ‘능력 있는 엄마’, ‘멋진 엄마’의 수식어에 매몰되었던 나는 불안할수록 스스로를 몰아붙였지만, 그럴수록 내가 생각하는 나의 이미지는 점점 부서져 내렸다. 


어느 날, 남편이 물었다. “여기에서 생활하는데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는 다 배운 것 같은데 왜 그렇게 중국어 공부를 하려고 해? 영어는 좋아했다지만 중국어는 싫어하잖아. 중국어 친구를 사귀어 보던가 아니면 재밌는 드라마를 찾아보던가, 정 재미없고 힘들면 안 해도 될 텐데 “ 

그랬다. 나는 중국 생활과 중국어에 대한 불평불만을 늘어놓은 채 책상에 앉아 꾸역꾸역 공부했다. 해야 하니까 하는 것에 스스로 질문을 던져보지 않았다. 나는 곧바로 대꾸했다. 

“만약 한국에 다시 들어가게 되면, 그땐 업계에서 다시 취직하기도 힘들 텐데, 중국어 선생님이라도 해야지, 여기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이것밖에 더 있어?” 

그 말에 남편이 진지하게 말했다. 

“그냥 다른 걱정은 하지 말고 네가 하고 싶은 걸 했으면 좋겠어. 좋아하는 책도 읽고 좋아하는 영어도 계속하고..” 

남편에게 현실 감각 제로라며 속으로 비죽거렸지만, 그건 어쩌면 너무도 현실적으로 변해버린 나를 향한 비죽 거림이었을지도 몰랐다. 


우리는 사내 커플이었고 회사 안에서 우리 둘을 엮어줬던 건 바로 글이었다. 일을 하다가 메일을 주고받으며 친해졌고, 나는 그가 사보에 쓴 재치 넘치는 글을 좋아했다. 남편은 심지어 작가 지망생이었고 나는 그냥 독서광이었다. 하지만 결혼 5년 차로 접어든 우리는 더 이상 책을 읽지 않았고, 글을 쓰지 않았다. 같은 책을 읽고 나서 끝없이 나눴던 대화도 물론 끊긴 지 오래였다. 비현실을 몰아낸 나의 현실감을 알아챈 그즈음부터, 나는 드러나지 않게 끙끙 앓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현실을 손에서 놓아 버렸다. 손에 꽉 쥐었던 노를 놓아버리자 배는 빙글빙글 돌았다. 침대에 멍하니 누워 천장을 바라볼 때면 가끔 여기가 어디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중국이란 낯선 대륙 한가운데 떨어진 나는 하염없는 표류를 시작했고 내가 탄 배는 의미를 찾을 수 없는 눈물에 띄워졌다. 아이들이 유치원을 다니기 시작하며 나의 시간이 생겼지만, 의무가 없어져버린 하루 반나절은 무기력했고, 피곤한 몸은 무기력을 부추겼다. 뭐든지 열심인 나는 없었고 피곤함만이 나를 지배했다. 돌이켜 봤을 때 확실한 것 한 가지는, ‘피곤에 절은 몸뚱이’는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이다. 이런 게 흔히들 말하는 우울증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에 앞서 몸 어디에 문제가 있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자잘한 병치레가 일상이었긴 했지만, 실질적인 몸의 건강이 의심될 정도로 몸 상태가 안 좋았다. 그즈음 장염으로 인한 탈수로 병원에 가다 쓰러져서 들것에 실려가고 중국 병원 응급실 신세를 지게 되었다. 여기는 중국이었다. 그 사건 이후 정신이 번쩍 난 나는 우선은 모든 걸 제쳐두고 건강해지기로 마음먹었다. 


시켜먹는 중국 음식이 입에 잘 맞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혼자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만들어서 해 먹어야 했고, 끼니를 챙기는 일 만으로도 멈춰있는 것만 같던 하루는 빠르게 흘러갔다. 점차 아이들만을 위한 식단이 아니라 나를 위한 밥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멀리 서라도 한국 반찬을 파는 곳이 있으면 사 먹었다. 그리고 나를 위한 밥상을 남편과 나눴다. 책장에 처박힌 요리책 한 권을 발견하고 들여다보다 그 옆에 꽂힌 소설책을 들여다보기도 하며, 아무것도 아닌 하루를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조금씩 채워나갔다. 그렇게 입에 맞는 음식을 해 먹고 좋아하는 문장 몇 구절을 들여다보는 가벼운 일들은 나의 하루에 결코 가볍지 않은 변화를 만들어냈다. 


엄마가 되고 나서 모든 것을 손에서 내려놓아 버렸다고 생각했던 그때, 나는 비로소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30 후반까지의 인생에서 해야 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웠던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여전히 무거운 몸을 일으켜야 하고, 해야 하는 일들이 눈앞에 쌓여 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지만 현실의 무게에 쉽게 짓눌리거나 매몰되지 않을 수 있었다. 잠깐이라도 해야 하는 것들을 내려놓고 하고 싶은 것들을 생각했다. 끌려가는 듯한 하루하루가 점점 나와 속도를 맞추기 시작했다. 예전처럼 노트에 조금씩 글을 끄적이기 시작했고, 문장들은 글이 되었다. 그리고 브런치 작가 신청을 했다. 


뭔가를 추구하지 않는 나 자신은 나비처럼 가벼워서 하늘하늘 자유롭습니다. 손바닥을 펼쳐 그 나비를 자유롭게 날려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문장도 쭉쭉 커나갑니다.  
P.110 
하루키는 ‘오리지널리티’라는 것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신선하고, 에너지가 넘치고, 그들 자신의 것,”  나만의 글을 위해서는 자신에게서 무언가를 플러스 해가는 것보다 마이너스해간다는 작업이 필요하다. p.113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나는 하루키의 이 말이 글뿐 아니라 인생 전반에도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엄마로서 완벽해지려고 애썼던 날들, 중국어라는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려고 200%의 노력을 더해 마지않아야 한다고 여겼던 날들, 나에겐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불안한 마음에 뭐 하나라도 더 손에 쥐려 아등바등거렸던 그때, 나의 하루는 여러 번 지옥이었다. 멋진 엄마가 되는 것을 포기하고, 내 이름 앞에 그럴듯한 타이틀이 붙는 것을 포기하고, 내가 나를 포기하고 말았다고 여겼던 그때, 한 번도 꿈꾸지 않았던 엄마라는 존재가 되고 말았을 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나 자신을, 어쩌면 꿈이라 부를 수 있는 것들을 되찾을 수 있었다. 


우리는 인생의 모든 단계마다 요구되는 작은 목표와 그에 따른 작은 성과들을 안고 살아간다. 때론 그런 것들이 삶의 작은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잠깐은, 모든 기대와 의무를 내려놓고 진정한 나를 대면할 시간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혹은, 실패라 여겼던 순간들이, 여기서 더는 올라갈 수 없다고 여겼던 순간들이 인생에서 불필요한 것들을 거둬주는 소중한 시간이 될 수 있는 건 아닐까? 나에겐 엄마로서의 삶이 그 계기가 되었지만 인생에서 한 번은 가던 길을 잠시 멈추고, 꼭 해야만 한다고 믿었던 것들에서 벗어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도 필요할지 모른다.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을 자유’, 엄마가 된 내가 나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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