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시작'은 죽음과 맞닿아 있었다.
나 : 준비도 다 마쳤는데 갑자기 ‘시작’을 못하겠어요.
선생님 :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까요?
나 : 이유는 딱히 모르겠어요. 일을 시작하기 위해 몇 개월 간 포트폴리오를 준비하고 사업자도 냈고요.
서비스 광고를 위한 카피도 머리 빠지게 짜고 디자인도 모두 완료했어요. 온라인으로 오픈만 하면 되는데 별안간 노트북이 천근만근으로 느껴져 열리지 않았습니다. 다음 날 시도하고 다다음날도 시도해 보았는데요. 꿈쩍도 안 하더라고요. 오링 테스트나 최면을 당한 듯이 말이에요.
둘째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기 전까지 일에 대한 공백들이 있었죠. 내향형 인간으로 바뀌어 아이를 기르는데 집중했던 뇌구조를 바깥 세상으로 뻗는 구조로 전환하는데 애를 먹는 자신이 무척 괴롭습니다.
선생님 : 시작을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 같은데요?
나 : 시작을 하면요? 음.... 구체적으로 생각은 안 해봤는데요.
그냥.. 막연하게 삼지창을 든 괴물이 올 것만 같아요.
선생님 : 그 괴물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어요?
나 : 아마도 괴물은 내 서비스에 불만족한 고객일 거예요. 그래서 컴플레인을 거는 거죠.
선생님 : 컴플레인은 어떤 내용이죠?
나. : 고객에게 디자인을 의뢰받았는데 제가 작업한 결과물이 마음에 안 들 수 있잖아요. 그러면 컴플레인이 들어올 테고 악플을 남기지는 않을 지도 염려되고 당혹스러울 것 같아요. 직장인 시절에는 회사에 소속된 일원으로서 힘들기도 했지만 대체로 재미나게 디자인했어요. 그런데 이번에 제가 주체가 되어 꾸리는 일이잖아요. 막상 오픈을 하려고 하니 모든 것이 스톱이 되었습니다. 2달 가까이 노트북을 열지 못하고 있는 자신이 이해가 안 돼요.
선생님 : 만약 반대로 잔디님이 다른 디자인업체에 일을 의뢰했다고 쳐 봅시다.
결과물을 받았는데 마음에 안 든다면 어떻게 할 거 같아요? 막 괴물처럼 화를 낼 거 같나요?
나. : 아니죠~ 화를 낼 것까진 없고 그냥 제가 원하는 방향대로 수정사항을 전달하면 그만이에요.
"이 부분은 이렇게 수정해 주세요.
추가비용이 필요하다면 추가 결제를 하고 다른 콘셉트로 하나 더 부탁드려요~." 라든지요.
선생님 : 잔디님도 고객에게 그렇게 수정해 주면 되겠네요.
나. : 그러네요.... 생각보다 무시무시한 일이 아닐 수도 있겠네요.
선생님 : 괴물, 그까짓 거! 껌값이에요. 너무 잘하고 싶은 부담을 내려놓으세요.
나 : 하하. 껌값이네요. 두려워할 필요가 없네요.
저는 완벽주의적인 성향이 있어왔어요. 어려서부터 제대로 할 거 아니면 아예 시작도 하지를 말라는 아버지의 말씀이 항상 있으셨죠. 조금의 실수도 용납을 못 하셨고요. 한 번은 라면을 끓여 오라고 하셨는데 시간조절을 못해서 라면이 불었는데 드셔보더니 불었다고 멀쩡한 라면을 하수구에 버리라고 했어요. 다시! 다시! 다시! 끓이기를 4번째 봉지를 뜯고 나서야 통과가 됐습니다. 그러고 나서 적절하게 꼬들꼬들하게 익은 라면을 입술을 모아 후후 불어 드시는 모습을 보고 저는 방에 들어가 버렸습니다. 부들부들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다른 방도가 없었어요. 편안한 마음으로 보고 배우기보다 일상은 매번 실전이었고 테스트였습니다.
엄마도 공부를 하려거든 ‘나 죽었다.’ 생각하고 하라고 하셨어요. 두 분의 불안 콤비네이션으로 제 일상은
심각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언제나 '죽음'과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었어요.
선생님 : 에고, 안타깝군요. 마음이 많이 힘들었겠군요…
완벽하지 않은 건 훌륭한 거예요.
'완벽하지 않고 부족한 것이 훌륭하고 멋진 거야.'라고 5번만 외쳐볼까요.
나. : 완벽하지 않고 부족한 것이 훌륭하고 멋진 거야
완벽하지 않고 부족한 것이 훌륭하고 멋진 거야
완벽하지 않고 부족한 것이 훌륭하고 멋진 거야
완벽하지 않고 부족한 것이 훌륭하고 멋진 거야
완벽하지 않고 부족한 것이 훌륭하고 멋진 거야
선생님 : 아이들 앞에서도 완벽하게 모든 일을 잘 해내는 부모가 좋을까요 부족한 부모가 좋을까요?
나 : 부족한 부모요.
선생님 : 맞아요. 부모 자신이 완벽하게 일을 잘 해내야 한다는 모습을 보여주면 아이는 자라질 못해요.
서투른 모습도 있어야 아이가 그 틈을 타서 기쁜 마음으로 도움이 될 기회를 얻거든요.
나. : 맞습니다. 저 또한 부족한 모습으로 아이를 훈육했던 일이 떠올라요.
아이가 신발을 신을 줄 알거든요? 그런데 제가 앞에 있으니 스스로 신지 않고 짜증을 내며 울었어요.
그래서 일부러 제 손을 서툴게 움직이면서 운동화를 자꾸 놓치는 척을 했죠. 엄마도 나름 노력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면서요. 어리숙한 손놀림을 기다리다 못한 아이는 결국 스스로 신더라고요.
'아이코, 엄마가 신발을 자꾸 놓치네? 영차영차.'
'어머나! 신발 벌크가 두꺼워서 잡기 힘든 건데. 스스로 채웠구나!'
엄마에게 의지하고 싶어 할 땐 해주기도 하지만 사실 그냥 해줘 버리는 게 속 편하긴 해요. 나갈 시간이 늦어지지도 않고요. 그런데 아이 앞에서는 침착한 척 했지만 제 안에 내재되어 있던 성급한 박자가 스멀스멀 올라올 때면 기다려주기 힘들고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오더라고요. 이러다가 언젠가 빵 터져서 버럭하지 않으면 다행이에요. 이 감정은 여유 있는 품으로 기다림을 받지 못한 내 어린 시절에 대한 억울함입니다. 이제는 참는 게 아닌 진짜 여유 있는 사람으로 바뀌어 잘 기다려주는 엄마가 되고 싶어요.
선생님 : 네, 그래도 잘 기다리고 참 잘하셨네요.
나. : 상담을 마치고도 일을 '시작'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잊고 있었지만 생생했던 기억을 끄집어 내 말씀드리고 나니 마음이 좀 편안해졌습니다.
선생님은 나의 이야기를 전적으로 들어주시면서 좋은 방향이다, 잘하고 있는 거다라는 추임새 정도만 덧붙이시는데도 나 스스로 긍정적 자아상을 가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다. 온전히 내 말에 귀 기울여 주시는 모습은 나를 수용하고 돕고 싶다는 적극적인 지지와 관심이다. 선생님의 대화법은 가르치려 하기보다 대화의 주도권을 내게 주셨다. 슬쩍슬쩍 보탬이 되는 말씀 만으로도 이상하리만큼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힘을 주셨다.
오랫동안 선생님을 너무 의존하게 되어 나와 동일시 혹은 우상화하다가 내 맘 같지 않은 면을 발견할 때 크게 실망하여 떠나버리게 될 염려에 대해서도 말씀드렸다. 이건 경계성 인격장애에서 보이는 일면이다.
선생님은 명확한 말씀과 따스한 품을 내어주셨다.
선생님 : 나도 사람인지라 혹시라도 기분 상하게 하거나 잘못된 말을 할 수도 있어요. 그럴 때마다 알려줘요. 나는 전문가니까 의존해도 좋아요. 내담자가 공부가 많이 됐고 치유된 마음으로 충만해졌을 때 알아서 떨어져 나갈 거니 걱정 말아요.
"에잇, 선생님 말씀도 이제 별 거 아니네!." 이런 마음이 들면 자신이 그만큼 큰 거예요.
선생님은 인격 회복에 진심으로 청출어람을 허용하셨다.
선생님의 마음 그릇을 닮고 싶지만 이 마저도 완벽주의 욕심인 건 아닌지 생각해 본다.
'과도한 완벽주의'에 초점을 맞추어 상담해 주셨지만 그러면서도 잘하고 싶은 마음을 남보다 크게 갖고 태어난 ‘완벽주의 기질’ 자체를 존중해 주기도 하셨다.
상담을 하면서 시작에 대한 두려움의 원인이 되었던 과거의 일들에 대해 더 말씀드렸다.
아버지는 베란다에서 나무와 톱으로 뭔가를 만드실 때라든지 내가 옆에서 조수 노릇을 해야 했는데 실수를 하면 혹독한 호통이 날아왔다. 당기면 늘어나는 큰 쇠 줄자를 나무에 대고 센티를 재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센티의 오차가 있을 경우에는 화를 불같이 냈다.
그런데 잠시 후 마지막 '자아'의 싹이 짓밟히기 직전 조용히 일을 저질러 버렸다.
쇠줄자를 만지작 거리다가 갑자기 아빠 바로 옆에서 0에서 3센티에 해당하는 부분을 반대로 꺾어 잘라버린 것이다. 앞에 숫자가 잘린 줄자는 힘없이 기계 안으로 빨려 들어갔고 줄자는 더 이상 소용이 없어졌다. 아빠는 너무 황당해서 얘를 어떻게 하지도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으셨고 그 이후 며칠 간 지속된 엄청난 욕과 협박으로 나로 인해 집안분위기가 엉망이 된 꼴이 되었다.
모든 일을 완벽하게 하길 강요했던 아버지의 강박은 살아오는 내내 유리파편이 되어 내 무의식 여기저기 박혔다. 어떤 종류든 강박은 불안이라는 감정에서 비롯된다. 불안이 많은 사람은 어떤 일을 시작했을 때 맞이할 수 있는 최악의 경우를 상상하느라 머릿속이 언제나 복잡하다.
‘상상’은 그 일이 이루어졌으면 하는 하늘에 비는 ‘기원’과도 같다. 예상했던 나쁜 일이 일어나면 ‘그것 봐 내가 뭐라고 했어.’ 라며 자신에게 친근한 불안이 마음에 오면 그제야 안심하게 된다.
헤이든 핀치의 책 <게으른 완벽주의자를 위한 심리학>에서 시작을 미루는 것에 대해 설명했다.
스트레스가 많은 뇌는 편도체를 활성화시킨다. 편도체는 공포를 비롯한 여러 가지 감정 처리에 관여하는데, 이것이 활성화되면 직면한 위협에 대비할 수 있도록 만든다. 미래를 위한 시작보다 미루기를 통해 당장 현재의 만족에만 집중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편도체가 잘 활성화되는 뇌는 조상시대와 달리 안전한 현대사회에서도 내 주변에 나를 잡아먹을 호랑이가 있다고 호들갑을 떨며 집안을 언제나 비상상태로 만든다. 이는 다음세대의 마음을 성장하지 못하는 모드로 함께 잠식시키고 자기와 같은 상태로 끌어내리는 꼴이다.
타고나기를 지배욕망이 많게 태어난 사람에게 불안이 더해진다면 쥐약이다.
그 욕망이 장점으로 발휘하지 않고 나쁘게 작용한다면 스스로도 닿을 수 없는 높은 기대치를 설정하고 본인에게 그리고 타인에게도 적용시킨다. 차라리 사회적으로 성공해서 그 에너지를 일에 불태우며 사는 게 낫다. 또래 경쟁사회에서 도태되었다는 화에 휩싸인 사람은 그 에너지를 집에 들고 들어와 어린 자녀들을 쥐 잡듯이 잡으며 지배욕을 푼다.
상담 후 집으로 돌아가니 식탁 위에 놓인 은색 메탈의 노트북이 보였다.
마음이 조금 나아졌다고 바로 '시작'할 수 있을 거라 기대하지 않았다.
다만, 준비를 마친 포트폴리오만 잠깐 점검해야겠다며 노트북을 열었다.
그러고 나서 서비스 업로드 버튼만 눌렀다. 아직 시작은 아니다.
저장한 내용을 제출했을 뿐이다. 그다음 서비스 승인이 났다.
그렇게 자연스럽고 언제인지도 모르게 '시작'을 시작하고 있었다.
총을 쏘면 긴장감을 갖고 달려야 하는 출발선 따위는 없었다.
그림 영역)
5살 꿈에 나왔던 삼지창 든 괴물이다. 아직도 데리고 살고 있었다니.
"꺼저버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