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는 생후 100일이면 뒤집기를 선보여 분유, 기저귀 값을 해야 했다
놀이터에서 5세쯤 돼 보이는 아이와 엄마의 대화가 들렸다. 엄마는 미끄럼틀 위에서 서성이고 있는 아이에게 이렇게 소리쳤다.
"논다며! 논다 그래서 나왔잖아. 열심히 놀아~
그렇게 가만있지 말고! 안 놀 거면 집에 가!!!"
그 아이는 어떻게 놀아야 잘 놀았다고 소문이 날까.
일은 열심히 하면 좋은 거지만 노는 것을 '열심히'라는 말은 아무리 곱씹어도 영 어색하다.
이 말은 한국 종특 문장임에 틀림없다.
지켜보는 엄마의 시선을 의식하며 서 있던 아이는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제대로 놀 기분이 아니었지만 집에 가지도 않겠다는 결의를 온몸으로 표현했다. 어린아이가 시력이 매우 나쁜지 돋보기 같은 두꺼운 안경까지 써서 한 손으로 안경을 잡고 반대편 손으로는 안경 안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는 모습이 하도 안타까워 나도 같이 목이 멨다. 그전 상황에 어떤 전조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내 눈앞에 저 엄마의 모습은 자애로움이 느껴지지 않는 성난 불곰 그 자체였다.
어떤 사람은 휴가지에서 책을 읽는 게 노는 거고, 어떤 사람은 클럽 가서 땀이 흥건하도록 춤을 춰야 휴식이고, 어떤 집순이 집돌이는 집에서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쉼이 되기도 한다.
저비용, 고효율로 압축성장을 일구며 과도한 노동에 시달리고 부담을 떠안았던 우리 부모 세대는 한마음 공동체가 되어 일했고 얼마 남지 않은 휴가 시간마저도 생산성을 추구했다. 행군인지 여행인지 모를 스케쥴이 빽빽한 패키지여행 사이 쇼핑센터에서도 조차 모여앉아 가이드의 설명을 고분고분 잘 들었다. 돌아와서는 여행 어땠냐는 지인의 질문에 가성비 좋았다고 들려주면듣는 이도 역시 만족스러운 대답이 되었다. 그러고 나서 놀이터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서성이는 아이를 다시 떠올리니 생산성 없는 어른으로 자라 경쟁에서 도태될 거라 여겨질 법 했다.
아이는 태어날 때 건강하기만 했으면 하는 초기 바람과는 달리 생후 100일이 되면 뒤집기를 선보여 분유, 기저귀 값을 해야 했다. 각종 육아용품 회사와 병원의 콜라보로 출시된 앱은 발달 사항을 발 빠르고 디테일하게 체크할 수 있도록 기획되어 있었다. 효율적이고 접근성이 편리한 시스템은 일평생에 아기 보호에 촉수가 예민하고 판단도 흐려져 있는 아기 엄마들의 심신을 들었다 놨다 했다.
드라마 <산후조리원>에서 시청자의 공감을 받았던 장면과 같이 내가 경험했던 조리원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엄마들은 출산 후 모유의 양을 비교하고 걱정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100일이 지나도 몸을 뒤집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는 아기를 보고 전전긍긍했다. 며칠 만에 뒤집기를 했는지 기었는지 옹알이를 했는지 그 순서에 따라 엄마들은 자랑스러워했고 부러워했고 탄식했다. 처음 접하는 아가의 세계에 진입한 엄마아빠는 임신때 부터 시즌마다 있는 대형 전시관 육아박람회 혹은 유아 도서박람회에 방문하게 되면 그 스케일과 규모에 놀라자빠졌다. 아이에게 뉴 아이템을 착용해 주지 않으면, 이 프랑스 산 로션을 발라주지 않으면, 지금부터 영어를 들려주어 귀를 뚫어놓지 않으면 안 된다는 설명을 들었다. 판매 실적을 높일만한 기준으로 수집된 연구들을 근거로 박람회 기간 한정 세일이라는 긴박한 배팅 속, 이익보다 손해를 싫어하는 심리와 불안이 건드려졌다. 또한 부스마다 자신이 내거는 상품으로 공부시켜야 한다고 촌철살인이었다.
맞은편에서는 화려한 캐릭터 편집숍이 나의 어깨를 두드렸다. 돌아보니 브로드웨이 뮤지컬 무대를 연상케 하는 화려한 무대 위에 주인공으로 우뚝 서 있는 걔들이 왜 아이들 대통령인지 이해가 200프로 갔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반복을 사용한 리듬의 동요가 흘러나오면서 영상 속 캐릭터는 시선을 사로잡는 춤을 추었다. 그래서 해당 동요만 틀면 5,6개월짜리 아가들은 어깨춤을 절로 추었다. 나도 돌사진을 찍을 때 자리를 빠져나오려는 첫째아이의 시선을 끌기 위해 캐릭터가 춤을 추는 그 동영상으로 아주 큰 도움을 받았다. 이 회사 작정했구나. 너무 멋져서 알면서도 속아넘어가줄 수 있을 만큼 고가의 책과 장난감은 품질이 매우 좋았고 캐릭터 인형은 오감을 자극하기에 충분해 보였다.
이미 출산을 통해 큰돈을 쓴 아기 엄마들은 아이 발달에 도움이 된다는 첫 전집과 육아용품들을 결제하는데 또 한 번 용기를 내기가 가 쉽다. 하나밖에 없는 외동아이는 억울하고 힘들었던 내 생애와 달리 야심차고 풍족하게 키우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평소 쇼핑을 할 때 비교사이트를 뒤져가며 1~2만 원 저렴한 곳을 찾아 결제를 하곤 한다. 예컨대 큰돈이 들어가는 신혼 가구를 장만할 때면 추가로 1~20만 원짜리 가구를 결제하기 더 쉬운 경험들이 있지 않나. ‘어제 결제한 가구 비용에 20만원 더 붙는다고 상황이 크게 안 바뀌지.100만원이나 120만원이나.' 하면서 말이다.
다른 한켠에는 아기보험 가입을 유도하는 영업사원들이 긴 테이블에 일렬로 앉아 반대편에 쭉 앉아있는 부모들에게 미래에 생길 수 있는 질병과 사고 위험성 대한 상상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나 또한 지나가다 손에 쥐어진 화살을 던져 룰렛 게임에 당첨되어 이끌려 가다보니 다른 보험사와 비교 분석해 보지도 못하고 보험 가입 용지에 싸인 할 뻔 하기도 했다. 나와 나이 또래가 비슷해 보이는 남자 영업사원은 노련한 스피치와 친절로 집중을 시키다가 막판 스퍼트로 '00어머니' 대신 '엄마'라는 호칭으로 반말을 하며 싸인을 하도록 몰아붙였다. 나도 함께 반말로 대답하니 직원은 다시 존댓말로 돌아와 싸인 압박을 철회했다. 내가 왜 당신 엄만가. 정말 거대한 집단 최면의 현장이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욕심이 없어보이는 수수한 엄마들조차 처음 맞이하는 육아시장 앞에서는 여우에게 필요 이상의 금화를 빼앗기는 피노키오가 되어버리기 쉽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눈치를 챙기지 못한 아기는 개월수에 맞춰 기거나 걷지 못하면 인생을 시작하면서부터 '쓸모'를 의심받게 된다. 아기의 귀에도 예사롭지 않게 들리는 부모의 채근은 세상살이가 녹록지 않다는 느낌을 받게 한다. 아기가 못 알아듣는 것 같아도 생후 6개월이 지나면 엄마의 쓴 표정들을 종합하여 자신의 효용가치를 감지한다.
나의 첫째 아이는 나의 통제에 대항하기 위해 퇴행의 모습으로 일관하였을 때 한동안 천덕꾸러기 모드로 대하는 나 자신을 자각하기도 했다. 매번 자각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으면 내 아이를 옆집 아이만 못하게 대우하고, 평생 나의 잔소리를 듣고 살아야 하는 나보다 낮은 인격체로 간주하고 살 수도 있다. 걱정과 불안의 목소리를 듣는 뇌는 한국말을 끝까지 듣지 못한다. 되려 그 걱정 언어대로 되길 바란다는 기원으로 인지한다. 자본주의 시스템의 단점 안에서 생산성으로 변질된 '사랑' 은 화려한 박람회에서 만큼이나 정신줄을 놓치기 쉽다.
놀이터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어슬렁거리는 아이에게 언성을 높이는 모습은 우리가 자라온 환경과 학창 시절, 사회 분위기와 별반 다르지 않고 심지어 크게 낯설지도 않다. 우리는 듣도 보도 못한 세계는 실체가 아니라고 믿는다. 이런 분위기에서 얻었던 사랑은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는 것이 아닌 쓸모가 증명되었을 때 얻는 조건부적 사랑이다. 물론 자녀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수용하는 훌륭한 부모들도 많으니 오해가 없었으면 한다. 그런데 더 심각한 오해는 부모 자신은 그런 언어를 쓰지 않는다고 굳게 믿고 있지만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쉽지 않겠지만 스스로 자각하고 바꾸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극단적으로는 부모 자신도 '쓸모' 없는 노인이 되었을 때 얻게 될 반응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자녀의 모습은 부모의 거울이기 때문이다. 지혜와 통찰이 쌓인 어른의 언어는 '노인이 되면 입을 닫고 지갑을 열어야 한다'는 말을 무색하게 만든다.
나도 모르게 새겨진 잘못된 훈육방식이 내 대에서 완성되지 못하더라도 자책말자. 세대가 거듭될 수록 반감되기를 소망한다.
마지막으로 알아야 하는 사실은, 그럼에도 자녀는 부모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부모를 용서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이다.
그림 영역)
갑자기 엄마라고 부르며 반말하는 직원
보험직원 : 설명이 이해가 되지, 엄마?
나 : 응, 좀 더 비교해 봐야 알 것 같네?
보험직원 : 박람회 기간에 가입 안 하면 혜택 못 받아 손해야. 엄마
나 : 응. 그렇게 손핸가?
보험직원 : 하핫, 생각해 보세요. 00 어머니.
나 : 네, 설명 감사해요. 돌아보고 올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