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 최초의 기억은 언제일까
기억부터 생애인 걸까. 기억의 바닷속 어렴풋이 보이는 해마를 따라가 보았다.
도착한 심해에는 최초의 기억들이 상영되고 있었다.
작은 발로 서툴게 걸었던 기억
아빠는 내 손을 잡고 마당에 나가 나를 귀여워하는 동네 언니 오빠들에게 나를 소개했다.
귀여움을 자랑스러워했던 아빠와의 장면은 움직임이 있는 짧은 영상으로 기억에 남아있다.
4살 초 '펑펑 눈이 내리는 겨울'
그때는 남동생도 태어나지 않았고 엄마 배도 나와 있지 않았던 때다.
엄마는 문간에 나를 앉혀 놓고 마당에 펑펑 내리는 눈으로 눈사람을 만들어 주셨다.
나는 그대로 앉아 구경만 하고 처음 본 눈을 신기해하면서 좋아했다.
그 집은 3,4살까지 살았던 집이라고 하셨으니 4살 혹은 늦어봐야 5살 초 겨울로 추정한다.
“눈이 오네 와아~~ 너무 이쁘지?"
엄마는 내게 눈사람이란 존재를 알려주려고 눈을 열심히 뭉치셨고 나뭇가지와 성냥을 붙이셨다.
'이것 봐라 눈썹이다. 이것 봐라 손이 된다.' 라며 좋아하셨다.
이 장면은 성인이 되어서도 머릿속에 생생하게 남아있어 눈 오는 상황이거나 어린 시절을 추억할 때
떠올리는 따뜻한 추억이다.
5살 8월 24일
4살 터울 남동생이 태어난 날이었으므로 분명 그 날짜였겠다.
한낮이었다. 엄마는 배를 부여잡고 아기가 나올 것 같다고 옆집 할머니를 모셔 오라셨다.
뭔가 모를 급박한 분위기에 쏜살같이 달려 나가 대문 앞에서 할머니를 불렀다.
“할머니, 할머니~~~!”
할머니는 택시를 불러 뒷좌석에 엄마를 눕히고 나는 조수석에 탄 할머니 무릎에 앉아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을 가던 도중 할머니가 엄마를 불렀는데 엄마는 뒷좌석에서 기절하셨는지 대답이 없으셨다. 할머니가 나를 안고 낀 깎지손 장면은 스틸컷으로 기억 속에 오랫동안 남아있다. 이 기억은 4,5살에 살았던 집에서의 기억이다. 6살에 이사 가서는 친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정착하여 살았으니까.
코넬대학교 Qi Wang 교수 연구에 따르면 정서가 충만한 일을 생애 최초로 기억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연구에 따르면 아이 중심의 언어를 자주 들려주는 서양은 만 3.5세, 전체를 돌아보게끔 하는 언어를 들려주는 동양은 4세를 최초 기억의 나이라고 했다.
내게도 정서가 충만한 최초의 기억들이 있었다.
그러나 잊고 싶은 기억들까지 머릿속에 생생하다는 건 문제였다. 이는 공포나 큰 트라우마를 꾸준히 겪은 뇌의 편도체가 해마를 자극해서 단기 기억을 장기로 넘기는 현상이라고 한다. 편도체가 계속해서 자극되는 경우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불안을 대비하기 위해서다. 망각은 신이 주는 선물이라고 하던가. 안타깝게도 내게는 선물이 주어지지 않았고 나쁜 정서의 기억들은
무의식의 심해 곳곳에 숨겨져 있었다.
5살 때였다.
방문을 열었는데 문소리에 잠이 깬 아빠가 큰 소리로 호통을 쳐 무서웠던 장면이 떠오른다. 그때쯤 자다가 꿈을 꾸었는데 삼지창을 든 도깨비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실제도 아닌 꿈 기억까지 생생하다. 꿈속에서도 나는 두려웠고 도깨비는 아빠였을 거다.
7살 때였다.
어린이집을 마치면 바로 집에 돌아오기로 엄마와 약속했다.
그런데 엄마와 외할머니네 가기로 한 사실을 까맣게 잊고 어린이집 옆에 사는 친구의 집으로 놀러 갔다. 결국 친구 집으로 찾아오신 엄마는 무척 화가 났고 나는 그 길로 집으로 들어가 매를 엄청 맞았다. 길게 느껴진 등하원 길은 무섭고 혼자 다니기 무척 싫기도 했다. 엄마의 야단을 기억해 보면 내가 약속을 잊은 게 처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엄마는 나를 때린 끝에 본인이 펑펑 울었다. 그 장면은 매우 충격적이어서 아직까지 생생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이유로 어른이 그렇게까지 울지는 않았을 텐데. 엄마도 여러 가지 힘듦이 겹쳤겠지. 냉담한 삼대 대가족 내 여러 가지로 힘들었을 엄마를 이해할 수 없는 맏딸 어린이는 자신의 잘못 보다 큰 대가를 치렀다.. ‘엄마의 눈물’을 본 뒤 7살 어린이는 세상이치를 파악하며 점점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조숙했던 7살 어린이는 착한 아이 콤플렉스 그물에 걸렸고 '진짜자아'는 바닷속 어두운 곳으로 더욱 잠식하고 있었다. 그랬구나. 지금에 와서도 엄마가 자신을 이해해 준다며 내 앞에서 흘렸던 감동의 눈물마저 왜 거부감이 들었는지 깨달았다. 그 당시 나만을 위한 눈물을 흘리지 않기로 마음먹었기에. 1년간의 심리상담 중 내 앞에 각티슈는 필요 없었다. 끊임없이 감정을 억제하라는 내면의 소리로 눈물 시스템이 고장 난 지도 오래다. 나는 아이가 충분히 그럴만한 일을 저질렀음에도 부모의 삶의 무게를 함께 나누어 짊어졌다. 오죽했으면 그러셨을까 회상하면서도, 나 만큼은 내 아이들 앞에서 죄책감을 안기는 눈물을 보이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아이에게 넘겨진 부모의 알 수 없는 감정 찌꺼기는 자녀의 마음 성장과 독립을 방해하고 철이 일찍 들게 한다. 그러한 조숙은 ‘허구독립’이다.
이 외에도 상황이 이해 안 되는 나쁜 정서의 기억들은 미제 사건으로 남아 안개처럼 내 마음속에 떠돌았다. 이를테면 5살 딸이 실수를 하면 내가 실수했던 5살이 떠올랐다. 나이 대 별로 떠오른 기억들은 너무도 혹독하고 우울했던 그때가 생생하게 소환되어 나를 무척 괴롭혔다. 부모님의 야단이 있을 때마다 매번 벽과 가구 틈으로 쏙 들어가서 나오지 않고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 내가 물려받은 채찍질은 형태와 강도만 바뀌었을 뿐 내 아이를 향해 재현되고 있음을 자각하였고 자책하기를 반복했다.
정신분석학자 라캉의 말대로 타자인 부모의 기대가 내 안에 들어와 복제되었다가 또다시 내 아이에게 붙여 넣기를 하며 나는 유아에게 성숙을 요구했다.
'나는 전혀 다른 삶을 살 거야.'라고 자신했던 나는 왜 똑같은 상황을 전개하는 걸까. '때로는 아이에게 버럭 화를 내는 게 사람이다.'를 인정하지 못하고 스스로에게도 역시 과도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미는 걸까. 첫째를 키울 때 둘째 키우듯 여유 있게 키운다는 주변 엄마들의 칭찬에도 나는 또다시 노오력 하다 자책한다. 이런 반복까지도 유전자에 대물림된 프로그래밍일까. 일개미는 유전자에 입력된 대로 끊임없이 먹이를 나르며 여왕개미의 번식을 돕다 죽는다. 개미와 나는 다를 게 없는 개체일 뿐인가.
리처드 도킨스의 책 <이기적 유전자>는 인간은 유전자 보존을 위해 맹목적으로 존재하는 숙주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인간이 형제와 자식을 사랑하는 방식마저도 자기와 비슷한 유전자들을 되도록 많이 남기기 위한 프로그래밍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이기적 전략으로 인해 지구상에서 복잡하고도 고도의 지능을 갖춘 생명체로 진화했다고 주장했다. 후에 인간은 예외라는 추가 설명이 있었지만 나 또한 유전자 보존의 숙주로서만 인생을 살다 가긴 싫다. 숙주 따위가 아닌 자아성찰이 가능한 지능적 인간이 있고 그런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또 다른 나가 있다. 인간에게는 동물과 다른 메타인지가 있기 때문에 현재의 진화가 이루어졌지 않은가. 나의 ‘산후우울증’도 유약함의 근본원인을 찾아보게끔 만드는 트리거가 되어주었다. 치유과정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1단계 아이의 힘든 얼굴을 통해 자책과 비난으로 물든 나를 자각
2단계 장녀로서 살아온 과거의 뿌리 따라가기
3단계 공부와 연습으로 사랑의 언어를 말하지만 진정성에 대한 의문
4단계 나로서 살아가려는 자아성찰과 강한 의지
5단계 나를 사랑해야 아이 외 타인을 사랑할 수 있음을 깨달음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 데 70년이 걸렸다"
김수환 추기경의 말씀을 보면 1,2년 안에 빠르게 평안을 얻겠다는 마음도 어쩌면 욕심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꾸준히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 5단계에 이르는 날이 오겠지. 어느새 나의 사랑도 가슴으로 내려오는 날이 오겠지.
그림영역 ) 해마 말풍선 "날 따라와~."
나를 만나러 깊은 심해로 들어가는 길이 어렵다면
당신의 최초의 기억들을 떠올려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