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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디아이 May 19. 2024

너무 이해하려 하지 마세요.

타인의 감정 중심으로 살았던 때 아이러니하게도 아픔을 공감하지 못했다.

남의 아픔이 이해가 잘 되는 내가 싫었던 적이 있다.

내 아픔의 깊이도 그만큼 깊다는 뜻 같아서다.

누군가는 그랬다. 너무 이해하려 하지 말라고.

모든 상황을 이해해 줘야 하는 건 아니라고 했다.


이해에도 상대를 구분하는 지성이 있어야 했다.

나의 이해를 착취하는 사람에 대한 이해는 나를 한 번 더 내팽개칠 뿐이었다.

'나'란 사람이 없는 타인의 이해는 공감까지는 닿지 못한 연민이었다.

연민도 사랑의 일부이지만 내 슬픔의 표상일 뿐이었다. 그래도 희망은 있었다.

'상처 입은 치유자'의 연민은 누구보다 공감과 사랑으로 나아갈 힘이 있다고 했다.


마음치유 과정을 통해 '나'를 마주하고 난 뒤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이 조금은 달리 보였다.

유화를 배울 적 고흐의 작품을 모방하면서도 그저 기법과 화려한 색채에만 몰두했었다.

타인의 감정을 중심으로 살았던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림에서 아픔을 공감할 여력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가 그림에서 보여 준 세상과 인간을 향한 사랑과 열정이 눈과 귀로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반 고흐, 영혼의 편지> 책에는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썼던 편지에 이런 내용이 있다.

'가족의 신뢰를 되찾는 것이 그렇게 희망이 없을까. 아버지는 편견에서 완전히 벗어난 적이 없다.'

모국과 가족을 향한 마음을 '향수병에 굴복'과 '멜랑꼴리 한 희망'이라는 양가감정으로 표현하였다.

원가족에게 지속해서 상처를 받으면서도 품을 그리워하는 괴로움이다.


고흐는 자신의 자아상이 서린 아픔대로 타인에게 연민을 느꼈다.

몸을 팔아서 먹고사는 고독에 처한 여자를 사랑하고 집착하는 것으로 자신을 치유했다.

고흐는 테오의 지원으로 괜찮았던 경제 상항에서도 스스로 가난하다고 여겼고 그 생각 그대로 가난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향한 마음을 그림으로 그렸다.


고흐는 첫째로 태어났지만 그전에 사산한 고흐 형의 이름을 그대로 땄다.

형을 잃은 부모의 불안, 기대, 비난은 모두 첫째 아들 고흐에게 고스란히 넘겨졌다.

불행한 환경에서도 자신을 믿어주는 단 한 명이 있다면 그 사람은 잘 자라날 수 있다고 하지 않던가.

고흐는 부모가 바라보는 대로 자신을 불행한 사람으로 여겼지만 다행히 영원한 지지자 동생 테오가 있었다.


신문에 고흐가 죽기 전 마지막 기간 동안의 그림만 모은 전시가 인기를 끌었다는 기사를 봤다.

죽기 직전까지 뿜었던 고흐의 특별한 사랑과 에너지는 사람들에게 공감과 위로를 주었을 것이다.


이제는 내 삶에 잠식된 나와 타인의 연민에서 더 나아가 고흐가 내뿜었던 사랑과 열정을 닮고 싶다.

설사 가족으로부터 더 이상의 사랑과 이해를 받지 못하더라도 괜찮다.

사랑과 열정을 내뿜는 사람으로 태어난 고흐 자체의 생명력을 알게 되었으니까.

그가 과거에 태어나주어서, 편지를 남겨주어서 현대인인 내가 알게 되었으니까.

불행했던 그도, 사랑을 남겼던 그도, 우리도 모두 죽게 된다는 건 사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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