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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디아이 May 15. 2024

부모와 거리두기 후 증상

무기력해서 걸을 기운이 없었고 체력은 바닥 나 하늘에 별이 자주 보였다.

부모와의 거리 두기가 시작되었다.

명절이나 생신 등 가족모임에 나타나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마음속으로 부모님이 돌아가셨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실제가 아닌데도 상중 애도기간과 비슷한 감정들을 겪었다.

가정을 이루고 있는 성인자녀의 삶을 비난하는 태도로 관여하는 방식은 사절이었다.

그런 딸의 태도에 화가 나 인연을 끊자고 말씀하셨지만 그날의 일은 도화선이 되었다.

불안회피형 애착으로 형성된 의존적 집착은 내 나이 불혹쯤 강경한 방식으로 끝이 났다.


격려와 응원으로 이끄는 건강한 독립은 서로의 환희다.

나의 거리 두기는 마음 디톡스처럼 속에 숨겨져 있던 독성이 흘러나와 고름이 차고 아팠다.

감당 안 되는 우울은 나를 집어삼켰고 어쨌거나 이 시간을 묵묵히 지내 보내야 했다.


무기력해서 걸을 기운이 없었고 체력은 바닥 나 하늘에 별이 자주 보였다.

거울에 비친 얼굴은 회색빛이었고 입술은 생기 없는 적갈색.

아이들은 이런 상황을 이해할 수 없지만 다정한 엄마를 볼 권리가 있었다.

눈빛은 아이들을 돌볼 최소한의 빛만 남겨두었고 나머지는 돌봄을 받아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차로 20분 거리에 있는 위치도 너무나도 멀게 느껴졌고 움직임의 범위가 매우 적었다.

제법 쌀쌀한 3월이었다. 지인이 추천해 주는 심리상담센터를 가고 싶었지만 운전해서 35분 걸리는 그곳까지 도저히 갈 용기와 체력이 없었다. 상담 비용도 내게는 비싸보였고 혼자 힘으로 이겨내 볼 생각이었다.


심리서적을 들여다보는 와중에 <무기력이 무기력하도록>이라는 책이 눈에 띄었다.

무기력은 내 삶이 내 의지로 통제되지 못하는 한계를 느낄 때 오는 감정이라고 설명했다.

책 제목 자체에도 폭풍 같은 위로가 되었다. 심리적 치유가 깊게 필요치 않은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동기부여를 다룬 몇몇 책에서는 무기력하게 있지 말고 자리를 박차고 나오라고 한다. 그런데 사실 그런 책을 쓸 만큼 치유의 기간이 필요했던 저자의 삶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최소 몇 년간은 무기력이 무기력하도록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무기력한 나, 힘이 없는 나, 지친 나를 스스로 수용하고 내버려 두는 애도기간이 있었다는 뜻이다. 생각해 보면 그 기간이 핵심이라 여겨진다. 그런 기간을 거친 후 자신의 때에 얻은 깨달음은 자신만의 통찰이 깃든 지혜다. 더 깊이 들어가서 생존유지를 위해 겨우 '숨'을 쉬고 있는 자에게 이불을 박차고 나올 체력과 자신을 이길 에너지가 아예 없다. 무기력이 가장 무기력하도록 온전한 쉼을 주어야 한다. 이것이 그 사람을 일으킬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다. 회복에도 빠른 회복을 염원하는 태도는 효율을 추구하는 참 한국다운 관용표현이지만 그래야 이해가 쉬우니 덧붙였다.


6개월 정도가 지났다.

여전히 마을에서 마주친 지인과 친구엄마들과 웃거나 일상을 누리면 안 될 것 같았다.

죄책감에 괴로워한다는 사실을 부모님이 안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떠올렸다.

드디어 네가 죄책감을 갖고 깨닫는구나 하고 좋아하실 것 같았다. 그건 내 생각이라고 오해라고 하실지라도 이것이 내가 느끼는 나와 부모의 신뢰 수준이었다. 40여 년 간 기회와 시간은 많았고 소통의 결과였다.

이 모든 것은 내가 자처한 일이지만 외로움과 고립이 두려움을 이겨내야 한다. 얽히고 섥힌 모든 관계에 부여된 나의 역할과 의무를 벗어던지고 오로지 '나'를 대면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정죄의식을 갖게 하고 자신에게만 의지하도록 만드는 지도자는 우상숭배를 가르치는 것과 같다.

부모에 대한 효 전통이념의 극단적인 면은 자녀에게 죄책감을 주었고 종속되게 만들었다.

한국의 부모들에게 나르시스트가 많다는 통계보다 다음세대로 대물림 가능성은 더 위험해 보였다.

나도 모르게 내 안에 자리 잡은 심리적 구도를 수시로 자각하고 떨쳐내기란 여간 쉬운 성찰이 아니었다.

그래서 6일을 세상을 살다 1일은 교회에 가서 말씀 듣고 다시 6일을 살다 일요일에 교회에서 기도를 하나보다 주기가 이해도 됐다.

비교경쟁으로 인한 우월주의와 결부된 관계주의, 유교주의와 결부된 민족의 자주성은 권력 상위에 있는 집단의 이기심을 정당화했다. 한국적 특성으로 똘똘 뭉친 권력구도의 카르텔은 '나'를 찾고자 하는 강력한 마음을 갖게 만들었고 동시에 '나'를 찾고자 떠나는 타인의 뒷모습을 고깝게 보지 않는 모순이 숨겨져 있다.


부모에게도 연락을 안 하는데 친척들에게 안부를 물을 수 없었다. 친근했던 고모,이모,삼촌에게 연락하는 것도 힘이 닿질 않았다. 어쩌다가 주고받는 친척언니와 안부톡 외에는 나의 근간이 되는 모든 혈연으로부터 고립된 느낌을 받았다. 초등학교때부터 나갔던 교회에도 나갈 수 없었다. 세상에 덩그라니 홀로 남은 외로움이 느껴졌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가장 두려운 감정중 하나는 고독이다. 엄마는 내게 이런 감정을 주었구나. 엄마가 가장 무서워 하는게 외로움이었구나. 외로운 만큼 집착을 허용했고 집착하였구나. 그래서 유기불안을 일으켰구나. 눈앞에는 외로움을 두려워 한 여인이 보였다.

엄마는 결정적일 때 우리를 두고 어디론가 가버리는 방식으로 벌을 주셨던 기억이 떠오른다. 지하철에서 엄마 말을 듣지 않고 화가 치밀게 했던 남동생의 행동과 대중 앞 수치심으로 잔뜩 화가 난 엄마는 지하철 문이 열리고 나간 뒤,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은 엄마 아들 아니야.'라며 내 손만 잡고 앞으로 가버렸다. 6세 남동생은 울고불면서 쫓아왔었다. 내가 성인이 되어서도 엄마는 같은 방법을 사용했다. 20대 같은 목적지를 향하는 중 화가 난 엄마는 지하철을 먼저 타버렸고 내 눈 앞에서 문은 닫혔다. 아마도 그 날이었던 것 같다. 내 마음 속에서 천천히 엄마를 지우기로 한 날이.

내겐 남편과 아이들이 있는데도 고독과 고립감을 느낀 경험(누구라도 갑작스러운 단절은 같은 감정을 느끼기 만들겠지만)은 잘못된 방식으로 점철된 관계를 끊는 것으로 나를 다음 단계로 진화할 수 있게 만들었다. 심리학에 자존감과 연관지어 설명할 수 있는 '혼자 있을 때 행복한 사람은 여럿이서도 잘 지낼 수 있는 사람' 이라는 말이 떠오르도록. 지독히도 관계주의적인 한국사회에서 관계를 끊어보니 끊긴 건 사랑이 아닌 나의 역할들 뿐이었다. 


부모님댁에 가질 않으니 멀리 사는 남동생과도 못 본 지 오래되었다.

어느 날은 가족모임에 나타나지 않는 내게 편하고 좋냐고 묻는 톡이 왔다.

편하고 좋아 보였나 보다. 그래서 부러웠나 보다. 너도 네가 원하는 삶을 살라고 말해줬다.

남동생의 조력이 부족하여 원가족이 오래 와해되고 있다는 엄마의 종용에 앞서 자신이 원하는 때에 누나에게 연락할 수 있어야 한다. 자녀들끼리의 의무를 강요하는 방식은 도움은 커녕 해가 된다. 자발성 없이 등 떠밀린 안부톡에는 억울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누나에게 연락 좀 하라는 엄마의 충고는 남동생을 피곤하게 만들어 누나에 대해 스스로 떠올려 볼 여유를 주지 않았다. 엄마는 내게 전화해서는 다른 집들의 장녀와 비교하는 방식으로  동생을 챙기고 의무를 다하라고 충고했다. 한 때는 엄마와의 힘듬을 토로하며 누나에게 자주 전화상담을 걸어오곤 했던 남동생을 충고한 엄마는 권위를 되찾고 남매 사이의가 중심에 서는 듯 보였지만 막상 자녀사이까지 멀어지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을 덜고 탓을 돌리고 싶은 엄마의 심리가 숨겨져 있었다. 사랑을 가르치는 말에 자애로운 사랑과 존중은 없었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부모님 생신 이전 주말에 일정이 도저히 안된다면 생신이 지났을지라도 주말에 할 수도 있다고 남동생도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 부모님이 완강하게 반대할지라도.

생신을 지나서 하면 안 된다는 법칙은 어디에도 없다. 사람을 우선에 두지 않은 완고함은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의 전유감정이다. 유연성은 줄어들고 전통적 규율을 요구하여 권위를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다. 생신잔치 때문에 주변사람들을 계속해서 힘들게 한다면 생신 당일에 기분 좋은 축하와 건강을 바라는 마음을 받지 못할뿐더러 마음 한켠에 생신을 그만 치르는 날이 오기를 염원하는 마음을 유도하는 것이다. 장녀만 모든 상황을 뒤집고 엎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장녀가 꼭 더 비용을 많이 부담하고 동생은 그보다 덜 해야만 하는 건 아니다. 상관은 없었지만 엄마는 규칙처럼 서열을 강조했다. 그 방식은 막내딸인 엄마 본인이 외할머니에게 드렸던 용돈 방식을 합리화했다. 당연히,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건 없다. 누나도 마음이 아플 때 돌봄을 받고 지원받을 수 있다.


또한 엄마가 가지 말라는 신혼여행지를 남동생부부의 판단대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유행이라는 몰디브에 갔다 와서 예산에 대해 후회하는 일은 엄마가 걱정할 일이 아니다. 몰디브 예산을 지원할 수 없다는 조언 한두마디면 족하고 예산 안에서 부부끼리 알아서 하도록 두어야 한다. 20대 중후반에 결혼하는 아들이 어리게 느껴지고 걱정되는 마음은 알겠지만 침착한 조언까지 만이다.  한 가정을 꾸리는 남편으로서의 단추를 스스로 채우고 시행착오 하도록 두어야 한다.

예산문제로 싸우고 사이가 벌어질까 봐 하는 걱정이라면?

사람들이 택하는 이혼도 삶의 방식 중 하나다. 아이가 있다면 다를 수 있지만 또 그 가족의 형태대로 최선의 방식을 도모해 더 잘 살아갈 수 있다. 인연이라면 극복하고 방법을 찾아갈 것이고 인연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는것이다. 이혼 안 한 부모님 아래에서 신체적, 정서적 학대를 받으며 살아남은 나의 삶이 더 나은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부모 각자가 좀 더 마음 편한 상황 아래 돌봄을 받는 자녀가 훨씬 행복하다. 세상에 절대적으로 안 되는 일이란 없다. 그냥 살아가는 것이 잘 사는 삶이다.


오래전 신랑과 아이와 함께 부모님 댁에 방문한 날이었다.

아버지는 어린 손녀가 있는데도 험악한 분위기를 만들고 호통을 치는 일이 잦았다.

아버지는 아이가 할아버지의 스타일에 적응될 거라고 했지만 나는 40여 년을 들었어도 적응되지 않았다.

오히려 어릴 때는 젊은 세포로 버텼지만 이제는 심장병이 생길 것만 같았다.

방문을 마치고 돌아가는 차 창밖으로 아이가 고사리같은 작은 손으로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하고 시야에서 사라질 때 까지만 흡연을 참아달라는 말은 수년에 걸쳐 지켜지지 않았다. 바람에 흘러 들어오는 담배연기는 코를 찔렀고 나는 언제나 화가 난 상태로 출발했다.


화를 자제해 달라는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아버지에겐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불안한 환경 속에서 느끼는 나의 불안 심리로 영향받는 아이들을 보는 내가 힘들었다. 사실 아이들은 큰 영향을 받지 않는다 해도 내가 그걸 이겨낼 힘이 없었다.

집에 돌아오면 참 오랫동안 우울감이 나를 잠식하여 어두운 기운을 내뿜었으니까.

타인의 삶에 간섭 말라는 딸의 말에 화가 난 엄마까지 인연을 끊자고 한 마당에 더 이상 부모님 댁에 갈 이유가 없었다. 함께 있어서 서로가 힘들다면 만나지 않는 것이 존중이요 최선이다.


몇 개월의 공백이 있은 후 엄마가 우리 집으로 방문하겠다고 하셨다.

엄마는 얄궂게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나를 마주했다. 언제나처럼 설명이란 게 없었다.

우리는 맥주를 마시며 새벽까지 부모로 인해 힘들었던 이야기를 그 때야 털어놨고 엄마는 공감을 해주려고 노력하면서도 원점으로 돌아오고를 반복했다. 엄마는 거의 모든 일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고 놀라기도 하셨다. 엄마의 눈을 보니 나를 이해하는 것 같지 않아서 솔직히 말하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해하는 척하는 것 같은데 진짜 맞냐고. 그래도 엄마는 척이라도 노력해 주셨다.

비록 엄마는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와중에도 말을 끊고 당신의 사정과 변명이 먼저였지만.

집으로 돌아가신 후 주고받은 톡의 끝은 화와 억울함이 가득했다.


인간은 모두가 자기중심적이라는 이론 하에 설득력이 하도 좋아 딸에게 가스라이팅을 잘하는 엄마라도

충분히 억울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그래도 나의 근간이었던 엄마와의 소통이 있고 난 후 일상을 누릴 최소한의 힘은 생겨난 듯했다.


거리 두기 효과였을까. 추후에 엄마는 아버지와 함께 오셨다.

엄마는 아버지에게 보통의 아버지가 딸을 생각하는 마음의 평균 잣대를 들이대며 비난하고 종용했을 것이다. 엄마를 통해 아버지에게 전해진 나의 기억들은 이러했다. 5세 때 자전거를 타다가 굴러떨어져 다쳤다는 이유로 무자비한 폭행, 엄마를 회유하기 위한 인질로 자녀를 학대한 일, 자신을 위해 새벽4시까지 이어진 노동력 착취들, 정신적 학대, 수많은 죽음 협박 등등 수많은 일들은 마치 영화 '큐브'처럼 주인공이 죽어야 끝나는 영화만 같았다. 신랑은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 자리를 비켜주었고 아버지는 엄마와는 다르게 진심으로 사과를 하는 듯 했다.


그러면서 마지막엔 덧붙인 말씀은 이러했다.

'그런 일들이 있었는지 기억은 하나도 나지 않아. 그래도 진심으로 사과는 할게. 다만 이후에 받아들이고 말고는 네 몫이다. 계속 괴로워 한다면 괴로운 인생이 될 것이다.' 라는 말로 사과를 받고 나서 누그트릴 마음의 속도까지 통제하려고 하셨다. 아버지는 갈비뼈를 다쳐서 더 이상 말할 수가 없고 고모에게 전해줄 물건이 있어서 얼른 가봐야 한다고 했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오래간만에 만나 잡은 자녀와 진솔한 대화를 나눌 기회를 이렇게 날리진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갈비뼈를 다쳤다면 낫고 나서 갔을 거 같다. 더군다나 뒤에 약속을 만들지 않았을 것 같다. 마침 갈비뼈가 다친 우연함도 있지만 아픔을 앞세운 회피 심리도 느껴졌다. 아버지가 내게 한 말보다 보여준 행동 그대로가 딸에 대한 마음크기였다. 애초에 애착과 애정이 그다지 없었다. 내면에 사랑보다 괴로움의 크기가 압도적이라 사과 후 반응까지도 철벽 방어를 쳐야 하는 사람이었다. 


사과는 사과였을까. 그래도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는 듯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녀의 말을 들어보려 발걸음을 하셨다는 것 자체에서 비록 꺼지기 직전의 불꽃 정도 나마 남아 있는 애정을 확인하기도 했다.

엄마에겐 애정이 큰 만큼 미워하는 마음을 그대로 두었던 것과 달리, 나 혼자 아버지를 내 마음속에 들어 앉혀 놓고 미워하느라 애쓴 에너지가 생각 보다 무척 아까웠다. 스스로가 아버지와 같은 모습으로 태어나고 큰게 아빠 죄가 다가 아닌 걸 알지만 세상에는 이런 생부가 있을 수도 있다고 인정하기로 했다. 그냥 있는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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