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 후 아이를 보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엄청나게 몰려오기 시작했다
나태주 시인의 글 <안녕>에서 배우자와의 영원한 이별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내에게 건네는 아침 안녕이 언제까지 이어지기나 할 것인지.'
동고동락한 배우자와 노년의 여정 끝에서 맞는 죽음은 어떤 느낌일지 감히 헤아릴 수 없다.
죽음 중에서도 가장 고통스러운 건 배우자의 죽음이라고 한다는 통계기사를 봤다.
이는 자녀의 죽음보다 상위에 있다. 그런데 죽음이 머나먼 이야기는 아닌 시인에게서 두려움 보다는 삶의 끝자락 쯔음 다정한 죽음을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글을 통해 그간의 삶을 얼마나 따스하게 바라보았는지도 느껴졌다.
죽음에 직면한게 아니고서야 갑자기 다정해지진 않을테니 말이다.
이쯤에서 시인의 유명한 다른 시 '풀꽃'이 떠오른다.
<풀꽃>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죽음이 존재하는 이유는 뭘까.
처음에는 죽음의 존재가 가혹하기만 했다. 이럴 거면 태어나게 하질 말든지.
수많은 사람들의 피고 짐, 만남과 헤어짐을 만든 하나님이 너무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죽음은 삶을 자세히 보도록 오래 보도록 만들었다.
불의의 사고로 죽음 직전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와 뒤바뀐 삶의 태도를 보면 정말 그랬다.
개그맨 겸 사업가 고명환은 사고로 죽음을 대면하고 나서야 내가 진정 원하는 삶을 살기 시작했다고 했다.
결혼 전 혼자일 때는 죽음이 그렇게까지 두렵지 않았다.
그런데 배우자가 생기고 한차례 두려워졌다.
그 다음 차례로 출산 후 죽음에 대한 걱정이 엄청나게 몰려오기 시작했다.
아침에 눈을 뜨고 나서 천장이 보인다.
바로 옆으로 얼굴을 돌려 아기의 존재를 확인한다.
아기는 곤히 자고 있다.
하얗게 불태웠던 전 날의 육아로 아침이 되니 내 다리가 검은 재가 되어 사라지는 상상이 보인다.
내가 이대로 죽으면 이 연약한 아기는 누가 키우지
짤막한 유언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남편은 나만큼이나 아이를 향한 레이더가 깨어있을까.
그건 결코 아닐 것 같지만 여러모로 나보다 더 잘 키울 것이다.
다행이다 안도하며 시야는 흐려지고 다시 잠에 든다.
그러다 한 번은 '죽음'을 불러다 앉혔다.
신랑에게 내가 혹시 세상에 없는 일이 생긴다면 아이를 잘 키워달라고 당부했다.
육아책에도 중요한 부분에 밑줄을 무조건 쳐놨다. 남편에게 밑줄 위주로 보면 된다는 이야기도 남겼다.
아기를 보호하기 위한 감각은 더 예민해졌다.
분명히 아기는 아빠와 같은 방에서 자고 있지만 다른 방에서 자고 있는 엄마가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고 깨깬다. 엄마의 몸과 정신은 아기에게 모든 촉수를 세우도록 재설정되었다. 이건 그냥 엄마와 아기 사이에 흐르는 에너지다. 내가 과거에 보고 겪은 두려움의 총합으로 민감 단계를 더 높였다.
무엇이 나를 죽음 앞에 이렇게 불안하게 만들었을까.
과거를 떠올려 보면 나는 아버지로 인해 죽음을 대면해 볼 일들이 많았다.
아버지는 자신이 느끼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공격성으로 표출했다.
자신이 원하는 완벽한 상황으로 굴러가지 않는다고 여길 때마다 타인을 비난하며 괴로워하며 주변인들도 함께 힘들어야 했다. 괴로움이 극에 달할 때는 자녀가 두려움의 짐을 나눠주길 바랐다.
"내 말을 듣지 않으니 가스불 켜고 같이 죽자."
이렇게 말한 아버지는 내 눈앞에서 가스불을 켜 불을 껐고 가스냄새가 내 코를 찔렀다.
"아빠, 그렇게 하면 가스가 집 안에 안 차요. 모잘라요. 단계를 더 올려야지, 이렇게.
저쪽 창문은 안 닫혔어요. 이 쪽은 밖에서 구출도 못하게 다 잠갔어요."
이렇게 대답하고 실행한 나는 따스한 햇살이 들어오는 공간에 앉아 시계초를 응시했다.
나는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는 듯이 서랍을 뒤기지 시작했다.
"가스가 다 차면 라이터가 필요할 것 같아요."
아빠는 나의 행동을 바라보다 부랴부랴 창문을 여셨다. 고등학생 소녀를 협박해서 얻을 게 뭐가 있었을까.
나는 내 생애 죽음을 계획한 적이 없다. 집안의 가스불로 집이 터질 리 만무하지만 난 숨도 오래 참을 수 있으니 아버지보다 오래도록 정신을 차리고 있을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더이상 이런 상황으로 내 인생을 낭비하지 않기 위하여 아버지가 가장 두려워 하는 죽음,
그것을 나는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자아의 뿌리에 사랑이 없어 어린아이 단계에서 마음 성장이 멈춘 아버지가 안타깝기도 했다.
상황이나 감정을 이해받지 못해 언제나 강하게 자신을 어필해야만 했다.
감정을 조절 기능이 무너진 어른아이 앞에 자녀는 얼마나 크나큰 짐이었을까.
눈앞에 들이닥치는 사건과 위협들로 죽음 앞에 초연한 줄 알았다.
그렇지만 완전한 오해였다.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 앞에 관조적인 시선은 지혜로운 해탈보다 회피였다.
잘 알지 못하는 두려움을 마주하지 못했다.
스스로를 돌보기 위한 시간을 갖지 못했다.
따뜻한 시선으로 타인을 바라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내면을 대신 채워 줄 외적 보상만 있을 뿐이었다.
죽음은 분리의 고통이고 합일이었던 어머니와 세상과의 분리라고 했다.
가족이나 사회 등의 집단으로부터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고 소외됨을 느낄 때도 분리의 고통을 느낀다.
책 속 이야기, 드라마, 사랑 노래에서 조차 합일의 기쁨과 분리의 고통을 노래할 때 큰 공감을 느낀다.
'우리 오늘부터 1일.' 혹은 '이제 우리 그만 끝내.'라는 대사 하나를 두고도 마음이 설레기도 하고 손에 땀을 쥐는 긴장을 느끼기도 한다. 결국 주인공의 입에서 대사는 뱉어졌고 광고가 나오며 드라마 한 편이 끝날 때면 그렇게 가슴이 저린다.
취학 연령 어린이들은 그림책에 녹여든 타인의 이야기를 통하여 분리를 간접적으로 배울 수 있다.
이야기 속 생모는 병들어 죽고 아버지는 계모를 맞이하면서 어머니와 분리되고 계모라는 낯선 세상이 존재한다는 걸 소개한다. 아이는 주양육자 (아빠, 할머니 등이 될 수도 있다)와의 애착형성 3년 동안 부모의 품을 통하여 세상이 안젆다고 믿는다. 그 후 애착을 바탕으로 어른이 되어가면서 부모와 아이가 서로 성숙한 분리작업을 해 나간다. 그러면서 사회의 일원으로 독립하여 살아갈 내면의 힘을 얻는다. 전래동화는 아이들에게 유익하지만 몇몇은 유해해서 요즘 사라진 동화가 있다. 어릴 때 아버지가 언급한 심청이 전래동화다. 아버지가 물에 빠지면 너도 심청이처럼 대신 물에 빠져 죽을 만한 마음을 갖고 있느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물에 빠졌지만 도움을 받아보지 못한 아이의 모습으로 아이를 마주했다.
7살 아이가 이따금씩 엄마와의 분리에 대해 불안한 마음으로 이렇게 물어본 적이 있다.
"어린이집 끝나면 엄마가 데리러 올 거야?"
"길을 잃어버리면 엄마가 날 꼭 찾으러 올 거야?"
"엄마는 내가 잘못해도 사랑해?"
처음에는 당연한 질문을 하는 아이의 마음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마음 한편에는 애착에 확신이 들지 않는 자신의 마음을 알려주는 아이가 고맙기도 했다.
분리 불안을 일으킬 만한 사냥꾼, 늑대 이야기나 동화책을 일찍 접하게 한 것에 후회가 드는 날도 있었다.
그래서 아이는 내적 기반에 탄탄한 밑작업을 하려고 수고롭게 애쓰고 있다는 생각이 어느 때부터 들었다.
그리고 아이의 질문을 곰곰이 생각하고 내적 의도 언어로 변환해 보았다.
'기본욕구를 채워주는 데만 급급하지 말고 엄마가 나를 자세히 바라봐 주었으면 해.'
사실 이 말은 어린 시절 나의 부모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기도 했다.
그래도 아이가 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정확하게 말해주었다.
"그럼~ 당연하지. 엄마는 하원시간에 꼭 너를 데리러 갈 거야.
만약 늦는 적이 있더라도 햇님이가 기다리는 마음을 잘 알고 있어.
엄마가 데리러 뛰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줘~."
아이를 양육함은 나의 성장과 치유다.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을 내 아이에게 해줄 때마다 그 언어를 내 귀로 들었고 나의 어린 시절도 함께 치유되고 있다. 이제는 더이상 죽음의 두려움에 끌려다니지 않고 종이 아닌 주인의 마음으로 내 인생을 살아가겠다.
마음에 사랑의 자양분을 하나씩 채울 때마다 내가 살고 있는 소소하고 편안한 일상으로 한 발자국씩 들여놓아야겠다. 그러다가 두려우면 뒤로 물러나도 좋다. 마음의 준비가 된다면 다음에는 두 발자국 들어갈 수 있으니 말이다. 오늘도 <안녕>이라는 글로 삶의 롤모델이 또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