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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디아이 May 29. 2024

마음 챙김도 속성반

사적인 일을 털어놓으며 마지막 자존심까지 발가벗겨짐을 느꼈다.

마음 챙김을 마음먹은 지도 반년을 훌쩍 넘긴 시점이었다.

첫 아이는 6세고 내년이 지나가면 초등학교 학부형이 될 텐데 그전까지 몸과 마음을 되살려야 겠다고 다짐했다.

마음치유라고 하면 마음이 흐르다가 평안에 머무를 때 비로소 얻는 것일진대 마음 챙김 마저 속성인 것이 참 한국인답다 싶었다.


일도 본격적으로 시작해 기반을 다져놔야겠다고 생각했다.

일 관련 컨설팅도 받으러 다니고 포트폴리오를 준비했다. 아직 혼자 있지는 못하지만 방학도 긴 초등학교 1학년 아이에게 손길이 필요할 때 일을 중단했다가 재개할 때 무리 없을 수 정도로 세팅 해놓고 싶었다.


비록 연로한 노인처럼 기력이 없지만 학부형이 되는 2024년이면 치유 될 사람이라는 희망이 생겼다.

'미래 회복티켓'을 품에 안은 채 교육관이 서로 맞는 남편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여러 초등학교 입학설명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자연을 벗 삼고 공동체 안에서 개인의 속도를 존중해 주는 '공동육아 어린이집'을 시작으로 대안교육을 시키고 있던 터라 자연스럽게 대안 초등학교를 관심 범위에 두었다. 알아보다 별이 보이면 지쳐 누워있다 일어났다를 반복했다.


그런데 어느 날 별안간 노트북이 열리지 않았다.

그다음 날도 역시. 너무 당황스러웠지만 이유를 찬찬히 생각해 보니 마음 한켠에 자기 확신의 결여를 느꼈다. 이러다가 나의 일을 의심하고 지치면 어쩌지.


그러던 중 책장 위에 오제은 교수의 <자기 사랑노트>라는 책이 눈에 띄었다. 몇 개월 전 지인과 고민을 나누다 추천을 받아 구매했던 책이다. 맞아. 그거야. 자기 사랑. 나를 사랑하지 못해서 내가 하는 일마다 마음 한켠에 자기 의심, 자기 확신이 없었던 거지. 나를 사랑하지 못하니 나를 대하듯 나와 가장 가까운 자녀와 남편을 충만한 사랑으로 대하지 못했던 거야. 어느 가정이나 투탁거리고 싸울 수 있지만 태도에 분명히 개선해야 할 지점이 있다는건 스스로 잘 알 수 있었다. 에히리 프롬의 말처럼 어머니들이 '젖'을 줄 수는 있어도 '꿀'까지 주는 엄마는 행복한 엄마라고 했는데 나는 '젖'만 주는 엄마였구나. 일단 알겠지만 말이야. 눈앞에 닥친 할 일들부터 마치고 와서 나를 사랑하는 것에 대하여 나눠보자 하고 방치했던 책이다. 그런데 아뿔싸, 지름길을 찾아다니다가 결국 출발선으로 되돌아오고야 말았구나.


책 속에는 실루엣 단색으로 채워진 '치유 나무' 그림이 있다.


"200년 전에도 이 나무는 여기에 서 있었다.

200년 후에도 여기에 서 있을 이 나무를 기억하라!"


종이 지면에서 하늘의 소리가 울렸고 눈물이 앞을 가렸다.

내 마음에는 옆에서 오랫동안 나를 지켜주는 나무가 필요했다.

내가 얼마나 살 것 같으냐. 딱 20년 남았으니 있을 때 자신에게 잘하라고 하는 일방적이고 불안한 아버지의 말보다 200년이나 남았으니 걱정 말라며 의지와 쉼이 되어주는 나무가 절실했구나.


책에 중간중간 나와있는 질문에 답하는 빈칸을 채우면서 마음치유를 위하여 전문가의 도움으로 집중 치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에 대한 투자가 가장 좋은 투자라고 했던가. 비용과 시간 측면에서 주저했던 심리상담을 더이상 미룰 수 없는 벼랑 끝을 마주하고 나서야 안산에 계시는 심리상담가 김명애 박사님을 찾아갔다. 추가로 나라에서 제공하는 무료 심리상담 7회도 동시다발로 이루어졌다.


그동안도 일기를 쓰며 충분히 성장통을 겪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상담이란 1인이 아닌 2인자에게 나의 사적인 일들을 털어놓는 일 아닌가. 상담가에게 마저 마음을 숨기거나 오류나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내 마음을 들켰을 때 받을 창피함까지 염두를 하고 상담을 시작했다.상담을 시작하고 2주간 나는 또다시 무기력의 늪에 빠졌다. 남아있던 마지막 자존심까지 발가벗겨지는 기분이 들었다. 후회도 됐다. 이러려고 상담을 받은 건 아닌데. 잊고 싶지만 결코 잊혀지지 않았던 수많은 고통의 기억들이 나를 휘감았다.


"왜 그랬을까요. 아버지라는 사람이 제게 왜 그랬을까요. 엄마에게, 우리 가족에게 왜 그렇게 했을까요."


<자기사랑노트> 오제은 교수는 설명했다. 상처받은 내면아이인 나를 드러내고 만나는 일은 나를 치유하고 성장시킬 수 있는 길이라고. '세상에서 가장 긴 여정'이라고 표현 한 그의 긴긴 유학공부와 피 끓는 듯한 자아성찰이 있었다. 그리고 내면아이를 만나 회복하였다. 죽음의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고 학대했던 자신의 목회자 아버지를 용서하고 옳은 방법의 하나님 사랑을 보여주듯 끌어안았다.


그와 달리 나는 2년의 치유 기간을 두었지만 그 기간을 넘어선다 해도 상심하지 않기로 했다.


심리상담을 통해 발견하기 어려운 아버지의 희미한 사랑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나를 잔인하게 학대했던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는 생각이 불혹의 때 현재로서 들지는 않았다. 세상에는 그런 사람이 존재할 수 있고 유감스럽게도 그게 내 아버지였다고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인정하는 데는 이르렀다. '과거의 일'이었다고 여길 수 있는 이유는 명확하다. 나를 힘들게 만드는 원인이 '현재' 내게 영향을 주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부모와 거리 두기로 많은 부분이 달라졌다.


또한 자기 사랑이 부족했기에 자책이 심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가슴속에 사랑이 충만해야 아이에게 충만한 사랑을 내뿜을 수 있다.

박박 긁어 아이에게 주고 싶어도 사랑의 자본이 없어 길을 헤매고 있는 나의 모습 마저 안아주기 보다 자책했다.

이제는 알았으니 있는 나의 모습 그대로를 수용하고 내가 나의 부모가 되어 나를 사랑하는 것부터 시작하자.

그러고 나서 사랑으로 충만해진 때 그 사랑이 다시 아이를 향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로 들떴다.

그 다음 단계로 거리낌 없이 세상과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되겠지.



책에서 이끄는 언어로 나를 위한 워크숍을 열어보았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한 신체에 손을 얹고 이렇게 말해보라고 했다.


'눈아 피곤하게 사용해 미안해. 얼굴아 예쁘지 않다고 구박해서 미안해. 어깨야,무거운 짐을 지워 미안해.'

"나 하고 싶은 대로 내 마음의 장단에 맞춰서 춤을 추며 살겠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 나에게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물어본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단호하고 강력하게 온 우주를 향해 선언한다. 내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있다면 반드시 그 방향으로 온 우주가 나를 인도할 것이다."

그리고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오른손을 가슴 위에 얹은 채로 스스로에게 말해본다.

"잔디아이야, 난 지금 이 순간부터 네가 행복할 것을 허락한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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