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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디아이 Jun 26. 2024

전투력 만랩 K장녀 나홀로 유럽여행

원리원칙, 전투력 만랩이 쓸모가 있을 데도 위험천만 할 때도 있다.


tvn 방송 '프리한 닥터'외 여러 매체에 관계심리 전문가 김지윤 소장이 나와 한국의 장녀 특징에 대해 말했다.


전투력 만랩

엄마의 엄마

원리원칙적


내 이야기인가 싶게 무릎을 치며 공감했다. 집안 성별 순서나 문화 면에서 차이는 있지만 보통의 경우 연장자가 돌봄의 역할을 하는데 한국의 엄마는 딸에게 남동생은 물론이고 위에 오빠나 아빠의 밥까지 챙겨야 한다는 마인드를 어렷을 적부터 심어준다. 남자 형제가 있는 경우, 딸이 하나 있을 때 혹은 두셋이 있을 때 느끼는 외로움의 양상은 조금씩 다른 것 같다. 돌발 상황에서 장녀는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일을 분배하느라 눈물은 메말라 있으며 상황을 정리하는 통치자가 있을 뿐이라고 했다.


나열된 특징들은 긴긴 삶에 힘듦을 주었지만 쓸모가 있는 때도 있었다.

20대 후반 한달간 나홀로 유럽여행 도중 길을 잃어 2시간 동안 밤거리를 헤매던 그런 때 말이다.

어둡고 짙은 밤길 위에 드문드문 비추는 유럽스타일의 노란 조명을 징검다리 삼아 걷던 중 행인 남자와 눈을 마주쳤다. 나는 눈에 긴장한 레이져를 쏘며 빠른 걸음으로 캐리어를 드르륵 끌고 지나갔다. 그 때 당시 우리나라에선 초고속을 자랑하며 경쟁 광고를 하고 있었지만 해외의 경우 인터넷이 원활하지 않았다. 구글지도도 안 되는 때가 많아 종이 지도를 필수로 들고 다녔다. 무섭고 아찔한 순간도 많았지만 K장녀 정신을 발휘해  평생을 추억 할 꿈같은 여행을 했다.


하루는 스위스 인터라켄에 처음 발을 디딘 날이었다.

평화로운 파스텔톤이 채색된 도시임에도 낯선 문화권에 옅은 긴장을 하며 즐겁게 여행을 했다.

지친 몸에 무거워 진 짐을 이끌고 숙소로 향하는 밤기차에 올랐다. 원래는 마지막 역에서 하차를 해야 하는데 표를 검사하는 승무원 할아버지가 다가와 내게 영어인 지 불어인 지 알 수 없는 사투리를 내뱉으며 딱 봐도 여행자로 보이는 내게 손을 내밀어 뒷 돈을 요구했다. 말하는 뉘앙스가 여행자들에게 하루이틀 이러는 게 아닌 듯 했다. 체력도 바닥이고 그냥 동전을 좀 건내 줄 법도 한데 할아버지의 덫에 순순히 걸려주고 싶지 않았다. 못 알아듣는 척을 하며 실랑이를 하는 사이 하차 방송이 흘러나왔다. 그러다가 착각하고 전 정거장에서 급히 내려버린 것이다. 한 켠에는 야비한 할아버지에게 지기 싫었던 마음에 재빨리 빠져나온 마음도 있었다.


그런데 이를 어쩌나. 기차에서 뛰어 내리면서 오른쪽 발목을 접질러 버린 것이다. 앞으로 많이 남은 여행이 막막했다. 설상가상으로 숙소로 가는 버스 번호와 숙소 주소, 스위스 다음으로 갈 나라의 정보들이 모두 적혀 있는 보물 노트를 놓고 내려 버렸다.

망했다. 나는 눈을 감고 관자놀이 양쪽을 손으로 짚은 채 노트에 쓰여 있던 버스 번호를 떠올리려 애썼다. 초능력은 집어치우고 원래 하차했어야 할 역부터 가자. 거기서 버스를 타야 하니까. 좀처럼 얼굴을 드러내주지 않는 기억 속 뿌연 버스 번호를 염두한 채 헤매다가 원래 하차역으로 도착했다.

방송에서 K장녀에 대해 말한대로 전투력을 가진 자가 원리원칙까지 지킨 대가는 매우 컸다. 다행인건지 돌발상황 대처능력도 함께 탑재하고 있던 나는 결국 거지꼴을 하고는 숙소에 나타났다. 휴우. 아무도 없던 캄캄한 그 숙소가 더 가관이었지만 뒷 이야기는 다음 번에.


또 하루는 런던을 여행한 날 밤이었다.

여행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렸다.유명한 피카딜리 거리에는 관광과 거리를 즐기는 사람들, 간혹 보이는 반가운 한국기업 광고, 빨간 2층 버스 등 늦은 시간까지 사람이 많았다. 그런데 저 멀리서 술에 취한 영국 남자 셋이 내 쪽으로 돌진해 오는 것 아니겠는가. 어려보이는 동양인 여자가 눈에 띄었나 보다.


첫번째 남자는 나를 깜짝 놀래킬 요량으로 어흥!! 하고 지나갔다.

너무 놀랐다. 이게 뭐지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사이에 두번째 남자도 뒤 이어 내게 아흥!! 하고 소리를 치고 지나갔다. 상황 파악을 완료하고 화가 머리 끝까지 났다. 맨 마지막으로 달려오고 있는 세번째 남자도 역시 어흥! 할 준비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 때 나는 그 남자가 착지하기도 전에 더 큰 소리로 "어흥!! 꺼져버려!! 라고 소리쳤다.

내 쪽으로 가까워진 남자는 순간 깜짝 놀라 훽 하고 뛰어 지나갔다.

정류장 근처와 차도 반대편에 있던 시민들까지 수근수근 대며 내 쪽을 쳐다봤다.

일을 저지르고 나니 후달리긴 했다.


저 술취한 놈들이 도로 칼을 들고 와서 위협하면 어쩌지.

별 생각을 하면서 어떻게 반격 할 것인 지 머릿 속으로 시뮬레이션이 빠르게 그려졌다.

타,타,타~~손으로 칼을 막고 낭심을 찬 다음 주변에 '폴리스 플리즈~!!' 요청을 한다.

상상으로 무장을 끝내고 나니 완벽한 상황정리가 왜 이렇게 자연스럽지 싶었다.


이 정도면 한두번 썼던 시나리오가 아니다.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면 남동생과 함께 동네를 돌아다니며 놀다가 의심스러워 보이는 아저씨들을 마주한 적이 종종 있었다. 한번은 이상한 아저씨가 저~쪽에서 놀고 있는 남동생에게 이렇게 말했다.


"꼬마야, 아저씨가 집에 가서 사탕 줄게, 아저씨랑 같이 갈래?"


그런데 그 자식은 헤헤 웃으며 사탕을 달라고 하고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남동생 쪽으로 진격했다.


"안돼요!" 하면서 눈에 쌍심지를 켜고 양 팔을 벌려 남동생 앞에 섰다.

그럼 그렇지. 눈에 레이저가 그때부터 켜 왔떤 쌍심지구나. "집에 가자!!" 동생에게 날카롭게 소리를 치고 손을 훽 잡아 이끌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 아저씨는 동네에 종종 출현했다 사라지고를 반복하며 나의 심기를 건드렸다.

엄마는 내게 남동생을 턱 맡기며 '엄마가 없으면 너가 엄마야.'라고 했기에 엄청 까불고 어디로 튈 지 모르는 남동생과 있을 때는 비장한 돌봄 모드로 조심시키다가 윽박지르다가 회유하거나 했던 것 같다. 사실 그 아저씨한테는 어린 나도 타겟이었을 수 있지만 그 때 쌓은 전투력과 상황 대처 순발력은 성인이 되어서도 여러가지를 도전할 용기를 주었다. 때로는 남동생과 어울렸던 남자들 무리에 나도 투입 된 적이 많았는데 산과 개울과 철조망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며 신체력을 갱신했다. 어린 시절의 바깥 놀이는 신체 조절력을 길러주고 모험심을 길러준다.

현재 두 눈 뜨고 살아있으니 한마디 덧붙여 본다. 영국의 세 남자에게 맞섰던 행동은 위험할 수 있다. 다음에 이런 경우가 생기면 주변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거나 피해야 한다. 인터넷 짤에 있는 '남동생이 있는 K장녀'는 돌아이니 건드리지 말라는 글귀를 보고 웃겼지만 맞는 말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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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윤 소장의 마무리 멘트


인간은 자기자신으로서 태어나 자기자신을 누리고 자기자신으로서 생을 마감할 권리가 있다.

각자의 인생을 위하여 서로를 놓아줄 줄 알아야 건강한 독립이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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