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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디아이 Jun 19. 2024

요즘 애들 눈에 '요즘 애들'

소크라테스는 '요즘 애들은 너무 버릇이 없다'라고 말했다.

기원전 425년,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요즘 애들은 너무 버릇이 없다고 푸념했다.

100년 전 영국 신문에서도 같은 푸념이 있었으니 '요즘 것'들은 시대 불문하고 버릇이 없나 보다.


과거 멀리까지 안 나가도 된다. 얼마 전 놀이터에서도 '요즘 애들'에 대한 푸념이 이어졌다.

첫째 아이가 사다리 계단을 올라가다 위에 걸 터 앉은 남모르는 언니들에게 말했다.


"언니들~ 저 올라갑니다~?!"

"어, 어. 그래...."


9살쯤 돼 보이는 언니들은 잠시 멈칫하더니 지나갈 틈을 내어주고는 이렇게 말했다.

"요즘 애들은 겁도 없어~! 너... 몇 살이니?"


나이 어린 동생의 수줍은 기색 없는 깨발랄한 요청이 떨떠름했던 모양이다.

어린아이 입에서 나온 '요즘 애들'이 웃기기도 귀엽기도 해서 피식하며 지켜보고 있었다. 남이야 어떻든 저 언니들 입장에선 자신이 세상에 중심이고 대세다. 얼마나 살아야 엄마뻘로 나이를 먹을지 까마득할 테지. 나도 저 때 그랬으니까. 연로하기 전이라면, 대부분 자신의 나이 대가 세상을 좀 알 것 같은 본격적인 때다. 어쨌거나 첫째 아이는 2,3년 삶을 더 산 짬바를 가진 언니들에게 사회를 익혔다.


한켠으론 나이에 따른 위계질서가 본능에 의해 움직인다는 점도 인정한다.

이를테면 둘째 아이가 다니는 '공동육아 어린이집'에서는 연령별로 반이 나뉘긴 하지만 통합 자유놀이 시간이 많은데 7세들은 5세들의 행동양식을 힘들어하기도 귀여워하기도 하며 배려하였다. 그러나 바로 한 살 아래 6세에게는 엄격한 경향이 있었다. 동생 또한 형님의 가르침에 따라 열심히 흙을 날라 한상차림을 도왔다. 동생들은 형님 만이 할 수 있는 생활문화를 직관하며 형님이 될 자신을 상상했고, 형님은 아우를 배려하고 도와주는 방법을 배웠다. 경험과 신체능력이 우세한 형님들의 나무를 잘 타는 모습, 나뭇가지를 구해다가 진짜 집처럼 잘 짓는 모습, 수돗가에서 물을 길어 와 진흙의 농도를 맞추어 음식을 만들어 실제 주방도구에 담아내는 멋진 모습, 작년에 맛보았던 꽃, 쑥, 오디, 앵두를 따먹으며 4계절 반복을 오감으로 체험했다. 참고로 선생님은 아이와 서로 간에 평어를 쓰고 '선생님'을 뺀 별칭으로 부르는 등 권위에 가려진 소통을 이끌어 내고자 한다. 

그런데 어른세대의 존비어체계는 어린아이들의 자연스러운 위계와 다르다.

일반적으로 유치원, 학교에서 연령별 교육이 이루어 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나라는 제사를 중심으로 장남, 장녀부터 막내까지 출생 순서에 따른 위계를 확립했던 이유도 막대하다. 이런 수직적 구도는 성인이 되어가며 학교, 회사, 여러 사회 집단으로 흘러들었다. 요즘 Z세대들끼리는 서로 존중을 위한 다양한 언어 체계를 시도하며 성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 안에서도 집단이 추구하는 바와 다른 생각을 드러내면 또 다른 형태로 갈라치기 하는 등 빨강 파랑으로 나누어 간첩을 구분했던 죽기살기 정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이 제품이 요즘 젊은이들이 쓰는 제품이래'라며 자본기업들은 각기 다른 세대를 타깃 하여 소비심리를 들었다 놨다 했다. 양극단 구도는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장년층 젊은 세대의 혈기를 자극하여 지갑을 열게 하고 정치하기 쉬웠지만 피해는 일반 가정의 식탁으로 고스란히 흘러 들어왔다.


남편: '요즘'에는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아버지

시아버님: '요즘' 3040들 이상하다더니.

며느리: 3040도 7080 이상하다고 한대요. 아버님


최소한의 소중한 대화가 주어지는 가정의 식탁 위에 정체와 출처 모를 의견들이 난무하다. 

대세 집단을 끌어와야만 이해를 시킬 수 있는 구조, 또 다른 대세 집단 끌어와서 반격할 수밖에 없는 구조.

손주 교육에 있어 간섭을 하려는 자와 막으려는 자의 웃음기 섞인 티격태격이었지만 남의 생각이나 체면이 아닌 '나의 생각, 나의 감정'으로도 존중받아야 한다. 지금까지는 당연한걸 당연한지 모르고 살아왔다. 너도 나도 남의 생각대로 사니까 그게 맞는 줄 착각하는 것이다. 오해가 될까 참고로 덧붙이자면 시아버님은 평소 권위를 내세우는 편이 아니시고 남편과 주거니 받거니 편안한 농담을 잘 나누신다.



 8살 첫째 아이가 입학한 대안학교에서 부모교육 시간의 일이었다.

나이에 다른 벽을 허무는 실험으로' 평어 쓰기' 모험이 진행되었다. 대표교사(교장 선생님)께서는 사회 곳곳에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평어 쓰기'를 제안하셨다. 나이대가 천차만별인 학부모들과 교사 사이에 '흔한 야자타임'보다는 진지한 혁명적 실험이라는 명목하에 진행되었다. 학교 시스템 상 교사와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기억되고 불리기 쉬운 '별칭'을 쓰고 있었기에 평어 연결이 어떻게든 흘러갔다. 그날은 아이들이 실제 수업 시간에 하는 '몸 놀이'와 '연극' 수업을 받았는데 몸 움직임을 이용한 눈치게임, 강력히 뭉친 팀을 다른 팀이 끌어내는 당근 뽑기 놀이,  의자에 앉은 학부모에게 재치 있는 대사로 일어나게 만들기 미션들 모두 평어로 이루어졌다. 어색한 웃음과 침묵이 이어지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학부모들은 나이 구분 없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꼈다. 대표교사는 학부모를 향해 "니들 이럴 거야?"라며 장난을 치셨는데 용인되는 상황에서 무례함은 전혀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그런 '괴짜스러움'은 일탈과 은근한 선망으로 다가왔다. 교육이 끝난 후 가진 1학년 회식자리에서 별의별 이야기를 다 꺼내며 친해졌던 이유는 '평어' 때문이리라. 비록 수일 뒤 존대어로 되돌아갔지만 입학한 지 몇 개월 안된 학교 안에서 학부모들에게 신선한 경험이 되었다.



교육이 끝난 후 '평어 쓰기'가 궁금하여 찾아보니 철학자 이성민의 저서 <말 놓을 용기>를 발견하였다.


"평어는 우리 언어와 생각과 태도를 일상에서 여행지로 옮겨 주는 듯하다.

주변의 불필요한 정보들은 없애 버리고 진짜 중요하고 간절한 것들만 남게 한다."


평어는 디자인 대안학교 '디학'이라는 곳에서 만들어진 인공적으로 디자인된 말이라고 한다. 없던 언어를 어떻게 고안해 낸 건지, 뉴스에 최초 보도된 어느 종갓집 장손이 시도한 명절 첫 여행, 폭력시위 시대에 내디딘 촛불집회 첫발만큼이나 '용기'있는 일로 느껴졌다. 평어는 한국의 수직적 구도 밖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결핍에서 시작되었다고 했다. 저자는 나이 든 배우들의 모임에 참여한 적이 있었는데 그중 자신이 제일 어린 사람이었다고 했다. 배우들은 형, 동생, 선후배라는 학교 프레임을 가져와 저자를 상하 관계 속 동생쯤으로 여겨졌는데 집단 안에서 자신만의 고유한 삶 자체로 관계 소통을 하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 비속어를 쓰는 반말이 아닌 은유, 비유, 유머로 확장되기 쉬운 '예의 있는 평어'로써 우리나라 언어와 문화 관계를 디자인하였다


나의 경우 사람을 처음 접할 때 나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든 적게 보이든 상관없이 극존칭 언어를 사용했다. 1년도 채 안 되는 사촌 간에 형, 아우 결정하기를 심각하게 따졌던 우리 부모 세대를 생각하면 그게 편했고 '요즘 애들은 버릇이 없다'라는 말을 듣지 않아도 되었다. 나 또한 삼 세대 내 첫째 딸로 보수적으로 자라왔기에 타인이 나를 호칭하는 데 있어 서열 문화 밖으로 자유롭지 못했다.

앞으로 평어를 쓰며 살자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중심에 정신을 들여다보고 내 삶에서 좋은 점 나쁜 점을 환기시키는 것이 모험의 시작이라 볼 수 있겠다. 세종대왕도 한글을 개발하고 아름답게 타이포 그래피 디자인했음에도 다음 왕실에서는 한글 문서가 소각되는 등 무시당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인구가 많았던 산업화 시대에 도덕 시간 그토록 밑줄을 치며 외웠던 장유유서가 그때는 맞았고, 성장 이후 인구 절벽 시대인 지금은 틀렸다. 그때는 상명하복이 맞았다면 지금은 관계 디톡스 속에 '나'를 찾는 개인화 흐름이 맞다. 그렇게 속풀이 하고 나면 어느덧 기분 좋은 정반합을 찾아 협동으로 모인 인간관계 속 개개인의 다양한 카테고리가 존중받는 사회가 올 것이라 생각된다. 누군가가 그랬지. 비로소 철 드는 날이 오거든 죽음이 코 앞인 때라고. 그러니 치우친 엄숙함보다는 유연함, 놀이, 유머로 인생을 환기하며 즐겁게 살아가야겠다. 


p.s  대안학교 7학년 어머니가 해주신 신입 부모 교육 중 와닿았던 문장이다. 


공자가 말씀하셨다.

군자는 어울리기는 하지만 같아지지는 않고,

소인은 같아지기는 하지만 어울리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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