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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디아이 Jun 12. 2024

무기력하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기쁨, 슬픔, 불안아. 어지간히 놀았으니 잘 가고  또 놀러 와

흰 커튼 사이로 무채색 빛이 아침을 끌고 들어왔다.

햇볕은 얽히고설킨 옷가지 하나 걸치지 않은 나를 비추었다.

부시 거리는 이부자리를 정리하며 짙은 중력이 느껴졌다. 나는 매우 무겁다. 고로 존재한다.

이왕 무기력한 거 무기력한 나를 더이상 미워하지 말고 제대로 느껴봐야지 생각했다.


'반갑다 무기력아. 이 시즌이 끝나기 전에 너를 충분히 만끽할게.'


식탁 위 그릇 소리

캉캉

컵에 물 떨어지는 소리

또르르


천천히 움직이며 내 손으로 여러 소리를 틀었다.

생활 소리 위 규칙적인 실내화 끄는 소리가 얹혀져 싫지 않은 리듬이 생겼다.

창문 밖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 놀이터에서 아이들 웃고 떠드는 소리가 멜로디로 입혀졌다.

세상에서 제일 작은 소리들이 들릴 때 비로소 내 마음의 소리도 들리는 구나.


매일의 루틴에 피곤하여 천천히 걸었지만 그것과 별개로 하늘은 맑고 구름이 참 이뻤다.

망막을 통해 펼쳐지는 세상의 모습과 자동차 경적소리마저 슬로모션으로 보이고 들렸다.

세상은 온 힘을 다해 느림의 미학으로 나를 치유하고 있었다.


더 느려보기 위해 텃밭을 시작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카르마가 올라왔다.

주변에 다른 텃밭과 비교하며 열매를 재촉했다. 이내 곧 땅강아지를 만났는데 신기한 외계충같고 하는 행동이 귀엽기도 했다. 옆에 있던 송충이는 엉덩이를 하늘 높이 치켜들고 앞으로 가기 꿈틀 댄스를 선보였다. 나는 오래지 않아 시선을 돌렸지만 나의 아이들은 울타리 끝으로 도달할 때까지 기다리고 응원하는 매너 관람객이었다.


땀에 젖은 목덜미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순환되고 있는 죽은 나뭇가지들.

왜 안 보이나 했다. 여름,가을에는 빌런 모기와의 싸움, 유동 곤충이 지나다니는 곳곳에 먹이를 구한다는 현수막 광고를 쳐 놓은 거미줄.


눈앞에서 개구리의 재빠른 혀 길이도 확인하여 흠칫 놀랐다. 인간도 지구너머에선 먼지같은 존재인데 땅 위에 미물도 한순가에 사라졌구나.

 한쪽에선 땅속으로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일어났지만 흙 입장에선 덕분에 숨구멍이 생겨 식물들은 쑥쑥 자라났다. 함께 자란 잡초마저 땅속의 영양분을 끌어올려주는 역할을 한다고 하니 나쁘다고 다 뽑아버려 완벽한 땅을 만들 수도 없었다. 그나저나 이곳을 밀고 새 작물을 심어야 하는데 땅속 친구들은 어쩌나 싶었다. 텃밭 일도 여간 문명 내기가 아니구나.

멀리서 보기에 평온한 텃밭이지만 이곳도 나름대로 시끌벅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들의 유기적 순환처럼 나의 기쁨도 슬픔도 불안도 그랬다


'어서 와, 기쁨아 불안아. 오늘은 놀다가 좀 일찍 가렴. 다음에 또 놀러 와~'


감정을 한 발치 떨어트려 '나'를 바라본다. 이 친구들이 잘 놀다가 너무 오래 놀았다 싶으면 또 간다는 걸 알았다. 이제는 감정의 종이 아닌 주인 되어 어지간히 놀았으니 이제 집에 가라고 내가 직접 보내줘야 했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지만 저 단풍 나무는 내년 이맘 때 같은 자리에서 같은 빛을 발하겠지.

아낌없이 쉼을 주는 나무 그늘 아래 맘껏 기뻐하고 슬퍼하고 괴로워 해야갰다. 그래도 너무 괴로워는 말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입꼬리를 올려보기를. 그러면 한결 기분이 나아질테니.



*내가 나에게 하는 응원의 말


"서늘한 저녁, 이 시간에도 텃밭은 바쁘게 돌아가고 있겠지. 불혹의 때까지 달려오느라 수고 많았고 잘 살아왔다. 그렇지 않다고 여겨지면 뒤를 돌아 발자취를 확인해 보길 바라. 여러 갈래 길이 보인다면 무수한 두려움에 맞서 도장 깨며 오느라 수고했고 한갈래 길이라면 외로움에 맞서 묵묵히 걸어오느라 수고했다. 부디 혼자였다고 착각하지 말기를. 발길 닿는 길 비춘 달빛은 열심으로 너를 따라다니며 조용히 응원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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