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정의란 무엇인가?”로 한국에 정의 열풍을 일으킨 마이클 샌델이 유전자 공학에 대해 서술한 책이다. 샌델은 시장만능주의가 공동선과 도덕을 침식한다고 지속적으로 경고해 왔다. 그리고 그는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시장만능주의와 결합한 능력만능주의에도 우려를 보였는데, “완벽에 대한 반론”은 그 두 가지 입장을 모두 함축하고 있다. “완벽에 대한 반론”은 짧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생명공학에 대해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매우 자세하게 쓰였다. 의논되고 있는 논제는 무엇인지, 그리고 그에 대한 반론은 무엇인지, 또 마이클 샌델이 생각하는 정의에 대한 기준이 무엇인지가 책에 매우 수려하게 녹아 있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비교 가능한 예시를 통해 자신의 철학적 함의를 독자가 이해하기 쉽게 하고 있다. 도덕과 정의라는 개념은 시장의 언어 속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이러한 복잡한 개념은 개인의 선택과 자본이라는 더 쉽게 힘 있는 개념에 파묻혀 겨우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철학적 위기 속에 마이클 샌델의 “완벽에 대한 반론”은 철학이라는 나무가 다시 생명을 얻을 수 있게 하는 거름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가 값싼 경제논리에 표류되지 않도록, 함께 마이클 샌델의 이야기를 읽어보는 시간을 가져보자.
2. 강화의 윤리학
워싱턴 포스트의 인터뷰에 따르면, 2002년 미국 메릴랜드주에 거주하는 청각장애인 레즈비언 커플인 샤론 뒤셰노와 캔디스 맥컬로는 의도적으로 청각장애를 가진 자녀를 갖기로 결정했다. 이를 위해 그녀들은 청각장애 친구에게 정자를 요청했고, 청각장애 아이를 낳는 데 성공했다. 어떠한 생각이 드는가? 우리는 무엇에 불편함을 느끼는가? 부모가 아이들의 특성을 결정하는 행동이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가? 아니면 부모가 청각장애를 유발하게 하는 게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가? 아마도 후자라고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건강한 정자 기증자를 찾는 부모들의 행동에는 사회가 질책을 거의 하지 않기 때문이다.
청각 장애인 레즈비언 커플은 “청각 장애는 장애가 아니라 세상을 이해하는 문화”라며 자신의 의견을 옹호한다. 물론 맞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부모는 아이들에게 최고의 삶을 살게 할 의무를 가진다. 그리고 아이들이 최고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경제적 성공뿐만 아니라, 부모와의 강력한 유대를 통해 사랑을 확인하는 삶도 중요하다. 물론 청각 장애인들은 비청각 장애인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레즈비언 커플의 주장도 어떤 면에서는 정당하다. 하지만, 문제는 ‘장애냐 아니냐’가 아니라 부모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녀들의 육체적 특징을 바꿀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러한 논거에 따르면, 건강한 정자를 찾는 부모들의 행동 또한 정당하지 않다. 그들은 건강한 정자를 통해 부모가 생각하는 특정 특징을 자녀에게 물려주길 바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행동이 윤리적으로 문제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사람들은 위와 같은 부모의 행동이 자녀들의 자율권을 빼앗아 간다고 주장한다. 부모는 자녀들을 소유하지 않았다. 내가 소유하지 않은, 자아를 가진 개인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비도덕적이다. 특히 부모는 자녀의 미래를 ‘결정’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녀들이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선택하도록 돕는 존재이기 때문에 더욱 비도덕적이다.
둘째, 건강한 정자를 통해 자녀들에게 더 나은 삶을 주려는 부모의 선택은 자녀들을 양육하는 과정에서도 일어난다.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최고의 교육을 주고, 건강한 삶을 살기 위해 최고의 식단을 제공한다. 이러한 행동은 비난받기는커녕 국가와 사회에 의해 오히려 조장된다. 양육의 노력은 ‘관계의 돌봄’이지 ‘본질의 설계’가 아니다—범주 오류를 피해야 한다.
샌델은 이 두 논거 모두 도덕적 정당성을 입증하기엔 불충분하다고 본다.
첫째, 자녀들이 자신의 신체적 특징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는 사실상 어디에도 없다. 인간은 자연이 정해준 확률에 따라 신체적 특징을 가질 뿐이다. 물론 부모의 특징이 DNA로 유전될 가능성은 크다. 따라서, ‘자율성의 부재’만으로 부모들의 행동이 비도덕적임을 입증하기엔 충분치 못하다. 오히려 “왜 확률적 선택이 확정된 선택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한가”에 대해 증명해야 한다.
둘째, 양육에서 부모들의 끊임없는 노력이 도덕적으로 정당하다는 것 자체에 의문을 제기한다. 지금 사회가 그런 행동을 조장하는 분위기이긴 하지만, 이 행동 자체가 본질적으로 정당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부모들의 욕심이 사회적·도덕적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한국과 미국에서 입시 비리가 심심찮게 일어나는 것, 그리고 사교육비가 비정상적으로 늘어나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부모들은 자신의 노후를 생각하지 않고 학업적으로 완벽한 아이들을 위해 매년 비정상적으로 높은 금액을 사교육에 쏟아붓는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전체 사립학교의 절반 이상이 가을 학기 등록 학생 수가 전년 대비 증가했다고 보고했으며, 그중 8%의 학교는 등록자 수가 3% 이상 증가했다. 이러한 증가 추세는 기숙형 사립학교(보딩스쿨)의 평균 학비가 5.3% 상승해 73,080달러(약 9,800만 원)에 달하고, 통학형 사립학교의 학비는 7.4% 인상되어 49,284달러(약 6,600만 원)가 된 상황에서도 나타났다. 한국의 상황도 다르지 않다. 매일경제에 따르면, 지난해 초·중·고 사교육비 총액은 사상 최고치인 29.2조 원에 달했다. 신입생 수는 5.21백만 명에서 5.13백만 명으로 8만 명(1.5%) 감소했음에도 사교육비는 2023년에 비해 오히려 7.7% 증가했다. 또한 이로 인해 10대들의 학업 스트레스로 인한 자살률이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지고 있다. 따라서, 양육적 측면에서 허용되기 때문에 출산적 측면에서도 허용되어야 한다는 논거는 논리적으로 충분치 않다.
그렇다면, 부모가 자녀들의 특징을 결정하는 것은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을까? 이를 설명하기 위해 마이클 샌델은 운동선수의 능력 강화로 주제를 옮겨간다.
3. 운동선수의 능력강화
운동선수들은 경이로울 정도로 뛰어난 신체적 능력을 통해 우리에게 즐거움을 선사한다. 그런데 더 나은 운동 퍼포먼스를 위해 일부 선수들은 불법 약물을 사용한다. 사이클의 황제였던 암스트롱, 메이저리그의 홈런타자 배리 본즈 둘 다 약물 남용이 발각되어 스포츠 팬들을 슬픔에 몰아넣었다. 1990년~2000년까지 미국 프로야구(MLB)는 ‘스테로이드 시대’라고 불릴 만큼 약물 사용이 만연했고, 2023년 미국 프로축구(NFL)에서는 수십 명의 선수가 약물 사용으로 징계를 받았다.
몇몇 사람들은 운동선수들이 능력 강화 약물을 사용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들은 성인이 자신의 최고의 퍼포먼스를 위해 위험을 감수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경기 관람자는 최고의 경기를 볼 권리가 있으므로, 더욱 강한 신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대한민국의 농구리그는 타고난 신체적 약점으로 인해 파워풀한 농구를 하는 미국 농구리그(NBA)에 비해 인기가 없다. 그렇다면 운동선수들의 약물 남용이 문제가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의견은 무엇인가?
첫째, 운동선수의 약물 남용은 스포츠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노력’이라는 가치를 파괴한다. 약물을 사용한 운동선수는 그 자체로 엄청난 신체 능력의 상승을 경험한다. 매우 작고 마른 체형이었던 배리 본즈는 약물 사용으로 홈런타자로 변신했고, 그는 메이저리그를 지배했다.
둘째, 약물 남용은 운동선수의 건강을 해친다. 약물의 오남용이 운동선수의 건강을 위협하는 사례는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특히 유명한 WWE 선수였던 에디 게레로와 크리스 벤와는 약물 오남용으로 사망했다. 토미 모리슨, 래리 존슨 등 사례를 들자면 끝이 없다. 운동선수들의 퍼포먼스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사회는 동시에 그들의 건강을 책임질 의무 또한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들의 건강을 해치는 약물 사용은 금지되어야 한다.
마이클 샌델은 ‘강화의 윤리학’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논거들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첫째, 스포츠는 노력이 아니라 결과에 열광한다. 마이클 조던이 최고의 농구선수인 이유는 그의 ‘노력’ 때문이 아니라, 그가 내놓은 ‘성과’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마이클 조던이 엄청난 노력을 한 건 사실이지만, 그보다 더 노력한 선수가 없으리라는 법도 없다. 실제로 코비 브라이언트가 마이클 조던보다 더 큰 연습량을 보였다는 말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마이클 조던보다 더 위대한 선수인 것은 아니다. 스포츠가 드라마를 좋아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높은 연봉과 존경은 항상 ‘최고의 결과’에 주어진다. 따라서 약물 남용이 단순히 노력을 폄훼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너머에 또 다른 문제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둘째, 약물 남용이 건강을 해치기는 하지만, 운동선수를 혹사하는 트레이닝 방법 또한 마찬가지다. 운동선수들은 훈련 혹은 실제 경기 도중에 돌이킬 수 없는 부상을 입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불의의 사고는 스포츠의 의미를 더 부각할 뿐, 폄훼하진 않는다. 약물도 마찬가지 아니냐는 반론이 가능하다. 스포츠 퍼포먼스 향상을 위해 약물을 복용하는 선수나, 위험을 무릅쓰고 혹독한 트레이닝을 받는 선수나 모두 건강상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만으로 금지할 이유를 충분히 설명했다고 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왜 운동선수의 능력을 약물 혹은 유전적으로 강화하는 것은 문제가 될까? 마이클 샌델은 ‘운동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해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운동의 본질을 더욱 돋보이게 만드는 행위는 허용되어야 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운동과 관련된 규칙들도 운동의 본질을 돋보이게 만들기 위해 제정된다.
마라톤 선수가 운동화를 신는 것은 정당한가? 물론 정당하다. 왜냐하면 운동선수의 발을 불의의 사고로부터 보호하는 것은 그 선수의 ‘달리기 능력’을 온전히 보여주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골프 선수가 휠체어를 타고 필드를 다니면서 플레이하는 것은 정당한가? 이 경우는 모호하다. 어떤 이는 “필드를 걷는 것 자체가 골프선수로서의 능력”이라고 주장하고, 또 다른 이는 “공을 치는 행위만이 핵심”이라고 말한다. 후자가 맞다면 휠체어는 허용되어야 한다.
약물 혹은 유전자 조작을 통해 운동 능력을 강화하는 행동은, 주어진 환경에 대항해 스스로 승리를 이끌어낸다는 스포츠의 본질에 어긋난다. 또한 스포츠에서 보이는 믿을 수 없는 퍼포먼스는 승리를 결정짓는 그 ‘순간’에 집중되어 있기에 더 큰 의미가 있다. 모든 선수가 덩크를 할 수 있는 ‘트램펄린 농구’가 크게 인기를 끌지 못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이처럼, 어떤 행동이 도덕적으로 정당한지 그렇지 않은지는 그 행동이 이루어지는 ‘관계의 본질’에 달려 있다.
4. 디자이너 베이비
다시 부모와 자녀의 관계로 돌아오자. 디자이너 베이비는 정당한가? 처음 강화의 윤리학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자녀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한 노력이라는 면에서는 정당해 보인다. 자녀에게 더 좋은 미래를 제공하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라는 점에 반대할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하지만 마이클 샌델은 “그렇지 않다”라고 단언한다. “그렇지 않다”라고 대답하는 이유는 빈부격차나 자율성 때문만이 아니다. 디자이너 베이비는 그가 생각하는 부모와 자녀의 본질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위에 언급한 것처럼, 부모는 자녀를 ‘선택’ 하지 않는다. 자녀는 부모가 원한다고 해서 바로 주어지지 않는다. 물론 임신 주기에 맞춰 건강한 성생활을 하는 등 확률을 높일 수는 있지만, 무조건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러 가지 노력과 함께 자녀는 부모에게 선물로 주어진다.
이러한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부모가 자녀를 조건 없이 사랑해야 함을 의미한다. 내가 원하는 때, 내가 원하는 특징을 가지고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주어지기 때문이다. 디자이너 베이비는 부모가 바라는 ‘완벽한 자녀’를 태어나게끔 설계한다. 하지만 ‘완벽한 자녀’라는 것 자체가 성립하기 어렵다. 설령 부모가 원하는 자녀를 만들어냈다 해도, 자녀가 부모 뜻대로 살아줄지는 만무하다. 최고의 변호사 자녀를 만들기 위해 유전자 변형을 했는데, 자녀의 꿈이 가수라면 어쩔 것인가? 이를 차치하고라도, 자녀를 디자인하는 부모의 행위에는 자녀에 대한 ‘조건부 사랑’이라는 위험한 관념이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디자이너 베이비는 부모와 자녀 간의 본질에 어긋난다.
그렇다면 디자이너 베이비에 대한 도덕적 토론은 왜 중요한가? 이는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인 자녀와 부모의 근본적인 관계를 성찰하게 하기 때문이다. 부모가 자식에게 완벽을 요구하는 순간, 자녀들은 부모를 위한 도구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그리고 자녀가 부모의 만족을 위한 도구가 된다면, 결국 부모 역시 자녀에 의해 수단화될 위험이 있다. 이는 사회의 근간을 흔들 수 있는 매우 위험한 관계다.
5. 새로운 우생학
우생학은 미국에서, 그리고 독일 나치 정권에서 유행했던 학문이다.
“세상에서 버려진 몇몇의 인류를 도태시키고 우등한 인종을 생산하기 위한 학문, 그것이 우생학이다.” 하지만 나치 정권이 강제 불임수술을 넘어 유대인 학살을 자행함으로써 우생학은 세계에서 자리를 잃었다. 그런데 최근 자유시장에 기반한 우생학이 다시 득세하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 국가에서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자기 선택에 따라 특정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넘겨주는 것이 자유와 행복을 증진한다는 논리다.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삶’이 있고, 이를 성취하기 위해 특정 유전자가 필요하다고 믿기도 한다. 이는 자유를 옹호하는 시장파(派)에서 흔히 제시하는 주장이다. 시장경제에 적응한 우리는 이 주장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기 쉽다. 자유는 오랜 시간 억압 체제를 극복하는 이상으로 기능해 왔다.
하지만 마이클 샌델은, 우생학은 인류를 자유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속박한다고 주장한다. 우생학이란 결국 “지금의 세상을 지배하는 체제에 유리한 인류를 생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똑똑한 인간이 지배하는 세상에선 ‘똑똑한 유전자’만 남길 것이고, 키가 큰 사람들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키 큰 유전자’만 남길 것이다. 자유는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지만, ‘자유의 주체가 누구인가’를 다시금 생각해야 한다.
주인과 노예의 관계를 떠올려보자. 주인은 노예를 소유하고, 노예보다 더 큰 힘을 가지고 주체적인 활동을 한다. 노예는 살아남기 위해 주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변화한다. 힘센 노예를 원하면 힘이 강해져야 하고, 요리를 잘하는 노예를 원하면 요리를 잘해야 한다. 노예 본질이 어떠하든 중요하지 않다. 노예가 본질을 버리지 못하면 주인이 노예를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주인은 ‘자신의 목적’을 충족해 줄 노예를 찾을 것이다. 이처럼, 자유의 ‘주체’는 본질을 지키고, 자유의 ‘도구’는 본질을 변화시킨다. 따라서 우리 인간이 자유의 주체라면, 사회체제에 맞춰 우리의 본질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질을 잘 수용할 수 있는 사회체제를 만들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진정한 자유는 ‘개인이 선택하지 않은 것’을 기반으로 할 때만 비로소 얻어질 수 있다. 인간이 단순히 본능을 따르는 것이 자유인가? 물론 아니다. 그것은 본능에 끌리는 행위일 뿐이다. 진정한 자유는 우리가 원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본능에 반하는 선택을 할 때 드러난다. 신석기시대의 야만인보다, 본능을 자율적으로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자유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우생학도 마찬가지다. 내 의지와 무관한 유전적 결함까지도 내가 ‘노력’을 통해 극복하거나, 그 과정에서 무언가를 얻어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자유와 존엄이 생긴다. 따라서 시장 기반의 우생학 또한 비도덕적이라는 것이 샌델의 관점이다.
시장만능주의는 개인의 선호도를 중시한다. 개인이 자기 선호도를 따를 때 행복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선호도는 주관적이기에 획일화될 수 없고, 획일화를 막으려면 개인의 자유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선호도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과연 우리는 전적으로 자유롭게 선호를 만드는가?
아미아 스리니바산(Amia Srinivasan)은 저서 “섹스할 권리”에서 선호도의 허구성을 이야기한다. 내가 생각하는 ‘선호하는 성’이나 ‘외모’는 과연 ‘내’가 만든 것인가, 아니면 ‘사회’가 주입한 것인가? 우리는 어릴 적부터 미디어에 노출되어 특정 선호가 부각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인간은 ‘세인(Das Man)’과 함께 만들어진 세계에 태어나며, 그 세계는 특정 목적이 정해진 도구들과 그 목적을 잇는 맥락을 이미 갖추고 있다. 그리고 인간은 그 안에서 ‘지식의 지평’을 통해 미래를 해석하는데, 이 지평은 개인의 경험에 따라 형성된다. 따라서 우리의 선호도 역시 이런 환경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선호도를 위해 개인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시장적 자유론의 논거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를 억압하는 ‘사회적 선호’의 기원을 파헤치고, 그 기원이 진정 자유로운지를 논의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를 옹호하는 길일지도 모른다.
자유로운 선택에 의한 우생학은 인간의 존엄성을 위협한다. 내가 다른 사람과 다른 자아를 가진 이유는 나이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가지지 못한 유일한 ‘나’라는 자아가 내가 소중한 이유다. 하지만 선호도로 인해 결정되는 우생학은 인간의 다양성을 파괴하고 획일적인 인류를 만들 것이며, 이는 나의 자아를 파괴할 수도 있다.
6. 결론
민주주의는 모든 사람의 염원이었다. 먼 옛날, 아니 대한민국 기준으로 보자면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얻기 위해 피 흘리고 싸웠다. 모두의 자유가 보장되고 권리가 보장되는 세상은 듣기만 해도 이상적인 사회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말했듯, 인간은 경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물론 수정자본주의, 사회보장제도를 보유한 자본주의 등 여러 가지 형태의 자본주의가 존재하기는 한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평등한 사회를 추구하고(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며 같은 정도의 투표권을 갖는다), 자본주의는 승자와 패자의 구분을 통해 혁신을 추구한다. 따라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양립하기 힘들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자본주의가 주는 효용을 도저히 무시할 수 없었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자본주의를 받아들였다. 그렇다고 해서 민주주의가 평등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민주주의는 정치를 통해 자본주의를 통제하고, 시민들의 삶을 더욱 윤택하게 만들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오랜 진화 속에서, 이제는 자본주의가 민주주의를 통제하는 듯한 모양새다. 효용이 정의나 평등보다 앞서는 가치를 지닌 세상이 도래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효용을 추구할 자유를 외친다. 우생학과 디자이너 베이비 역시 그 흐름의 일면이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가 ‘브레이크’를 세게 밟아야 할 때다. 다시 한번 뒤돌아보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관계를 사유해야 한다. 우리가 자본주의를 채택한 이유가 무엇인지 상기해야 하며, 인류를 위한 가치와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왜 오히려 자본주의를 풍요롭게 할 수 있는지도 물어야 한다.
발전은 매우 매력적인 단어다. 하지만 다양성이 발전의 뿌리가 아니라면, 그러한 발전은 진정한 의미에서 진보가 아니라 선택적 배제일 수 있다. 다양성을 통해 서로의 존재를 존중하는 발전만이 더욱 평등하고 소중한 세상을 만드는 기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