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나를 죽이고 있는 게 아닌 그냥 시간이 흘러가고 있을 뿐>
살아가는 일이 쉬울 리가 없다.
힘들다고 느낄 때 사람들은 자신만 힘들고 혼자만 상처받은 거 같아 참 외롭고 또 괴롭다.
시련 속에 있을 때 자기 객관화를 해보려고 하는데도 정면으로 돌격하는 고통을 피할 길이 없다.
나만 그럴 리 없다는 걸 아는데도 혼자만 아파한다고 느낀다.
대부분의 괴로움은 사람 때문에 생기는 일이었다. 일에 짓눌리고 사람에게 지친 마음은 회복이 절실했다.
회복을 외면하는 현대인에게는 번아웃이나 우울증이 발생한다.
이럴 때 일과 사람으로부터 물리적으로 멀어지는 선택을 해야 한다.
다들 진짜 휴식을 원한다면서 제대로 쉬지 못한다. 휴식의 방법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어릴 때는 휴가가 생기면 여행을 가느라 몸을 혹사했고, 나이가 들어서는 쉴 시간만 생기면 집순이 모드로 세상으로부터 도망치는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사실 집에 있는 게 충전이 되긴 하지만 진짜로 일상에서 벗어난 휴식과는 달랐다. 눈에 보이는 일들 속에 생활을 유지하느라 집에서는 늘 분주할 수밖에 없다.
벗어나기가 필요해서 떠난 여행은 또 너무 피곤하다. 새로운 경험을 하느라 바쁘고 이동하고 결정할 일들이 노동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휴식을 느낄 새가 없다.
일상을 벗어나서 아무것도 안 하는 곳은 있을까?
생활 속에서는 쉬고 싶어도 내려놓지 못한다. 효율적이고 부지런한 한국인 특성상 쉼과 여유를 즐긴다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강제로 집과 세상 사람으로부터 셀프 고립을 시켜야 한다. 그렇게 나는 잠시 일과 사람으로부터 떨어지는 선택을 했다.
나는 절에 들어왔다.
방에서는 와이파이가 안 되고, 주변에는 산과 물 외에 편의 시설이 없으며, 사람도 거의 없다.
노트북이 무용지물이고 핸드폰을 볼 필요도 없고 사람들을 신경 쓰느라 에너지를 쏟을 일이 없다.
'휴식형 템플스테이'라 반드시 해야 할 일도 없다.
오로지 내 마음이 내키는 대로 몸으로 때우는 시간을 보내면 그만이다.
이 아무것도 안함의 경험은 사람이 회복하는데 꼭 필요한 시간이다.
우리를 병들게 하는 많은 요인은 무엇이든 너무 많이 해야 하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폭포 앞에 앉아 몇 시간 동안 멍하니 쏟아지는 물을 바라봤다.
생동감 있는 물과 그 주변에 초록으로 싱그럽게 둘러싼 숲은 봐도 봐도 흥미로웠다. 하루에도 수차례 폭포를 찾아가 바위에 앉아 멍하니 물을 구경했다.
이렇게 재밌는 자연이 주변에 없기에 우리는 넷플릭스에 집착하며 사는 거 아닐까 생각한다.
며칠 동안 물가에 앉아있다 보니 내 시선은 폭포 주변을 둘러싼 숲의 나무 하나하나에 집중하게 되었다.
그때 눈앞으로 드리워진 나뭇가지 하나가 눈에 들어와 유심히 바라보게 되었다.
멀리서 봤을 때는 몰랐던 나뭇가지와 잎사귀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생생하고 푸르른 숲의 모습과 달리 눈앞에서 본 나뭇가지는 찍히고 부러져있고, 잎사귀들은 부분 부분 누렇게 시들고 말라 있었다.
가까이에서 보면 상처 없는 나무는 없다.
멀리 무리 지어 몰려 있을 때는 모두 아름다운 생명력이 느껴졌다.
그러나 바로 앞에서 보면 나무들은 태풍에 꺾여서 위태롭게 몸통을 유지하고 있었다.
폭포 앞 개울에 멋지게 터널 형상을 만들고 있는 한 나무는 울창하게 우거진 형태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지난 태풍으로 몸통의 반이 부러져 옆으로 꺾인 채 누워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처에도 나무는 죽지 않고 나름대로 살아내고 있었다. 꺾여서 옆으로 넘어간 나무 둥지에는 새로운 가지들이 돋아나 하늘을 향해 솟아나고 있었다.
말라비틀어진 잎사귀들을 메달고도 죽지 않고 최선을 다해 살고 있다.
나무들은 계절을 지나가며 얻게 된 상처를 마침표가 아니라 시간의 흔적으로 여긴다.
상처받아 죽는 생명은 없다.
그러나 사람은 상처를 반복적으로 받게 되면 마침표를 떠올리게 된다. 인간만이 유일하게 자기의 생명을 중단할 수 있는 종이다. 자살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우리는 오히려 번뇌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가며 받는 상처는 그저 삶의 과정일 뿐이다. 생을 그만두라고 협박하는 게 아닌 세상도 어쩔 수 없이, 아니 별수 없이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던 거다.
상처는 그저 흐르는 계절의 흔적일 뿐이다.
우리는 살아가며 세상과 사람으로부터 의도치 않은 상처를 입는다.
생명을 죽이려고 상처 주는 사람은 없을 거다. 그 사람도 그저 살아가는 과정에 무심코 나에게 상처를 냈을 뿐이다. 스치듯 서로 부딪혔던 거다.
올여름 바람과 폭풍이 휘몰아치는 태풍으로 묘적사 뒤쪽 산속에 오랜 시간 살아온 나무 두 그루가 꺾여 버렸다. 죽어있나 싶어서 가까이에서 살펴봤더니 놀랍게도 새로운 가지를 뻗어 내고 있었다.
여름 태풍은 그냥 계절이 지나가는 것이다. 나무를 죽이려고 했던 의도는 없었다. 그냥 계절과 함께 시간이 흐르면서 어쩔 수 없이 오래 살아온 나무를 꺾어버린 거다.
몇백 년을 우뚝 솟아 숲을 지켜왔지만 허무하고 억울하게 한 계절의 스치는 바람 때문에 나무는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이게 무조건 나쁘다고 볼 수 있을까.
누구 탓을 해야 할 것인가?
꺾여버린 나무 둥지를 보며 그 오랜 세월이 허무하게 끝나버린 거 같아 내가 더 안타까웠다. 그러나 나무는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는다. 마침표는커녕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해 생명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 역시도 상처를 입고도 어떻게 살아낼까 궁리를 하면서 살 일만이 남았다.
삶의 시간이 흐른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많은 상처를 겪어야 한다. 세상에 포함된 생명은 시간 속에 상처 없이 살아갈 수는 없다.
우리들 모두 상처를 입은 채 살아가고 있고 가까이에서 보면 누구나 상처받아 아파하고 있다.
우리가 받은 상처는 마침표가 아니다.
쉼표라고 생각하고 이렇게 폭포 앞에서 쉬어가면 된다.
넘어져서도 생명을 포기하지 않는 나무를 보면 된다. 게다가 넘어져 누워있는 모습조차 매력으로 다가와 숲의 모습을 독특하게 만들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