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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사 놓는 건 너무 어려워

주사 전쟁에서 패전을 거듭했다.

by 하임

전쟁이다.

넣으려는 자, 거부하는 자, 중재자


전쟁은 동물종합병원에서 당뇨성 백내장 진단을 받고 집으로 돌아온 날부터 시작되었다.

사실 별다른 문제는 없을 줄 알았다.

병원에서 수의사에게 배운 그대로.

동영상으로 촬영한 주사 놓는 법 그대로만 하면 아무런 문제없을 거라고.

주사를 굉장히 싫어하는 나 스스로를 믿지 못할 뿐. 오직 그것만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와서 막상 인슐린 주사를 줄 시간이 되자 예상치 못했던 복병이 나타났다.


분명히 병원에서 실명이라고 했고 눈앞이 안 보여서 여기저기 부딪히는 건 확실한데, 주사기나 안약이 근처에만 오면 댕댕이는 사납게 돌변했다.

마치 눈이 보이는 것처럼.

으르렁 거리며 정확하게 내 손을 공격했다.

뭐야? 앞이 보이는 건가? 아니면 돌고래처럼 초음파를 쏴서 위치를 파악하는 건가. 시력을 잃은 무림고수처럼 기의 흐름을 읽는 건가. 어떻게 정확하게 내 손을 공격할 수가 있지?

중재자인 어머니가 햇살이를 손으로 잡고, 안아 주기도 하면서 달래 봤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주사를 놓을 때마다 전쟁이고, 안약은 아예 넣을 수가 없었다.


분명 동물병원에서 주사 맞을 때는 얌전했는데. 수의사도 이렇게 얌전한 강아지는 흔치 않다고 칭찬할 정도였는데. 왜 집에선 이렇게 난동을 부리는 걸까.

강아지는 앞이 안 보이면 소리에 민감하다고 하던데 혹시 주사나 안약을 넣기 전에 긴장하는 내 심장소리를 듣고 불안해서 거부하는 걸까? 별의별 상상을 다하며 대응 방법을 바꿔봤다.

일부러 주사 줄 시간 5분 전부터 나는 명상음악을 듣거나 평소에 좋아하는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서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크게 심호흡을 하고 햇살이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반응은 여전히 같았다. 시도할수록 손에 상처만 늘어났다.


혹시 내 솜씨가 못 미더워서 그런 걸까.

종이와 필기구를 준비한 후, 유튜브에 '당뇨견 주사' '당뇨견 인슐린 주사' '당뇨견 주사 안 아프게' '백내장견 안약 넣기'를 검색했다.

새로운 영상을 찾고 같은 영상을 반복해서 시청하며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부분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영상에선 안약을 쉽게 넣는 방법은 손안에 안약을 감추고, 반려견의 시선이 닿지 않는 머리 뒤에서부터 쓰다듬는 척하면서 눈 안에 살짝 한 방울 떨어뜨리라고 했다. 영상 속 강아지는 정말 아무렇지 않게 순순히 안약을 받아들였다.

인슐린 주사는 댕댕이의 등이나 옆구리를 쓰다듬다가 살이 많은 부분을 발견하면 두 손가락으로 살짝 집어 올린다.-피부 껍질을 들어 올린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듯하다.- 그렇게 손가락으로 살을 집어 올리면 그 아래에 작은 텐트를 친 것처럼 삼각형 모양이 만들어지는데, 그 삼각형의 중앙 근처를 주삿바늘로 찔러 넣은 후 약을 주입하라고 했다.-마치 야영장에서 삼각 텐트를 치고 그 속으로 주삿바늘이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 같았다.- 인슐린은 냉장보관해야 하지만 주사액이 차가우면 통증을 유발할 수 있으니, 주사기에 담긴 주사액이 미지근해질 수 있도록 손가락으로 굴리며 데우거나, 상온에 잠시 뒀다가 차갑지 않을 때 주사하면 통증이 덜하다고 설명했다. 주삿바늘을 찌를 때는 45도 각도로 정확히. 주사액은 천천히 주입하는 게 좋다.

모든 영상들은 1배속 혹은 0.8배속으로 천천히 몇 번을 반복해서 시청하며 내 팔의 살집을 잡아당기며 몇 번을 시뮬레이션했다.


하지만 막상 주사를 놔야 할 때면 매번 긴장감이 몰려와 머릿속이 하얘졌다.

사실 나는 주사를 매우 싫어한다. 아니 무서워한다. 언젠가 MBC 무한도전에서 노홍철이 최면에 걸렸을 때 엄마가 돈가스 사준다고 따라갔더니 주사 맞아서 너무 서러웠다고 울면서 고백한 적이 있는데, 나의 어린 시절도 노홍철과 다르지 않았다. 세월이 지나 성인이 된 지금도 나는 항상 주사 맞을 땐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는다. 그만큼 주사는 피하고 싶다. 그런 내가 주사를 놔야 하다니.

하지만 나 말고는 놓을 사람이 없다. 기술을 익혀야 하고 마음을 진정시켜야 한다. 매번 몸부림치는 댕댕이를 진정시켜야 한다.


며칠을 노력했지만, 노력과 결과는 전혀 비례하지 않았다.

결국 얼마간은 동네 병원에 가서 주사와 안약을 부탁해야만 했다. 하지만 병원에 가는 건 한계가 있다.

하루에 한 번만 주사와 안약을 투여해야 하는 거면 가능할지 몰라도, 4~5번씩 각각 다른 종류의 안약을 넣어야 하고, 아침 주사를 놔야 하는 시간엔 동물병원이 영업하지 않는다. 그러니 실제로 투약하는 건 수의사가 정해준 정량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종합병원에 갈 때마다 수의사는 이러다가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 될 수밖에 없다고 겁을 줬다. 처음엔 우려했고, 다음번엔 안쓰러워했고, 그다음엔 닦달했다.

수의사의 마음은 알겠지만 내 마음은 오죽하겠는가.

이제는 병원 가는 거 자체가 스트레스다. 왜 녀석은 자꾸 거부하고, 상황은 악화되고, 나는 계속 혼나야만 하는가.




그렇게 패전만 거듭하던 중에 몇 번의 응급 상황이 있었다. 그때마다 기존의 병원과 타이밍이 맞지 않아 다른 병원들을 전전하게 되었고, 세 번째 방문한 안과 전문 병원에서 우연히 방법을 찾았다.

마지막 병원의 선생님은 굉장히 연륜이 있으신 분이었는데, 안약과 주사 놓는 게 너무 힘들다고 하소연했더니 그럼 높은 장소에 올려서 해보는 건 어떻겠냐고 흘러가는 말로 제안하셨다.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집안에 높은 곳이 어디 있는지 살폈다.

처음엔 식탁 위에 올렸다.

소용이 없었다.

책상 위에 올렸다. 소용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평소에 댕댕이가 잘 가지 않는 베란다 김치 냉장고 위에 올려봤다. 그랬더니 낯선 곳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 다른 장소에서보단 얌전했다.

병원에서 알려준 대로 담요 같은 걸로 얼굴을 감싸 움직이지 못하게 고정하고 눈꺼풀을 살짝 밀어 올려 안약을 넣었다. 여전히 반항은 했지만 몇 방울을 소비한 끝에 성공했다.


최초의 승리다.

자신감을 얻은 나는 인슐린 주사를 시도했다.

어머니가 담요로 반려견의 얼굴과 몸을 살짝 감쌌고, 나는 이전에 봐두었던 살집이 많은 부분을 손가락으로 들어 올려 주사 바늘을 찔렀다. 그리고 살살 약을 주입했다.

성공.

김치냉장고 고지에서 전쟁의 판도가 바뀌었다.

물론 아직은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이제 더 이상 동네 동물병원에 주사와 안약을 부탁하러 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으로도 기뼜다.


사흘이 지나 다시 병원을 찾았을 때 나는 수의사 선생님께 그동안 있었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수의사 선생님은 "아? 진짜? 그래요? 잘됐네요. 혹시나 싶어서 해본 말인데 그게 그렇게 효과가 있을 줄은 몰랐네요. 내가 다 기쁘네" 특유의 너털웃음으로 축하해 주셨다. 실제로 병원에 오는 당뇨성 백내장 강아지들 중에는 안약과 주사를 거부해서 증상이 더 악화되어 수술의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경우가 꽤 된다고. 정말 다행이라고.

수의사 선생님은 이대로 2주간 안약을 투여해서 경과를 보고 백내장 수술 여부를 판단하자고 말씀하셨다.


큰 고비를 넘겼다.

하지만 주사는 여전히 나에게도 댕댕이에게도 스트레스다.

한동안 유튜브 추천 영상에는 안약 넣는 법, 당뇨병, 인슐린 주사에 관한 영상들로 가득 채워졌다. 나는 틈만 나면 봤던 영상들을 보고 또 본다.

아무리 봐도 여전히 주사를 놔야 할 때마다 떨린다.

그래도 맞아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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