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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꼴레오네 Sep 23. 2020

적막한 자연 속으로

우수아이아

결국 에스메렐다 호수는 비가 내린 탓에 포기한다. 

앞으로의 여정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다.


아침 일찍 티에라 델 푸에고 국립공원으로 향한다. 


숙소에서 미리 투어 예약을 했고, 투어 차량이 숙소 바로 앞까지 픽업이 온다고 한다. 마을 자체가 작아서 그런지, 꽤나 괜찮은 시스템으로 보인다.


투어를 가기 전에, 현금이 다 털려버린 나는 조금 더 빨리 나와서 은행으로 향한다. 현금을 뽑기 위해서다. 하지만, 은행은 늦게 문을 여는 탓에 어쩔 수 없이 ATM을 찾아 나선다. 그런데 구글맵으로 여러 군데 ATM을 모두 돌아다녀봤지만, 모두 에러가 발생한다. 카드가 잘못된 건지, 내가 이상한 버튼을 누른 건지 알 수가 없다. 결국 돈을 뽑지 못하고, 투어 시간에 늦을까 봐 헐레벌떡 다시 숙소로 달려온다.


셔틀버스를 타고 산길을 구불구불 올라간다. 가는 길에 보이는 항구와 드넓은 바다. 비포장 도로를 리고 달려 국립공원 입구에 도착한다. 입장표를 끊어야 되는데, 직원이 세르히오 라모스(축구 선수)를 아주 빼닮았다. 


"너 세르히오 라모스랑 닮았어"

말 붙이기 좋아하는 나는 어김없이 말을 건다. 

내 말에 그저 웃던 그가 꺼낸 말

"난 라모스처럼 축구하고 싶은데 어려워. 그는 너무 잘해"




입장표를 끊고 다시 셔틀은 조금 달린다. 그리고 도착한 곳은, 사진으로 보던 세상 끝 우체국.

우수아이아, 세상 끝 우체국



호수처럼 보이는 바닷가에 있는 세상 끝 우체국의 분위기는 고요함 그 자체이다. 

잔잔한 바다를 보고 있자니, 선선한 바람이 귓가를 스친다. 우체국 안은 사람들도 북적인다. 엽서를 보내보고 싶었는데, 가격을 보니 만만치 않다. 엽서도, 봉투도, 기념품도 판다. 여권에 스탬프를 찍어주기도 하는데, 이마저도 돈을 받기도 하고, 줄 또한 길다. 가격 대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서 포기하고 나온다. 


세상 끝 우체국의 외벽


티에라 델 푸에고 국립공원은 한적한 분위기를 한껏 뽐낸다. 날이 흐리지만, 덕분에 오히려 더 운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진 것 같다. 멀리는 만년설이 쌓은 산이 보이고, 그 아래로는 옥색의 바다가 펼쳐져 있다. 가끔 이상한 오리나 독수리 같은 새들도 보이고, 이상한 이끼들도 자주 보인다. 우리나라와 다른 기후, 다른 위도에서 볼 수 있는 특이한 동식물들. 


티에라 델 푸에고 국립공원의 낯선 새들


해안가를 따라 8km 정도를 걷는다.

걷고 또 걷는다. 조금 힘들긴 하다. 트레킹화가 생각나는 순간이다. 티에라 델 푸에고 국립공원의 트레킹 코스는 마치 해리포터의 이상한 숲이 생각나는 풍경이다. 실제로 여기서 촬영했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분위기가 비슷하다. 트레킹 도중, 어제 마트에서 사 온 사과, 복숭아, 바나나 그리고 빵까지 다 먹어버린다. 비가 가끔 내렸는데, 짜증 나지 않을 정도로 추적추적 내려서 다행이었다. 이곳에 산다면, 매일 와서 해안가 산책을 하면 아주 마음이 편안해질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날씨만 좋다면 피크닉 장소로도 아주 적합하지 않을까.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한 곳임은 분명하다.


티에라 델 푸에고 국립공원의 자연 풍경


8km가 짧은 거리는 아니지만, 오르막길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산책로와 비슷했는데, 피로감이 몰려온다. 앞으로 트레킹을 몇 번을 더 해야 하고, 등산도 해야 하는데 겨우 이 정도로 힘이 들어버리면 어떡하나-라는 걱정이 든다. 




숙소로 돌아온다. 다시 돈을 뽑아보려 나서는데, 은행은 3시에 문을 닫는다고 한다. 오전 늦게 열고, 오후 3시에 닫으면 일을 얼마나 안 하는 건지 의문이 든다. 결국 다시 ATM과 씨름을 한다. 국립은행이 수수료가 싸다고 해서 열심히 시도해보다가, 도저히 모르겠어서 옆에서 돈을 뽑은 현지인 아주머니에게 부탁드린다. 흔쾌히 내 부탁을 들어주신 아주머니는 시도해보더니 여기서는 이 카드로 안된다고 하신다. 그래, 내가 잘못한 게 아니고 어떤 문제가 있긴 한가보다-라고 안심한다. 현지인이 안된다는데 어떡하리.


결국 옆에 사립 은행으로 향한다. 여기서 되는지 확인해보려고 뽑아보니 잘 되긴 한다. 근데 수수료가 건당 한화로 만원이 넘는다. 미친 거 아닌가? 결국 2번으로 나눠서 뽑고 온다. 수수료만 2만 5천 원 정도 뜯기고 5천 페소를 뽑는다. 피눈물이 난다.




우수아이아에는 킹크랩이 유명하다. 사진으로만 봐도 어마어마한 크기를 실감할 수 있다. 우리나라와 비교하면, 확실히 싼 가격이긴 하다. 하지만 유명한만큼, 아무리 싸다 해도 쉽게 먹을 금액은 아닌 듯했다. 돈이 털리기도 했고, 그 당시에는 돈을 아껴야겠다고 생각해서 먹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쉽기도 하다. 우수아이아에서 비글 해협 투어도 하지 않았으면, 킹크랩이라도 먹어볼걸-하는 생각이 종종 들곤 한다. 심지어 함께한 동행 Y가 매우 먹고 싶어 했는데, 괜히 나 때문에 못 먹게 된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에 가끔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마트에서 장 봐온 것과 동행들이 한국에서 챙겨 온 것들로 계란에 짜파게티와 햇반을 먹는다. 이곳까지 와서 한식을 먹어야 하나 싶을 수도 있는데, 이곳까지 와서 먹는 한식이라 더 맛이 좋은 것도 있다. 반면, 우리 옆 테이블의 외국인들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요리에 화이트 와인을 곁들여 먹는다. 맛이 좋아 보이진 않지만, 그들도 우리를 보며 그런 생각을 하겠지. 호스텔에서는 서로의 다양한 문화를 실감할 수 있다. 그런 이유에서 호스텔이 좋다.


호스텔 같은 방을 쓰는 어떤 여행객의 거대한 배낭을 침대에 놓여있다. 누군지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남극으로 간다는 어느 아일랜드 친구의 짐이다. 정말이지 거대한 배낭이다. 남극에서 신는 장화 비슷한 신발을 보여주는데, 보기만 해도 엄청 두껍고 무거워 보인다. 우수아이아가 배를 타고 남극으로 가는 관문이기도 하니, 실제로 남극으로 향하는 사람을 보기도 하는구나. 


그는 EPL의 선더랜드 팬이라고 한다. 축구로 말을 붙인 나는, 관심사가 같다 보니 이것저것 말을 붙인다. 기성용과 지동원에 대해서도 아주 잘 알고 있다. 손흥민도 물어보니 당연히 알고 있다. 지동원이 넣은 골에 대해서도 기억하고 있고, 극찬을 마다하지 않는다. 축구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저 내가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칭찬을 했을 수도 있지만, 실제로 그들이 뛰었던 팀의 팬이라니 신뢰가 간다. 아일랜드의 유명한 영화 <보리밭에 부는 바람>을 이야기하니, 엄청 좋아한다. 그가 우리나라 축구선수를 알고 있다는 것에 신기해했듯이, 그도 내가 그 영화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다는 반응이다. 그 영화의 주인공 킬리언 머피에 대해서도 얘기를 하자, 이제는 세계적인 배우가 되었다며 좋아한다. 어느 나라의 사람들과 친해지기에, 그 나라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이 좋은 방법 중 하나이기도 하다.



우수아이아를 떠나기까지 시간이 남아, 어디를 더 둘러볼지 생각하다가, 마샬 빙하를 보러 가기로 한다. 

산 꼭대기에 빙하가 있다는 것인데, 큰 기대는 하지 않고 택시를 탄다. 이곳 택시는 미터기가 아니라, 구간마다 금액이 정해져 있다. 호스텔에서 마샬 빙하로 가자고 하니, 택시 기사는 위치별로 금액이 표시되어있는 요금표를 본다. 흥미로운 시스템이다. 


빙하가 녹아 만들어진 작은 냇가를 따라 산을 오른다. 저 멀리 빙하가 보인다. 

내가 생각하는 빙하는 아니지만, 빙하라고 하니 그렇구나.....-라고만 생각한다.


마샬 빙하의 모습, 산 위에서 보이는 우수아이아의 경치


교과서에서 보는 피오르드 지형이 그대로 보인다. 북유럽에 가야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여기서도 운 좋게 볼 수 있었다. 빙하가 생각했던 것만큼 깨끗하진 않다. 하지만 빙하 아래로 흘러나오는 물은 너무나도 맑다. 빙하가 녹아 흐르는 물에 그대로 입을 대고 마신다. 똑같은 물맛이다.


마샬 빙하 정상에서 바라본 우수아이아와 피오르드 지형


우수아이아는 고요한 도시다. 

도시라고 하기엔 너무 작은 마을이다.

이곳에서 세상 끝의 풍경과 함께 색다른 자연을 맘껏 느낀다. 

앞으로 해야 할 트레킹의 워밍업도 한다.

먼가 대단한 것을 본 것도 아니고, 대단한 일을 하지도 않았지만, 

나는 이 도시의 풍경과 분위기는 언제든 기억할 수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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