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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꼴레오네 Sep 19. 2020

세상 끝의 분위기

우수아이아, 아르헨티나

우수아이아는 예상대로 쌀쌀했다.
날씨부터도, 이곳이 세상 끝이라는 걸 알려주는 듯했다.


이른 아침, 해가 떠오르면서 비행기가 착륙한다. 

여기는 우수아이아, 남미 대륙의 끝자락에 위치한 작은 도시이다. 


우수아이아 공항에서 바라본 풍경


호스텔 앞 거리에서

택시를 타고 숙소에 내리자마자, 다들 피곤한지 짐을 맡겨놓고 라운지에 뻗어서 잔다. 다행히 호스텔에 체크인/아웃 이후의 시간에 쉴 공간이 있던 덕분에 잠깐 동안 꿀잠을 잘 수 있었다. 점심때가 다 되어 일어나서는 주변을 돌아다녀보러 길을 나선다. 사실 유명한 랜드마크는 없기 때문에 둘러볼 곳이 많지는 않다. 여행자들이 흔히들 건너뛰는 도시이기도 하다. 심지어 도시 자체도 워낙 작기 때문에 금방 돌아볼 수 있다.


우수아이아 도시의 이름을 그대로 적어놓은 상징물(크리스마스는 훌쩍 지났는데, 산타 모자를 쓰고 있다.), 세상의 끝 팻말, 펭귄 사진, 그리고 세계 각국의 도시로 향하는 팻말들 등등 도시 곳곳에 작은 볼거리는 많다. 모두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서, 조금만 걸어도 전부 둘러볼 수 있는 작은 도시다. 


우수아이아 조형물, 각 도시로 향하는 팻말


세상 끝 표지판




이곳에서도 2박을 한다. 내일과 모레도 충분한 시간이 있기에, 오늘은 쉬면서 다음 날을 준비하려 한다. 내일 투어를 가서 먹을 도시락 장을 보러 인근 마트로 향한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도 느낀 것이지만, 이곳 개들은 정말이지 크다. 1미터는 족히 넘는 개들이 주인도 없이 길거리를 돌아다닌다. 돌아다니는 모든 개들이 크다. 이곳에서 작은 편이다-라고 생각하는 개들은 우리나라에서는 정말 크다-라고 생각할 개들이다. 그 정도로 모든 개들이 거대하다.


외국의 마트는 구경하는 것으로도 재미가 있다. 모든 물품들이 우리나라와는 다르니까. 마트 계산대는 우리나라와 다를 게 없는데, 이 작은 마트에 줄이 너무 길다. 사람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데, 줄이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는다. 왜 그런지 지켜보니, 마트 캐셔의 일처리 속도가 너무 느리다. 우리나라 아주머니 같았으면 금방 끝내고 계산했을 법 한 양인데, 하루 종일 느긋하게 계산을 하고 있다. 그러니 모든 계산대에 줄이 늘어서 있는 것이 당연하다. 계산을 하려고 보니, 이게 또 현금을 주로 받고, 카드를 사용하려면 여권을 제시해야 한다. 현금을 주면 위조지폐인지 캐셔가 일일이 검사를 한다. 도대체 이 나라 시스템은 왜 이모양이지?-라는 생각이 처음 들지만, 앞으로 일어날 일을 생각한다면, 아주 양호한 수준이었다.


에스메렐다 호수로 트레킹을 갈 생각을 한다. 하지만 어제오늘 비가 조금 내린 탓에 가도 될지가 걱정이다. 호수는 충분히 아름다운데, 후기를 보니 진흙이 너무 많다고 한다. 운동화도 하나뿐인데, 이게 젖어버리면 앞으로 3주간의 여행에 아주 큰 차질이 생겨버린다. 실제로 호스텔 스탭도 지금 가면 진흙 때문에 제대로 걷지도 못할 거라면서, 장화를 신고 가야 한다고 한다. 장화가 있을 리가 없다. 결국 방향을 틀어, 티에라 델 푸에고 국립공원을 가보기로 한다. 여행 오기 전에 생각도 못한 곳이긴 한데, 그래도 뭐라도 봐야 하지 않겠는가.


사실 우수아이아의 가장 큰 랜드마크는 비글해협 투어이다. 영화 [해피투게더]에서 '세상 끝 등대'가 나와서 유명해졌는데, 배를 타고 '세상 끝 등대'를 보고, 펭귄 섬에 들려서 수많은 펭귄도 구경할 수 있는 투어다. 하지만 가격이 십만 원이 넘는 탓에 부담이 되는 금액인 것은 확실하다. 애초에 내가 목매던 투어도 아닐뿐더러, 펭귄에 큰 감흥이 없었기에, 투어를 하지 않기로 한다. 하지만 이곳 호스텔에서 만난 남미 일주를 다 하고 오신 여행자분께서, 이곳의 랜드마크는 그 투어고, 그걸 하지 않으면 뭐가 남겠냐고 말을 하신다. 고민이 되는 일이긴 하지만, 그만한 돈을 투자할 가치가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그리고 다시 방으로 돌아와서 가방을 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가방에 분명히 있어야 할 돈이 없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깜비오에게 환전을 한 금액을 일부만 들고 다니고, 대부분은 메인 배낭에 넣어두었다. 20만 원이 넘는 돈을 봉투 째로 넣어두었는데, 아르헨티나 페소 전부가 없어진 것이다. 기어코 아닐 거라 생각하며, 온 짐을 다 뒤지기 시작한다. 있을 리가 없다. 혹시나 하는 희망은 거품이 꺼져 사라지고 만다. 남미에서 소매치기를 당한다던가, 휴대폰이 털린다던가, 배낭을 털린다는 얘기를 익숙하게 들어왔지만, 이 당사자가 내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리고 지금은 현실이다.


이곳 호스텔에서 털린 것 같진 않다. 줄곧 스탭 뒤의 산더미처럼 쌓인 가방에 끼어있었으니. 도대체 내가 가방을 무방비 상태로 놔둔 적이 언제지? 푸에르토 이과수에서는 돈 확인을 했다. 포스 두 이과수에 다녀올 때도 스탭에게 가방을 맡겼다. 그리고 오늘 낮잠을 잘 때도 가방을 맡겼다. 내 생각에는 이과수에서 털린 것이 확실하다. 이곳에서는 아무리 우리가 잠들었다 하더라도, 언제 깨어날지 모를 텐데 가방을 뒤지고 있을 수가 없다. 이과수에서는...... 우리가 브라질로 간다고 말을 했으니, 안심하고 가방을 뒤질 수 있지 않을까. 게다가 그날 우리는 체크아웃을 이미 한 상태였지 않은가. 포스 두 이과수에서 돌아오고 급한 나머지, 가방 안의 현금 확인을 할 생각도 못했다. 사실 그게 털릴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하기도 했고. 이과수의 호스텔이 너무도 유력했지만, 나는 이미 우수아이아. 너무 먼 길을 와버렸다. 돌이킬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결국 아르헨티나 페소를 모두 털려버려서, 당장 내일 다시 아르헨티나 페소를 은행에서 뽑아야 하게 생겼다. 환전을 할 수 있는 곳도 마땅치 않고, 깜비오에게 싸게 환전을 했는데, 여기서 뽑으면 수수료도 엄청날 것이다. 멘탈이 위험했지만, 가까스로 지켜낸다.


함께 한 동행들에게도 확인해보라고 한다. 실제로 내가 이런 일을 당한 것이 처음이기도 하고, 너무 당황스러워서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냥 호스텔 스탭 '막시모'랑 너무 친해져 버린 탓에, 그를 믿고 방심한 탓이다. 자물쇠라도 채워 놓았어야 했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나는 항시 가방에는 자물쇠를 잠가놓게 된다.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그렇다고 굳이 기분이 나쁜 티를 낼 이유도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괜히 나 때문에 동행들의 기분까지 안 좋아질 이유는 없으니까. 최대한 괜찮은 척, 괜찮은 척......




우수아이아는 세상 끝 분위기를 그대로 보여준다. 

날씨도 쌀쌀하고, 마을 자체가 워낙 조용하고 고즈넉하다. 무채색의 건물들이 즐비하고, 사람도 적고, 자동차도 적다. 눈앞에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며, 해는 10시가 다 돼서야 진다. 그럼에도 있을 건 다 있는 신기한 마을. 비글 해협 투어를 굳이 하지 않아도, 펭귄을 보지 않아도, 이런 도시의 분위기를 온전히 느끼고 싶은 것이, 이곳을 방문하려던 목적이었으니까. 그리고 이곳에 왔다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고 있으니까. 그걸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도시이다.


여기는 세상의 끝, 우수아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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