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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꼴레오네 Sep 27. 2020

지겹도록 빙하 위를 걷다

엘 칼라파테, 아르헨티나

우수아이아를 떠나,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엘 칼라파테에 도착한다.

비행기가 착륙하면서부터 보이는 엘 칼라파테의 호수는 옥색으로 빛난다. 세상에 저런 호수 색은 처음 본다.


수많은 남미 여행 책을 읽으면서, 그들이 머무른 숙소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숙소는 후지 민박이었다.

한국인 아주머니와 일본은 아저씨가 운영하신다는 엘 칼라파테의 민박집이다. 이미 민박의 역사는 그만큼 오래되기도 하였고, 한인 민박을 적당히 즐기고자 했던 나의 계획 중 일부기도 했다.


엘 칼라파테의 훈한 허허벌판, 그리고 후지 민박


햇살이 아주 잘 들어오는 후지 민박의 분위기는 너무도 아늑하다. 충분히 넓은 공간에, 커다란 거실 창문을 통해 엘 칼라파테의 풍경이 그대로 들어오는 곳이다. 도착하자마자 쉴 틈도 없이, 장을 보러 마트로 향한다. 


후지 민박이 이사를 한 탓에, 시내로 가려면 30분 정도 걸어가야 한다. 버스 터미널과 가까운 것은 장점이지만, 시내와 멀다는 점은 단점으로 보인다. 시내로 가는 엘 칼라파테의 한적한 도시 분위기는 산책을 하기에도 안성맞춤으로 보인다. 우수아이아에 이어, 이곳의 분위기 또한 너무도 만족스럽다.


엘 칼라파테의 풍경


모레노 빙하 트레킹과 피츠로이 트레킹, 두 개의 트레킹을 해야 하는 힘든 일정을 대비하려니 마트에서 사야 할 것만 같은 것이 많다. 조식만 제공되는 민박집이었기에, 저녁을 만들어 먹고자 이것저것 많이도 산다.


마트에서 계산을 다 하고 나오니, 어떤 아르헨티나 여자가 나한테 다가온다.

"안녕, 혹시 나랑 사진 찍어줄래?"

"응?"

갑작스러운 부탁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어...... 그래, 근데 왜?"

"Because, you are so beautiful"

도대체 왜 hadsome이 아니고 beautiful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건 칭찬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모레노 빙하 투어 중에 직접 점심을 싸와야 한다고 해서, 민박집 사장님에게 주먹밥을 부탁한다. 트레킹을 가는 사람이 많다 보니, 주먹밥이나 김밥 도시락도 주문을 받는 모양이다. 만족스러운 시스템이다. 




아침 일찍 일어난다. 무려 7시 30분 숙소에서 픽업이다.

빙하 위를 걷는다고 하니, 추울 것도 같고, 오래 걸어야 하니, 더울 것도 같다. 

도대체 옷을 어떻게 입어야 할지 감이 안 온다.


동행과 함께 투어 버스를 타는데, 우리 말고 한국인이 3명 더 있다. 

들어보니 한 쌍의 커플과 그들의 친구인 여자까지 셋이서 왔다고 한다. 독특한 조합이다.


내 옆자리에는 의도치 않게 브라질 친구가 탄다. 

또, 브라질 축구로 대화를 시도하는데, 한국에서 왔다는 나의 말에 놀란다. 듣자 하니, 그는 몇 년 전에 한국을 한 달 동안 여행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부산 전주 속초 등의 도시 이름을 줄줄이 나열하다가, 안동도 나오길래 도리어 내가 놀란다. 내가 안동이 고향이라고 말하니, 그는 '안동에는 모든 사람들이 한옥에 살아?' 라며 묻는다. 그의 질문에 나는 웃으면서 아파트에 산다고 말한다. 그는 태국이랑 중국도 다녀왔는데, 한국의 절이 가장 인상 깊고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브라질 친구가 동북아시아를 여행한 것도 신기하지만, 중국에 비하며 한국을 칭찬해주니, 국뽕이 차오르지 않을 수 없다.


원래는 전망대만 구경할 생각이었다.

투어비가 너무 비쌌고, 그만큼의 가치를 해줄지 의문이었다. 비글해협 투어와 비슷한 걱정이었다.

미니 아이스 투어가 15만 원, 빅 아이스 투어가 30만 원 정도 하니, 쉽게 생각할 가격은 아니었다.


투어를 시작하기 전에, 전망대에서 시간을 보낸다.

그때까지만 해도 전망대에서만 바라봐도 충분히 아름다웠기에, 투어를 하는 게 가치가 있을까-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결론을 말하자면, 투어를 안 했다면 아주 아쉬울 뻔했다.


전망대를 걷고 있는데, 갑자기 천둥이 치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폭탄이 터지는 소리와도 비슷하다.

깜짝 놀라 빙하를 바라보니, 빙하가 쩍 하고 깨지면서 호수에 빠지고 있다. 빙하가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물에 빠지는 소리는 정말이지 어마어마하게 크고, 천둥이 바로 옆에서 치는 듯한 소리와 비슷하다.

빙하가 깨지는 장면은 아쉽게 영상에 담지 못했지만, 그걸 보는 것도 운이 좋아야 본다고 하니, 직접 본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럽다.


사람들이 때로는 이곳에서 빙하가 깨지는 것을 보고, 지구 온난화를 얘기하며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고 한다.

하지만 이곳의 빙하는 뒤에서 계속 생성되며 밀려 나오기 때문에 당연히 깨지는 게 정상이라고 한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페리토 모레노


작은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넌다. 배에서 바라본 빙하는 작은 건물 높이와 비슷하고, 실로 엄청 푸르다.

배를 건너 내리니 가이드가 우리를 맞이한다. 2명의 가이드가 한 팀이 되어 20명 정도 되는 사람들과 한 팀을 이뤄서 투어를 진행한다. 그리고는 곧장 투어를 위해 이동한다.


미니 아이스 투어는 얼마 이동하지 않고 인근에서 투어를 한다고 하는데, 빅 아이스 투어를 신청한 나는 거의 40분가량 산을 타고 이동한다. 가는 도중에 헬맷과 허리띠 그리고 아이젠을 받는다. 아이젠은 우리나라에서 착용하는 작은 아이젠과 다르게 내 발보다 더 크고, 무겁다.


빙하가 날카로워서 장갑은 필수로 착용해야 하는데, 나와 동행은 아침에 바삐 나오느라 장갑을 깜빡하고 챙기지 못했다. 가이드에게 말하니, 가이드가 한 짝을 빌려주고 다른 외국인도 한 짝을 빌려주어 겨우 장갑을 한쪽만 끼고 이동한다.



빙하 위로 올라간다.

처음 밟아보는 빙하다. 가이드 설명을 들으며 조심스레 한 걸음, 한 걸음 이동한다.

아이젠이 무겁기도 한데, 빙하에 아이젠을 찍어야 해서 걸을 때마다 발목에 무리가 조금 가는 듯하다.

당장 내일 새벽에 피츠로이를 올라야 하는데,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빅 아이스 트레킹의 시작


성큼성큼 발을 내딛는다. 빙하의 겉면은 까칠해서 장갑이 왜 필요한지 알 수밖에 없다.

눈이 쌓여서 굳은 그 느낌이다. 드넓은 빙하나 깊고 푸른 빙하를 보고 싶었는데, 빙하 위에서도 그런 장면을 보기 위해서는 한참을 더 걸어야 한다. 여행지에서 멋진 장면을 보기 위한 그 과정은 항상 인내와 끈기가 필요하다.


한참을 걸으니 드디어 중간중간에 깨끗한 빙하를 볼 수 있다. 빙하가 내려오면서 흙도 묻고, 사람들이 밟기도 해서 실제로 깨끗한 빙하보다는 때가 묻어 있는 빙하가 더 많다. 크레바스도 보고, 빙하가 녹아 빙하 위로 흐르는 물줄기로 본다.

정말이지 영롱하게 푸르다


빙하 사이사이, 바라만보아도 시원할 정도로 푸르다


빙하 위에 물이 고인 곳을 가이드가 밟고 서있다. 빠져야 정상인데, 빠지지 않는다.

물이 고인 빙하 위로 얼어있는 곳만 밟고는 이동한다. 괜히 가이드가 아닌가 보다.

10명 조금 넘는 그룹인데 가이드가 2명씩 붙는다. 사실상 빅아이스 투어는 한 가이드가 하루에 한 번만 할 수 있으니, 괜히 비싼 값을 하는 게 아닌 것 같은 생각도 든다.


가이드가 사진도 찍어주고, 포토 스팟도 집어준다. 

주변을 둘러보면 온통 얼음 천지다. 멀리 보이는 산을 제외하면 실제로 남극에 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도중에 흐르는 빙하 물을 떠서 담아본다. 이렇게 깨끗할 수가 없다.


빙하의 푸른 모습들


전망대에서 보이는 제일 끝까지 이동한 다음, 각자 싸온 점심을 먹는다.

주먹밥이 이미 식어있지만, 배가 고프니 뭐든 맛이 좋다. 외국인들은 주로 샌드위치나 핫도그를 먹고, 심지어 피자를 싸온 사람도 있다. 


정상으로 가는 길에서 찍은 가이드, 그리고 다같이 앉아서 먹는 점심


갈 수 있는 제일 먼 곳까지 와서 바라보는 빙하는 진짜 어마어마하게 컸다.

남미에는 왜 이렇게 어마어마한 것들이 많은지 모르겠다.

실제로 부에노스 아이레스 도시보다 크다고 하니, 그 크기가 짐작도 할 수 없을 정도이다.

(위성사진으로 보니, 확실히 그 크기가 얼마나 큰지 대충 알 수 있었다.)


정상으로 가는 길


이제 다시 배를 타러 돌아가야 하는데, 왔던 길을 생각하니 막막하다.

평생 볼 빙하를 오늘 다 본 것만 같은 느낌이다.

슬슬 발목이 아파온다. 또다시 오늘 새벽의 피츠로이 산행이 걱정되기 시작한다. 강행군이란 말이 딱 맞다.

애써 무리하지 않으려 살살 걸어보지만 별 의미가 없는 듯하다.


돌아가는 길은 빙하에 대한 흥미도 없고, 빨리 아이젠을 벗어던지고 숙소로 가고 싶은 마음뿐이다.


투어 도중 흐르는 냇가(?)를 건너는 모습, 그리고 셀카 찍는 외국인


드디어 다시 페리를 탄다. 힘든 여정이 끝이 난다.

말로만 듣던 빙하 위스키를 페리에서 먹는다. 

의무 부여를 잔뜩 해서인지, 맛이 좋다. 심지어 리필도 해주길래, 반잔을 더 먹는다.

누군가는 맛이 별로라기도 하고, 투어 자체도 별로라서 이 위스키가 15만 원짜리 위스키라고 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투어에 매우 만족한다.

평생 볼 빙하를 다 보았기도 하고, 너무나도 영롱하게 푸른 빙하의 모습도 보았으니까.


빙하 위스키


다시 말하지만, 전망대만 보았다면 빙하는 큰 감흥도 없이 시시하게 끝날 뻔했다.
전망대만 보고 온 사람들은, 투어가 어떻다-라고 말할 수도 없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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