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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꼴레오네 Oct 03. 2020

불타오르는 피츠로이를 보려면

엘 찬텐

모레노 빙하 투어가 끝나자마자 숙소에서 급하게 밥을 먹고 다시 나설 채비를 한다.

바로 새벽 피츠로이 등산을 하기 위함이다.


원래 피츠로이는 빙하 투어 다음 날, 여유 있게 올라갈 작정이었다.

불타는 고구마(일출에 빛나는 피츠로이 봉우리의 모습이 고구마와 같다고 해서 지어진 별명)는 체력적으로 무리일 것 같기도 하고, 날씨 운이 워낙 좋아야만 볼 수 있다던 여행자들의 후기 때문이었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도전해볼 법했지만, 새벽 등산이 체력적으로 무리가 있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쉽게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그리고 나에게 먼저 새벽 등산을 제안해준 것은 동행 W였다. 그렇게 나와 W는 새벽 등산을 하기로 하고, 여자 동행 두 분은 아침에 피츠로이가 보이는 카프리 호수까지만 가기로 한다.




엘 칼라파테에서 엘 찬텐으로 가는 버스를 탄다.

바로 옆에 있는 도시로 가는 길이지만, 무려 3시간.

우리나라 같으면 3시간이 엄청 긴 버스 중 하나지만, 이곳 남미에서는 3시간 정도면 아주 짧은 편이다.

빙하 투어를 하고, 새벽 등산을 위해 버스에서 눈을 붙여야 했지만, 쉽게 잠이 오지 않는다.

버스 창 밖으로, 아르헨티나의 넓은 들판 뒤로 지는 해가 보인다.

서서히 지는 노을빛이 시간이 지날수록 색이 변하는데, 그 모습을 계속 지켜본다.


결국 잠을 한 숨도 자지 못한다. 무슨 일인지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

우수아이아에서 남미 사랑 단톡 방을 통해 우리와 일정이 같은 분이 동행을 모았다. 나랑 W가 연락해서 같이 가기로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같이 가기로 한 사람이 무려 8명이나 된 것이다.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는데, 야간 산행이기도 하니 사람이 많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엘 찰텐으로 가는 길에, 같은 버스를 탄 한국인 두 분을 만난다. 그분들에게 같은 일행이냐 물어보니, 아니라고 한다. 심지어 그들은 같이 가기로 한 동행이 10명이라고......

우리 일행과 그들의 일행을 합치면 거의 20명 가까이 되는 한국인이 같은 날, 같은 시간에 등산을 간다. 한국인이 참 많긴 하다-라고 생각한다.


새벽의 엘 찰텐은 예상대로 쌀쌀하다. 바로 배낭에서 바람막이를 꺼내 입는다. 새벽의 산은 춥기에, 바람막이와 패딩까지 단단히 준비를 했다. 그리고 다들 모이기로 한 곳인 엘 찰텐의 어느 호스텔로 향한다.

엘 찰텐의 거리, 피츠로이 등반 후 찍은 사진


엘 찬텐은 피츠로이 하나 때문에 생긴 마을이기도 하고, 새벽 산행을 가는 사람도 많아서 일까. 수많은 호스텔이 밤늦게까지 불이 켜져 있고, 등산 용품 대여점이나 핫도그 집도 새벽까지 불이 켜져 있다. 왕복 9시간이나 걸린다는 피츠로이 산행에 조금 겁이 났던 것은 부정하지 않겠다. 그래서 등산화나 등산 폴, 라이트를 빌려야 하나 생각했는데, 여권을 맡겨야 빌려준다기도 하고 가격이 조금 나가는 바람에 결국 아무것도 없이 출발하기로 한다. 나의 체력을 믿어보기로 한다.


도착한 호스텔에는 사람이 많다.

수많은 호스텔 로비 테이블 중에서 우리는 한국인으로 보이는 사람을 찾아 인사를 건넨다.

멤버를 모집한 대학생 K형님, 회사에 장기 휴가를 내고 오신 T형님, 세계 일주 중인 어느 여성분과 학교 선생님 두 분(여행 중 만난 두 번째 선생님이다.) 그리고 또 다른 여성분과 우리 둘까지 남자 4명, 여자 4명 총 8명이 모인다.


나는 일정상 피츠로이 야간 산행을 할 수 있는 날이 오늘밖에 없어서 온 것이지만, 다른 분들은 날씨가 좋아지기를 기다리며 피츠로이에서 숙박을 하며 기다렸다고 한다. 그리고 오늘이 그 날씨가 가장 좋은 날이라고 한다. 실제로 등산로로 사람들이 몰린다. 날씨가 좋다는 반증이지 않을까.


밤 산행이 처음은 아니었다. 한라산에 오를 때도 새벽부터 올랐고, 군대에서도 밤 산길을 무수히 걸었다. 하지만, 이곳은 데이터도 터지지 않고, 말도 통하지 않는 아르헨티나이니 긴장이 될 수밖에 없다. 설레는 마음을 안고, 피츠로이 등산로로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다.




걸음이 빨라서 일부러 앞장서서 걷지 않는다. 내가 제일 앞에서 빨리 걸으면 페이스가 맞지 않겠다-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앞장서서 걸으시던 선생님이 자꾸 놀라신다. 밤길에 나무를 잘못 보고 놀라시고, 바위를 잘못 보고 놀라신다. 실제로 어두워서 놀랄 법도 하다. 결국 두어 번 놀라시더나, 내게 앞장서라고 하신다. 결국 맨 앞에서 일행을 이끈다.


피츠로이 초반 길은 산책길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로 전혀 힘들지 않다. 심지어 조금 움직이니 더워서 입고 있던 패딩과 바람막이 모두 벗어서 들고 걷는다. 휴대폰 라이트로는 부족하다는 후기가 많았는데, 나는 전혀 부족한지 모르고 걷는다. 심지어 충분해 보인다. 날씨가 이렇게 좋을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좋다. 구름 한 점 없고, 달빛이 환한데도 별이 밝다. 카프리 호수에는 밤인데도 불구하고 달빛에 피츠로이가 반영이 된다. 이과수에서 털린 돈 액땜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카프리 호수에서 바라본 피츠로이


계속해서 산책길이다. 아직 힘들지는 않다.

그러다가 도중 길을 잘못 들어 2번이나 헤맨다. 전부 길처럼 생겨서 가다 보니 막다른 숲길이다.

구글 지도가 켜지지 않아서, 표지판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밤에는 길을 잃기 쉬울 것만 같다. 나와 W 둘이 왔다면 분명 길을 더 헤매었을 것 같다. 우리와 같이 길을 잃은 외국인 무리들은 거침없이 나아간다. 그들이 길을 찾을 수 있을까-라고 희망을 품어보지만, 그들도 결국 되돌아온다. 이래서 밤 산행이 위험한가 보다. 결국 맵스미 어플을 통해 길을 찾아 다시 되돌아 간다.


길을 걷다 고개를 들면 저 멀리 어두운 실루엣의 피츠로이가 보인다. 별은 여전히 밝다. 북반구에서 보이지 않는 별들이라 생각하니 감회가 남다르다. 뒤에서 따라오는 선생님에게 요즘 학교 이야기들을 들으며 걷는다. 얘기를 하면서 걸으니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힘들지도 않다.


한참을 걷다가 고개를 쳐다보면 산 중턱에서 불빛이 보인다.

피츠로이에는 일명 "마의 1km" 구간이 있다.

피츠로이로 가는 길중 마지막 1km 구간이 제일 힘들고, 나머지 구간은 힘들지 않다는 뜻이다.

분명 저 위에 반짝이는 불빛은 마의 1km 구간이 틀림없다. 저기까지 어느 세월에 올라가나-라고 생각한다.

땅을 보고 걷다가 잠깐 위를 쳐다보면, 또 중턱에서 빛이 반짝인다. 아직 한참 남았다는 생각에 한숨이 절로 쉬어진다.


마의 1km 구간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계속해서 돌계단이다. 심지어 비가 오고 나서 얼었는지, 중간중간에 얼어있는 곳이 있어서 미끄럽기까지 하다.

발에 계속 힘을 주고 걷다 보니 더 힘이 든다. 중간중간에 쉬고 있는 여행자들도 만난다. 다들 어려워하는 구간이 맞긴 한가보다. 나는 오히려 힘든 구간일수록 더 빨리 오르고 싶다. 빨리 올라가야 덜 힘든데, 자꾸 앞에서 속도가 늦춰지니 두 걸음 걷고 두 걸음 쉰다. 참다가 결국 더 힘들어지는 기분이라 혼자서 빨리 올라간다. 


피츠로이 정상에서 일출을 기다리는 사람들


다행히 우리가 올라가는 사이, 피츠로이에 구름이 끼진 않았다. 다행이다.

아직 해가 뜨기에 시간이 남아, 정상에서 밥을 먹으려 한다. 나와 W는 미리 후지 민박에서 주먹밥을 싸왔는데, 다른 사람들은 밥을 싸온 사람이 아무도 없다. 결국 우리의 주먹밥 6개를 전부 나눠 먹는다. 선생님들이 들고 온 뜨거운 미역국도 함께 먹으니 더욱 맛이 좋다.


피츠로이 정상에서 바라보는 일출


기다리다 보니 해가 떠오르려 한다.

아쉽게 해가 뜨는 쪽에 구름이 살짝 끼어 생각보다 피츠로이가 붉게 물들진 않는다.

그래도 다른 여행자들의 사진을 보면 피츠로이에 구름이 걸려 깔끔한 피츠로이를 보기 어렵던데(이전의 마테호른처럼), 봉우리 주변에 구름이 없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한다.


붉게 물들어가는 피츠로이


피츠로이가 서서히 붉어지자, 서로 사진을 찍어주기에 바쁘다.

정상에 올라가니 바람도 더 많이 불고 추워서 벗고 있던 패딩과 바람막이 모두 입는다. 그래도 춥다.

이렇게 힘들게 올라와서 구름에 가려 보지 못했다면 두고두고 아쉬울 뻔했다.

마테호른은 기차를 타고 올라가서 힘이라도 들지 않지만, 피츠로이는 보려면 왕복 9시간에 체력도 시간도 허비하니 말이다. 


제일 붉었을 때의 피츠로이


내려올 때는 길도 밝겠다. 모두 따로 내려간다.

나는 W와 함께 K형님과 같이 셋이서 내려온다. 빨리 가서 쉬고 싶은 마음도 있고, 셋 다 걸음이 빨라서 인지 평균 4시간은 걸린다는 하행길을 2시간 30분 만에 내려간다.  빨리 내려가서 그런지, 무릎도 아프고 발바닥도 터질 것 같다. 체력이 다 떨어질 때 즈음, 엘 찰텐 마을이 보이기 시작한다. 다 내려와서, 이제 올라가는 사람들을 보니 기분이 좋으면서도 엄청 고생하겠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애써 힘내라고 응원해준다.


내려오는 길, 카프리 호수에 비치는 피츠로이




엘 찰텐에 도착한다.

K형이 묶던 숙소이자 우리가 처음 만났던 숙소로 돌아온다.

그곳에서 간단하게 빵이랑 스크램블 에그로 대충 점심을 때우면서, 맥주 한 잔 한다.

그리고 로비 소파에서 셋 다 기절하듯 잠에 든다.


그리고 1시 차를 타고 엘 칼라파테로 돌아온다. 2층 버스인데 프리미엄 버스여서 오는 길에는 한 숨도 못 잤지만, 돌아가는 길에는 1분도 남기지 않고 깊은 잠에 든다.


다시 후지 민박으로 돌아온다.

선생님 두분도 후지 민박에서 주무신다길래, 선생님 두 분과 여자 동행 두 분까지 같이 저녁을 해 먹기로 한다. 나와 W는 쉬지도 못한 채, 다시 장을 보러 먼 길을 걸어 엘 칼라파테 마트로 향한다.


계란말이와 근사한 고추장 제육볶음을 하다 보니, 뒤늦게 일행들이 도착한다. 재료가 부족해서 맛이 좋지는 못했지만, 지친 몸을 달래기엔 충분한 맛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새로 만난 선생님 두 분과 기존 동행들까지 총 6명은 같이 밥을 먹고, 친해지면서 밤늦게까지 맥주를 마시며 서로의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운이 너무 좋았다.


단 하루, 피츠로이 야간 산행의 기회가 있었다.

빙하 투어를 끝내고 바로 올라간 산행이라 걱정도 했지만, 나는 내 체력을 믿었고, 결국 믿음은 통했다.

날씨는 너무 좋았고, 함부로 보기 힘들다는 불타는 피츠로이도 봤다.

그리고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그때만 해도, 내 여행 도중 그들을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후 <트래블러 2>에서, 비가 와서 산행 도중 내려가야 했던 것을 보면서,
다시금 내가 운이 좋았구나-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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