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스코, 마추픽추
7시에 마추픽추 입장을 위해 이른 새벽, 5시에 일어난다.
여행사에서 계약한 숙소라 전부 투어 인원들 뿐인 줄로만 알았는데, 의외로 외국인들도 섞여있다.
아침은 매우 부실하기 짝이 없다. 오늘도 살기 위해 먹는다.
영화 '인크레더블 헐크'에 나오는 악역과 닮은 외모의 가이드가 우리를 맞이한다.
한국말 몇 마디 할 줄 아는 그는 나름 한국인 전문 가이드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하다.
마추픽추로 올라가기 위한 줄은 길고 길다.
이 많은 사람들이 이른 아침부터 마추픽추를 올라가기 위해 일어난 것을 생각하면
실로 '돈 빨아먹는 도시'가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아마 페루는 마추픽추를 처음 발견한 고고학 교수에게 인센티브를 매년 지급해야 할 정도이다. (실제로 그러는진 모르겠다.)
맨 앞에 줄을 서있는 나에게 가이드가 말을 건넨다.
Open이 한국말로 뭐냐고 묻는다.
바로 생각 나는 단어 "펴"를 말한다.
"펼쳐", "펴세요" 등 좀 더 외국인에게 가르쳐주기 쉬운 단어가 있었는데 왜 그 단어가 떠올랐을까.
그러더니 가이드는 내 뒤로 이어진 한국인 관광객들에게 입장권을 펼쳐 보이며 "펴! 펴!"를 연신 외친다.
뒤에 있던 사람들은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줄 알았는지 자기네들끼리 웃는다.
그러고 나서 가이드는 자신의 메모장에
open = pyeo라고 적는다.
그리고 그 메모장에는 한국 단어가 스무 개 넘게 적혀있다.
귀엽다. 이제 막 시작하는 가이드인가. 열정이 대단하다.
마추픽추로 오르는 셔틀버스는 쉴 새 없이 왔다 갔다 한다.
그래서인지 줄은 길지만, 금세 버스에 탄다.
구름이 적절히 낀 아구아스 깔리엔테스는 마치 요새를 방불케 한다.
이곳에 실제로 성벽이 있다면, 어느 적도 물리칠 수 있을 법한 광경이다.
너무 운치 좋은 경치다. 하지만 한편으론, 구름에 마추픽추가 보이진 않을까 걱정을 한다.
버스로 구불구불한 길을 오른다. 산을 오르는 길이기에, 돌아가지도 않고 그대로 산을 오르다 보니 길이 Z자 모양의 연속이다. 심지어 가드레일 따위도 없다. 한번 바퀴가 빠지면 그대로 산 아래로 추락해서 죽어버릴 것 같다. 쉴 새 없이 꺾고 또 꺾는다.
올라가는 와중에도 창문 밖의 안개는 걷힐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아까는 구름이었고, 지금은 안개가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정상에 도착하니 사람들로 북적인다. 마지막 화장실이라는 표시를 보니, 진짜 마추픽추 바로 앞에 왔구나-라는 것을 실감한다. 관광지라 그런가, 쿠스코 시내보다 비싼 2 솔을 받는다.
기념 도장을 한창 찍고 있는데, 누군가가 샛길 등산로로 올라온다.
아까 5시에 일찍 출발한 남자 2명이다.
그 사이에 비가 내렸는지, 우비를 꺼내 입고 머리는 다 젖어서 미역이 되어버린 그들.
굳이 새벽에 보이지도 않는 길을 왜 올라오는 건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대단하다.
잉카인의 삶을 체험해보려는 것일까.
이미 그곳에는 수많은 가이드가 대기하고 있다.
"너 가이드 필요해?"
아니 도대체 얘네들은 입구 바로 앞에서 손님을 찾는구나.
"아니, 미안한데 이미 가이드가 있어"라고 한 서너 번 대답한다.
짙은 안개를 뚫고 입장을 한다. 가는 길에 이것저것 영어로 열심히 설명해 주시는데, 거의 알아들었지만 별 관심은 없다. 게다가 동행했던 선생님이 지식백과를 보고 가면 좋다고 하는 연락을 받고서 미리 찾아보았는데, 지금 가이드가 말하는 내용이 대부분 거기에 있는 내용이다. 더더욱 흥미는 떨어진다.
마추픽추는 도대체 언제 나오는 거야-라고 생각하며 안개를 계속 헤쳐나간다.
도저히 안개가 걷히지 않자 나는 가이드에게
"이건 안개 투어야"라고 말하니, 가이드도 웃으며 동의하는 표정을 짓는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지, 마추픽추를 가장 잘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에 오르니 거짓말처럼 안개가 걷힌다.
서서히 바람에 따라 이동하던 안개가 사라지니 마추픽추의 고운 살결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하고, 곧이어 선명한 마추픽추의 모습이 드러난다. 마법 같다.
우유니에서 함께 투어를 한 유치원 교사 누나가 말하길
'안개가 걷히는 모습을 보는 것도 아름답다.'라고 했는데, 실제로 그 모습마저 봐버린다.
하늘에게 감사하다.
또다시 시작된 포토타임.
사진 찍는 것은 중요하고, 재밌고, 그리고 힘들다.
돌이켜보면 마추픽추에서 사진 욕심이 조금 과했던 것 같은데, 나와 함께 다니면서 너무 사진 셔틀이 되어버린 건 아닌지, A에게 아직도 미안한 마음이다.
한창 사진을 찍고 있는 찰나, 어떤 외국인 할아버지가 말을 거신다.
"Can you take a photo... 사.. 진?"
영어로 말을 걸다가 끝은 한국어로 마무리된다.
우리가 한국인인 것을 알아보는 것까지는 그렇다 치자, 도대체 한국말은 어떻게 아시는 건가요?
'안녕', '감사합니다' 같은 기초 단어도 아닌, 무려 '사진'이라는 고급 단어를....
알고 보니 한국에 사시는 분이시란다. 조선대학교에서 교수로 지낸다고......
그러면서 갑자기 한국 음식이 맛있다며, 김치찌개 삼겹살 얘기를 하신다.
재밌는 사람이고, 이곳에서 한국에 사는 외국인을 우연히 마주친 것을 생각하니 다시 생각해도 신기하다.
안개는 금방 모두 없어져버리고 태양이 밝게 얼굴을 내비친다.
그러니 슬슬 더워지기 시작한다.
마추픽추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넓은 느낌이다. 들어온 입구 반대편에는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는데, 뭔가 하고 보니 와이나픽추로 올라가는 길이다. 와이나픽추는 반대편 봉오리에서 마추픽추를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다.
알파카도 몇몇 있었는데, 원래 있던 놈들인지 아니면 일부러 가져다 놓은 놈들인지 알 턱이 없다.
그저 이런 높은 산봉우리에 이 녀석들이 유적지에 왜 있는 건지 신기할 따름이다.
화장실이 급하다는 A는 먼저 빠져나가고, 혼자 조금 더 마추픽추를 둘러본다.
아무 건설 기술도 없던 잉카인들이 이렇게 높은 곳에 어떻게 이런 건축물을 지었는지 생각하다 보면, 괜히 마추픽추가 불가사의가 아니구나-라는 것이 절로 생각된다.
마추픽추 끝자락에 앉아서 아구아스 깔리엔테스를 내려다본다.
봉우리가 여럿 있는데, 베트남의 하롱베이와 비슷해 보이기도 하다. (물론 거긴 안 가봤다.)
저 아래에는 여전히 셔틀버스가 쉴 새 없이 돌고 돌아 산을 오르고 있다.
전망대에 다시 가보면 어떨까-싶어서 다시 올라가려 하니 저 멀리서 가이드가 소리를 지르며 뭐라 그런다.
뭐라 하는지는 못 알아 들어도 대충 오지 말라는 것으로 짐작된다.
왜 못 가냐고, 나는 전망대 가고 싶다고 말하니까 대충 손으로 원을 그리며 one-way라고 한다.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라고 한다. 진작 알아보고 올걸.
일방통행이면 뭐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다시 빠져나가던가 해야 한다.
그렇게 마추픽추를 빠져나와 A와 만나서 다시 들어가 볼지 생각을 하는데
사실 피곤하기도 하고, 다시 들어가면 또 그 먼 길을 돌아 나와야 된다고 생각하니 힘이 빠진다.
사진 실컷 찍기도 했고, 그냥 쉬다가 내려가자고 입을 맞춘다.
셔틀버스 대기 의자에 앉아서 쉬고 있는데, 아까 아침에 걸어 올라온 남자 두 명은 셔틀버스를 타고 내려간다. 버스를 타는 것도 돈이 만만치 않게 드는데, 투어사에서 제공해주는 티켓은 하나뿐이다. 보통 나처럼 버스를 타고 올라와서 걸어 내려가는데, 그들은 걸어 올라왔으니 지금 버스를 타고 내려가는가 보다.
한 시간 반 정도 걸리는 거리라고 하길래 내려가는 길이기도 하고 힘들 것 같지는 않았는데, 그건 또 아니다.
내려가는 길이 예쁘고, 경치도 좋다고 들었는데 누가 그랬는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전해주고 싶다.
나무와 풀에 가려서 경치는 하나도 보이지 않고, 돌계단의 연속이다.
그래도 어느 정도 트레킹에 익숙해진 탓일까, 금방 내려올 수 있었다.
투어사 숙소에 다시 들어간다.
기차 시간까지 남은 시간을 쉬려는데 하나 둘 뒤따라 내려오던 투어 인원들도 숙소로 도착한다.
대충 씻고 옷도 갈아입고 소파에서 쉬는데 분위기가 어색해 죽을 것 같다.
우리와 같이 투어 하던 팀은 우리를 제외하고 7명 정도 더 있는데, 나이 때도 다양하고 남자 두 명에 여자 다섯이다. 그중에서 나이가 가장 많아 보이는 여자가 내 또래의 남자애들(아까 걸어서 올라온 녀석들)에게
"미국도 안 가봤으면서 트래블러(Traveler, 여행자)야?"
라며 장난 삼아 말한다. 아마 그 친구의 SNS 글을 보고 하는 소리 같다.
자기는 나이 먹고 이제 남미에 왔으면서, 그 친구들은 본인보다 몇 년 먼저 온 건데 그런 소리를 하니 웃기긴 하다. 이게 말로만 듣던 '여행 꼰대'인 건가.
아구아스 깔리엔테스에서 다시 쿠스코로 돌아가는 기차역
잉카 레일을 타기 위해 역에서 기다리다, 와이파이를 쓸 수 있을까 싶어서 안내 데스크로 향한다.
아쉽게도 열차 종류가 달라서 쓰지 못한다고 답변을 하는 직원이 우리 보고 한국에서 왔냐고 물어본다.
동양인은 대충 중국인 한국인 일본인, 셋 중 하나일 확률이 높기 때문에 한국인인 것을 알아보는 것까지는 별로 놀랍지 않았다. 하지만 거기서 자기가 K-POP을 좋아한다고 하며 요즘 한국 드라마를 즐겨 본다고 말한다.
사실 요즘 케이팝이 세계적으로 유행한다고 티비에서 떠들어대던 것을 그저 국뽕의 일부라고 취급하기 일수였는데, 이렇게 직접 지구 반대편의 현지인이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말을 꺼낸 것을 보면 새삼 실감이 나긴 한다.
한국 여자와 북한 군인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를 본다고 하는데 사실 당시만 해도 나와 A는 무슨 드라마인지 알지 못했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서야 그게 '사랑의 불시착'이었던 것을 깨달았다.
오얀따이땀보에 도착하니 우유니 투어를 같이 했던 캐나다 유학생 커플을 또 만난다.
남미에서 여행 방향이 같으면 만나고 또 만나고 하는 모양이다. 우연히 이렇게 만나는 걸 보니......
쿠스코로 돌아오는 길은 비포장도로라 너무 흔들리기도 했고, 잠을 제대로 자지는 못한다.
피곤하지만 눈을 뜬 채로 멍하니 돌아온다.
다른 투어 일행들은 남미 여행의 끝자락인 나와 달리 이제 막 남미 여행을 시작하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돌아오는 길의 페루 시골 풍경을 사진도 찍고 감탄사도 자아낸다.
나에게는 이제 그저 그런 익숙한 풍경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 같다.
이래서 여행도 오래 하면 감흥이 줄어든다고 하는가 보다.
쿠스코 진입로는 바이킹을 방불케 한다.
경사가 너무 급해서 브레이크 밟은 발에 힘을 조금 풀어버리면 그대로 굴러 떨어질 것만 같다.
어떻게 이런 곳에 신호등도 없이 운전이 가능하고 사고가 나지 않는지, 볼리비아에서부터 느낀 것이지만 참 운전들 잘한다.
이렇게 남미에서 내가 고대하던 모든 것들을 마추픽추를 끝으로 전부 다 돌아보게 되었다.
마추픽추, 한 번은 열심히 가 볼만하지만 두 번은 가기 어렵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가끔 한다.
왜냐면 가기까지 그 험난한 일정뿐만 아니라, 투입되는 시간과 돈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기에......
그래도 아직 가보지 않았다면?
본인이 마추픽추에 대한 염원이 있다면, 시간과 돈을 투자해서라도 직접 보는 것이 그 불가사의한 신비로움을 직접 느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