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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꼴레오네 Mar 14. 2021

성스러운 계곡을 거쳐

마추픽추로 가는 길, 쿠스코

성스러운 계곡 + 마추픽추 1박 2일 투어를 위해 이른 아침 쿠스코 아르마스 광장으로 나선다.

한국에서 밤낮이 바뀐 채 살아도, 여행만 오면 아침 새가 되어버리는 마법

스스로 비행기 값이 아까워서-라고 생각한다.


같은 날, 투어를 출발하는 한국인 여럿이 보인다.

어제 곱창집에서 만난 한국인도 보인다. 비가 내리는 듯 내리지 않는 우중충한 날씨에 걱정이 앞선다.

이내 직원이 내려오더니 어딘가로 전화를 한다. 그리고 저 멀리서 승용차 한 대가 우리에게 온다.

택시처럼 보이는 차에 A와 둘이 탑승하고 그대로 차는 출발한다. 이게 투어 차량이구나.


가는 길은 가깝지 않아 지루할 뻔했다.

A와 둘이 한국어로 지루함을 열심히 달래다가 가끔 가이드(?)인 아저씨가 스페인말로 말을 건다.

뭐라는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지만, 스페인어를 조금 할 줄 아는 A가 몇 마디 해석을 해준다.

'아 그렇구나......'


차로 달리고 달려도 지도를 보니 아직 한참이나 남았다.

마추픽추로 가는 길은 험난해서, 가는 방법도 굉장히 다양한데, 나는 그 모든 경우의 수를 알아보기도 사실 귀찮았고, 가장 편하게 가는 방법 중 하나인 투어사 이용을 선택한 것이다.

경로를 알아보고 예약을 하고 시간을 맞추는 수고를 덜었다는 점에서는 매우 만족스러운 일정이다.


성스러운 계곡은 친체로 마을+모라이+살리네라스+오얀따이땀보를 모두 포함한다.

왜 성스러운지는 굳이 궁금하지 않았다. 다만, 옆에 계곡이 흐르고 있는걸 보아, 계곡을 따라 늘어진 이런 유적지의 의미를 담지 않았을까-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페루의 아주 시골 마을로 향하는 느낌이 강하다.

가는 길에 보이는 건물은 하나 없고, 간혹 말이나 알파카 따위의 가축만 보일 뿐이다.

나라마다 자라는 식물이 참 다양한데, 이곳에서 야생 알로에가 자라는 걸 보는 것 또한 흥미로운 경험이다.



친체로 마을에 가기 전에 전통 방식으로 알파카 털을 뽑는 것을 보러 어떤 관광지에 들린다.

우리나라에서 전통 한지 제조하는 걸 보여주는 그런 곳과 비슷하지 않을까.

실제로 알파카 털을 뽑아서 천연 재료로 염색하고, 일일이 수작업을 통해 제품을 만드는 과정이 마냥 놀랍다.


알파카 털 수작업 공예


바로 옆에 당연하듯 알파카 제품을 팔고 있는데, 쿠스코 시장보다 가격이 훨씬 비싸서 그냥 구경만 하고 나온다.

그래도 수작업이라 그런지, 공장에서 찍어낸 것에 비해 부드러운 정도는 따라올 수 없을 정도다.

이곳 제품을 두르고 다닌다면, 추운 겨울에도 포근하게 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촉감을 통해 전해진다.


친체로에서는 바닥에 노점상 마냥 기념품과 알파카 제품을 늘여놓고 팔고 있다.

확실히 수공예 제품보다 가격도 저렴하고 제품도 다양하다.

1박 2일 여정에 우유니에서 입던 폰초를 들고 올 수는 없어서 이곳에서 하나 사서 가려했는데, 고민하던 중 결국 알파카 니트를 하나 사기로 한다. 흰색 니트인데 알파카도 그려져 있고, 꽤나 괜찮아 보여서 30 솔에 흥정을 약간 해서 산다. 이왕이면 한국까지도 입을 수 있는 무언가를 사고 싶었다.


친체로 마을의 거리
마추픽추 미리 보기 버전의 친체로 마을


친체로를 떠나 모라이로 이동하기 전에 점심을 먹으러 어느 외딴 식당에 들린다.

이게 투어사와 계약이 되어 있는 건지, 식당은 엄청 큰데 가격은 비싸고 손님이라곤 우리 둘 뿐이다.

이곳 말고는 무언가를 먹을 수 있는 곳이 없다는 가이드의 말에 고민을 해보지만, 결국 우리의 도착지인 아구아스 깔리엔테스로 가는 길이 한참 남은 것을 생각하면 뭐라도 먹는 것이 좋겠다고 결론짓는다.

물론 나의 결론이다. A는 못마땅해서 안 먹고 싶은 눈치지만, 내가 먹자니 먹어준다. 고맙다.


모라이는 아무런 감흥이 없던 곳이다. 이곳이 도대체 뭐하는 곳인지도 밝혀진 것이 없고 이게 뭘 보여주려는 건지도 몰랐다. 하지만 막상 실제로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큰 모습에 놀라움을 감추기 어렵다.

계단 하나가 성인 남성 가슴 높이까지 올라온다

모라이에 도착하니 갑자기 비가 쏟아진다.

우비를 입고 나갔는데, 수엽이 덥수룩한 네덜란드 여행객이 보인다.

유럽인하면 또 축구. 반 페르시를 좋아한다는 나의 말에, 자기는 아약스 팬인데 라이벌 팀의 선수라며 안 좋아한다고 말한다. 아차......

하이네켄을 좋아한다는 나의 말에, 나중에 쿠스코에서 만나면 하이네켄 한 잔 하자고 말을 건네며 유유히 길을 떠난다.


비는 계속 와서 살리네라스로 가는 길이 부분 부분 잠겨있다.

당연히 비포장 도로인 이곳 인프라인데, 비가 조금 온 거 비해서 심각하게 길이 잠겨있다.

차바퀴가 거의 잠겼는데 가이드는 알아서 잘 운전한다. 정말이지 베스트 드라이버다.

이곳은 꼬부랑 길이 참 많은데, 코너에 거울도 없어서 코너를 돌기 전에 미리 클락션을 울린다.

반대편에서 오는 차에게 신호를 보내는 것으로 보이는데, 시설이 안 좋으면 알아서 다 적응을 하고 나름대로의 규칙을 만들어 살아가는 것 같다.




요즘 마추픽추를 찾는 여행객들 중에 성스러운 계곡에 흥미를 가진 여행객들은 잘 없는 듯하다. 다들 이곳은 패스하고 마추픽추만 보고 떠나곤 하는 추세다.

그럼에도 내가 성스러운 계곡을 가고 싶었던 이유는 바로 '살리네라스'를 보기 위함이다. 계단식 염전으로 볼 수 있는 살리네라스는 그 규모도 굉장히 크고 사진으로 보기에 매력적인 곳임이 틀림없었다.


살리네라스로 가는 길에 잠시 길가에 차를 세운 가이드의 말에 내려보니, 산 중턱에서 살리네라스가 한눈에 보인다. 마치 벌집과 같다.



살리네라스

아쉽게도 살리네라스 안까지는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놓았다.

살리네라스를 깊숙이 둘러보고 싶었는데 아쉬운 마음이다. 지금은 남미의 우기라 물이 가득 차있어서 이런 황톳빛이지만, 이게 건기인 겨울이 되면 물이 말라서 하얗게 변한다고 한다. 내가 상상한 살리네라스 또한 하얀색이었다. 언젠간 하얀 살리네라스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니, 건기의 우유니와 더불어 겨울에 다시 찾으면 괜찮을 것 같다고도 생각한다.


살리네라스

택시 투어(?)의 최종 종착지인 오얀따이땀보로 가는 길에 유명하다는 캡슐 호텔을 본다.

사실 나는 그런 게 있는 줄도 몰랐는데, A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니 실제로 절벽에 커다란 캡슐이 설치되어 있다. 나중에 찾아보니 유명한 캡슐 호텔이라 하고 실제로 시설도 꽤 괜찮은 듯했다. 절벽에서 자는 기분은 어떨지, 조식까지 준다고 하니 얼마나 비쌀지도 궁금해진다.


오얀따이땀보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구경을 포기하고 곧장 잉카 레일 역으로 향한다.

사실 나뿐만 아니라 A도 체력이 바닥인 모양새이고, 오얀따이땀보에서 무언가를 보고자 하는 계획이 없기도 했다. 나중에 혼자 길을 나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엄청 높은 곳을 사람들이 열심히 올라가고 있었다. 저곳에 올라가면 무엇이 나오는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너무 가는 길이 험난해서 그냥 오르는 사람들만 구경하다 다시 돌아온다. 이곳에서 호스텔이 굉장히 많았는데, 내가 투어를 하지 않았다면 나도 이곳에 하루 묶었진 않을까-생각해본다.


잉카 레일 기차역 로비는 매우 훌륭하다.

남미 답지 않게 화장실도 무료이고, 카페처럼 인테리어도 깔끔하고 커피나 마테차 등 음료 시설도 잘 갖추어져 있다. 지친 몸을 이곳에서 달래며 쉬다가 잉카 레일을 타러 이동한다.


잉카 레일의 겉모습, 그리고 내부 모습

옛날에 남미 기행문을 읽으면서, 잉카 레일이 비싸서 걸어갔다는 많은 사람들의 후기를 보며, 당시에는 나도 잉카 레일은 못 타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결국 나는 잉카 레일에 탑승한다.


내가 타본 기차 중에 제일 고급스러운 기차가 아닐까.

역무원이 가는 길에 간단한 간식과 음료도 제공해준다. 좌석도 넓고 탁자도 있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 숲 속을 지나니, 마추픽추의 최종 관문인 마을, 아구아스 깔리엔테스에 도착한다.


잉카 레일에서 제공하는 간식과 커피


도착하니 또 비가 내린다.

슬슬 내일 마추픽추를 못 보는 것은 아닌지 염려스럽다.

급하게 우비를 꺼내 입고 나오니 역 앞에서 투어사 직원이 우리를 기다린다.

같은 잉카 레일을 탄 모든 한국인들이 그 투어사 직원을 따라서 같은 호텔로 이동한다.


저녁을 먹으려는데, 이곳 물가가 상당히 비싸다는 얘기를 소문으로 많이 들어서 싼 곳을 찾아 헤맨다.

그리 크지 않은 마을인데 식당과 상점, 호텔이 즐비하게 늘어져있다.

전에 만난 제주도 형님이 아구아스 깔리엔테스를 두고 그런 말씀을 하셨다.

"전 세계인들 돈 빨아먹는 마을". 딱 그 말이 실감 나는 순간이다.


결국 중국 음식을 겸하는 치킨집을 찾았는데, 볶음밥도 엄청 많이 주고 삼계탕 국물도 주고 간장 수육도 엄청 맛이 좋다. 결국 양이 너무 많아 다 먹지는 못하고, 감자튀김이랑 소시지를 포장해서 숙소로 향한다.

비 내리는 아구아스 깔리엔테스, 그리고 근사했던 저녁


여전히 비는 쏟아지고 있고, 마을을 관통하는 강물은 범람하기 직전으로 보인다.

숙소에서 천둥과 같은 소리가 들리길래 창문을 열어보니 빗소리는 아니고 강물 소리여서 안심하기도 한다.




식당에서 싸온 식은 감자튀김을 안주삼아 마추픽추 아래 마을에서 한국에서 들고 온 팩소주를 간단히 먹는다.

남미는 고산 지대가 많은데, 소주를 먹을 거면 그나마 지대가 낮은 마추픽추 마을에서 먹으라는 소문을 듣고 일부러 싸온 것이기도 하다. 


오늘 비가 왕창 내려도 제발 내일은 내리지 말라고 믿지도 않는 신에게 기도를 올린다. 마추픽추도 안개가 하도 많이 껴서 깔끔한 마추픽추를 구경하는 것이 별따기처럼 어렵기도 한데, 설상가상으로 오늘 비까지 내리니 불안한 마음을 애써 감추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렇게 쿠스코에서 먼 길을 달려 거대한 산으로 둘러싸인 이곳, 아구아스 깔리엔테스 (이름도 참 어렵다)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밤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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