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파카바나, 볼리비아
라파즈에 도착하자마자 코파카바나로 가는 버스 티켓을 구매했다.
남미의 버스 시스템은 버스 회사마다 시간과 가격이 모두 상이하고, 통합된 시간표가 없어서 일일이 버스 회사 창구를 돌아다니며 가격과 시간을 물어봐야 한다. 근데 웃긴 것은, 흥정이 가능하다는 것.
미리 끊어놓은 티켓 때문에 아침 일찍 터미널로 향한다.
민박집 사장님이 불러주신 창문을 테이프로 붙인 택시를 타고서 말이다.
A와 터미널에서 간단한 아침으로 샌드위치를 사 먹는다.
식탁에 앉아서 샌드위치를 먹고 있는데, 갑자기 피부가 까무잡잡하고 키는 작고 주름이 깊고 단단하게 파인 할머니 한 분이 표정 하나 없이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리고는 아무 말도 없이 손을 내미신다. 딱 봐도 돈을 달라는 상황. 라파즈에서 거지도 많이 보고, 구걸하는 사람도 많이 봤지만, 이렇게 대놓고 돈을 달라는 상황은 처음이고, 그래서 당황스럽다. 우리에게 위협을 가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런 모습에 그런 표정을 짓고 손을 내밀고 가만히 있는 것이 무섭기까지 하다. 눈을 마주치지 않고 있어도 1분 동안이나 그렇게 있다가 결국 유유히 떠나신다. 안타까운 마음도 드는 건 사실이다.
우리가 떠나려니 라파즈에 비가 내린다.
내가 떠나려니 비가 내리니 운이 좋게 느껴지는 기분. 비 내리는 라파즈도 나름 색다른 분위기를 연출한다. 창 밖으로 이제는 다시 올 수 없을 것만 같은 라파즈 길거리를 마지막으로 바라본다.
코파카바나까지는 버스로 4시간. 이곳에서 4시간이면 짧은 거리이긴 하다.
대신 버스가 불편하다. 의자는 수평이 맞지 않고 쿠션도 다 꺼져서 엉덩이가 아파온다. 잠을 자려는데 허리도 아프다. 도중에 호수를 건너야 하는 바람에 모두가 차에서 내린다.
버스에서 내려 따로 배 값으로 2볼을 낸다.
어차피 배를 타야 하는 것이면 버스값에 포함시켜도 되지 않나-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을 모두 보트에 태우고, 배는 따로 배 전용 배로 올라간다. 버스 전용 배가 있다면, 버스 안에서 다 같이 호수를 건너도 되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버스를 실은 배를 보니 그리 튼튼한 배는 아닌 듯하다. 저기에 모든 승객이 다 타고 있다면 금방 배가 가라앉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도대체 이런 시스템이 잘 굴러가는 것도 신기할 따름이다. 심지어 버스를 실을 배는 모터가 없다. 사람이 긴 막대기를 호수 땅바닥을 밀어서 배를 움직인다. 기가 막힌다. 100% 수동으로 움직이는 배였던 것이다.
보트에는 승객들로 북적이는데, 보아하니 이곳에서 아시아 인은 나와 A 뿐인 듯하다. 내려서 화장실에 가려는데, 여기서도 1볼을 받는다. 다 쓰러져가는 화장실이고 하루에 몇 명 다녀가지 않을 것 같은데 직원이 지키고 있긴 하다. 사람들이 자주 다녀가는 곳이라 그런지 이것저것 먹거리를 파는 사람들도 많다. 휴게소의 느낌이 물씬 풍긴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버스를 타고 달리니 결국 티티카카호의 도시, 코파카바나에 도착한다.
코파카바나에서 숙소를 찾아가는 길에 어느 한국인으로 보이는 여행객을 만난다.
혼자 여행을 오셨다는 H 누나다. 숙소 앞에 있는 알파카들을 구경하러 왔다는 그녀에게 길을 묻다가, 결국 같이 코파카바나 전망대에 오르기로 한다. 여행지에서 새로운 인연을 만나기는 참 쉽고, 함께 하기도 참 쉽다. 여행지에서는 모두가 모두에게 마음을 열어주는 듯하다. 특히 이곳 남미에서는 더더욱.
코파카바나의 호스텔은 조금 비싸지만, 나에게 1인실을 내준다.
따뜻한 물도 잘 나오고, 난로도 있고 개인 방 키도 따로 있다. 집을 떠나온 지 처음으로 1인실에서 혼자 자유로운 기분을 만끽한다. 숙소에서 티티카카호도 바로 보이고 바로 앞에 알파카까지 있으니 매우 만족스러운 숙소임에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곳, 코파카바나에서는 송어 요리가 유명하다. 이곳 말로 '트루차'라고 하는데, 모르고 들으면 차의 일종은 아닌가라고 생각할 법하다. 티티카카호 해변가(바다는 아니지만, 바다처럼 넓으니) 트루차를 파는 포장마차가 모여있다고 하여 그곳으로 향한다. A와 H 누나와 함께한다. 송어 한 마리를 요리해주는데 종류도 다양하고 20볼 밖에 하지 않는다. 포장마차에 앉아서 호숫가를 바라보는데, 구름이 낮게 깔린 건지 호숫가와 구름이 맞닿아 있는 모습이 경이롭다. 이곳이 얼마나 높은 곳인지 실감하게 해 준다. 마치 휴양지의 풍경과도 같다.
코파카바나에서 제일 높은 곳이면서 호숫가에 자리한 전망대로 올라가 본다. 고산지대라 그런지 오르는 길이 쉽지만은 않다. 실제로 그렇게 가파르거나 높이 올라갈 거리도 아닌데, 숨이 엄청 차다. 미련하게 샌들을 신고 온 내 탓을 해보지만 아무리 봐도 숨이 이렇게 가파른 것은 그런 시답지 않은 이유 때문은 아닌 듯하다. 조금 걷고 쉬고를 반복하는 것이 내 체력이 한순간에 이렇게 떨어질 수가 있나 싶은 걱정도 하지만, 결국 고산지대라 그런 것이라 생각하고 안도한다.
힘들게 올라가니 경치 하나는 기가 막힌다. 구름이 나를 따라오는지, 내가 구름을 몰고 가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우유니에 이어서 구름이 많이 껴있다. H 누나가 이곳 노을이 그렇게 이쁘다고 해서 늦은 시간에 올라온 것인데, 아쉽게 노을은 보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엄습한다. 전망대에도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사람들은 매일같이 이곳을 오르내릴 것이라고 생각하니 존경심이 든다. 마치 옛날에 태백산 중턱에서 어묵을 팔던 아주머니가 생각나는 풍경이다. 이곳은 기도를 드리는 곳인지 십자가도 많고 실제로 장사하시는 분들이 촛불 따위의 종교 물품도 파는 듯하다.
전망대가 높아서 그런지 바람도 많이 불고 기온이 떨어져 춥기도 하다. 호숫가에 요트가 조약돌처럼 박혀있는 것이 티티카카호의 특징인 것 같다. 요트 안에 사람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요트가 사람들을 태워서 옮겨주는 것인지 어떻게 호수 가운데 떠있는 요트로 이동하는지에 대해 서로 추측하다가 사진을 열심히 찍어본다. 아주 작은 마을이고 대중교통 따위 하나 없는 마을이지만, 전망대에서 바라보니 학교나 성당 그리고 축구장까지 있다.
일몰을 기다리지만 결국 해는 구름에 가려 사라질 때까지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결국 아쉬운 마음에 야경이라도 보다가 내려온다. 생각만큼 아름다운 풍경이 보이진 않았지만, 세상에서 가장 높은 호수인 이곳 티티카카는 그저 바라만 보고 있어도 마음이 안정되는 기분이다.
다음 날, 조식을 먹으려는데 말도 안 되게 비싸다. 근처에 먹을 곳도 없고, 배도 고파서 어쩔 수 없이 먹는다. 코파카바나 길거리에는 잡상인들이 되게 많다. 기념품도 많이 파는데, 액세서리 천국인 듯하다. 팔찌나 목걸이 그리고 귀걸이를 파는데 엄청 많이도 판다. 귀걸이를 많이 보긴 했지만, 이런 모양의 귀걸이는 처음 보기도 하고, 영롱한 돌을 조각해서 만든 귀걸이도 엄청 예뻐 보인다. 이전에 우유니에서 투어를 한 초등학교 교사 누나들이 괜히 이곳에서 한참 동안 귀걸이를 보고 다녔다고 한 게 아닌가 보다.
그러다가 비가 쏟아져서 가게 밑으로 들어가는데, 우유니에서와 마찬가지로 오렌지 주스를 파는 상인이 있다. 볼리비아는 아무래도 오렌지가 맛집이다. 우리나라에서 먹은 그 어느 생과일 주스보다 맛있다. 비도 오고 주스를 먹으면서 심심하기도 해서, 가게 아주머니 이름을 여쭤보고는 이름 그대로 한글로 써 드린다. 그걸 보고는 신기해하시더니 자기 남편 이름도 써달라고 하신다. 신기해하는 모습을 보니 괜히 내가 뿌듯한 기분이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이러고 잘도 놀 수 있다.
A와 코파카바나에서 마지막 식사를 한다. 이곳은 모든 식당에서 Happy Hour라는 특이한 이벤트를 하는데, 점심시간 이후, 두 시간 정도 칵테일을 1+1 행사를 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엄청 싼 가격에.
평소 남미 지역에 오면 꼭 먹어보고 싶은 칵테일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피스코 사워'.
피스코에 과즙과 계란 흰자를 넣어서 만든다는 피스코 사워는 페루에서 유명하지만, 페루로 가기 직전인 지금 볼리비아에서도 팔길래 먼저 맛을 보기로 한다. 약간 초록빛을 띠는 피스코 사워는 계란 흰자 때문인지 조금은 걸쭉한 질감이 들고, 칵테일답게 달달한 맛이 진하게 느껴진다. 칵테일 위에 거품이 잔뜩 끼어 독특한 형태를 띠기도 한다. 많이 먹으면 질릴 것 같은 맛이긴 하지만, 그래도 다른 지역에서는 팔지 않는 칵테일을 맛본다는 것에 의미가 있지 않을까.
또다시 초특급 프리미엄 버스를 탄다.
10시간이 넘는 시간. 여행이 갈수록 버스 최장 시간을 갱신하는 듯하다.
버스를 타기 전에 모든 승객이 한 명씩 직원에게 여권을 제시하고, 직원은 그 여권을 보고 하나하나 손으로 명부를 작성한다. 티켓만 끊고 별다른 확인 따위 하지 않는 우리나라와는 달라서 너무 답답하고 왜 이렇게 하나 싶은 생각이 계속이고 든다.
버스는 여전히 최고급이다. 그에 비해 가격은 워낙 싸다.
우리나라에서 우등 버스를 타도 편하게 간다고 생각했는데, 이곳은 차원이 다르다.
뒤로 완전히 눕혀지는 것이 기본이고, 화장실은 무조건 있다.
티비도 있는데 스페인어로 지껄여서 무슨 말인지 알아듣진 못하겠고, 와이파이도 된다는데 죽은 와이파이로 보인다. 그래도 이게 어딘가. 오늘도 호스텔처럼 편안하게 이동할 수 있겠구나.
얼마 가지 않아 버스가 멈춘다.
국경을 통과하기 위함이다. 여전히 심사소는 분리되어있고 줄은 길게 늘어서 있다.
이젠 그러려니 한다. 오히려 이게 당연한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
처음으로 걸어서 국경을 넘는다.
여태껏 모든 국경은 버스로 넘어왔는데, 이번에는 심사소 사이가 워낙 가까워서인지 바리케이드를 직접 열어주고 걸어서 건너야 한다. 색다른 기분임은 분명하다.
그렇게 나는 우유니와 라파즈 그리고 코파카바나를 거쳐 볼리비아를 빠져나온다.
더럽지만 매력적인 도시들.
이런 곳에서도 살아가는구나, 이렇게도 살아가는구나를 느끼면서 지나온 볼리비아.
들어올 때는 내가 여길 오는구나 싶고,
나갈 때는 내가 여길 다시 올 수 있을까 싶은 모든 남미의 도시들.
그렇게 마추픽추의 도시, 쿠스코로의 여정이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