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카, 와카치나, 페루
쿠스코에서 짧은 여정을 끝으로 A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서 홀로 버스 터미널로 향한다.
이곳 쿠스코도 버스 회사마다 터미널이 다른데, 우리나라처럼 통합해놓으면 참 좋겠다-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함께하던 모든 동행과 일정이 끝나고, 드디어 남미에 온 지 한 달이 다 되어갈 무렵, 나는 비로소 혼자가 된다.
막상 혼자가 되니 무섭기도 하고 걱정도 되면서 홀가분한 느낌.
그래, 나는 애초에 홀로 여행을 온 것이었지
이카로 가는 버스는 장장 17시간을 달려야 한다.
17 시간이라...... 미국에서 우리나라로 비행기로 가는 시간이 16시간 정도니, 대충 긴 시간은 맞지만 아직까지 체감되진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2시간만 넘어도 버스로 오래 걸린다고 생각하지만, 이곳 남미에서는 6시간 정도는 기본으로 가는 거리라 크게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막상 17시간이라는 숫자를 마주하니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다.
일부러 비싼 버스를 고른다. 17시간이면 야간 버스인데, 숙소 값을 투자한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밥도 버스 안에서 해결한다고 생각하니 비싼 버스 값이 그리 아깝게 느껴지지만은 않는다.
좌석은 매우 넓고, 승무원도 있다. 잘생긴 페루 승무원이 깔끔한 양복 차림으로 주는 간단한 차내식(?)은 겨우 허기만 채워줄 뿐이다.
눈을 떠보니 아침 9시, 잠을 자고 또 잤는데 아직도 도착하려면 시간이 남아있다.
결국 이카에 도착한 시간은 11시. 유심칩 데이터가 계속 터지지 않다가 이카 시내에 진입하니 드디어 터져서 단톡방에서 이카 버기 투어를 같이 할 사람을 구한다.
내리자마자 호객하는 여러 택시 중 하나를 골라 다시 와카치나로 향한다. 갈수록 건물은 적어지고 도로가에 모래가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 사막에 다가가는구나-라는 것을 실감하게 해 준다. 사막 도시라 그런가 예상대로 날은 덥고 태양은 뜨겁다. 점점 모래가 많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결국 사막 한가운데로 진입한다. 여기도 칠레 아타카마와 비슷하게 건물이 모두 낮고 벽이 두껍다.
호스텔에 간단하게 짐을 푼다. 이곳 호스텔은 사방이 뚫려있고 간혹 수영장이 있는 호스텔도 있다. 에어컨이 없는 대신 사방을 개방해주는 구조인가 보다. 사막 한가운데를 질주하는 버기 투어를 예약하기 위해 투어사로 향하는데 군대에서 입던 ROKA 티셔츠를 입을까 말까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입지 않기로 한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여자 한 명과 남자 한 명이 ROKA 티셔츠를 입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다시금 입지 않은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버기 투어를 예약하고 다시 호스텔로 돌아와 호스텔 식당에서 밥을 먹으려 하는데 멀리서 누군가가 부른다.
한국인이다. 투어도 한국인들끼리 예약하고 오는 마당인데, 여기서도 한국인이 나를 불러준다. 어딜 가나 한국인이 있다. 비슷한 또래 친구들인데, 버기 투어를 이미 여러 번 하신 모양이다. 요 며칠 상간 동안 계속 비가 내려 투어를 못하다가 이제 막 비가 그쳐서 다시 버기 투어를 한다고 하신다. 내가 오는 날에 마침 비가 그친다고 하니 날씨 운이 좋은 건가 의심하게 된다.
숙소에서 쉬다가 투어 전까지 맥주나 한 잔 할까 싶어 맥주를 찾으니 오늘은 페루의 선거날이라 술을 팔지 못한다고 한다. 아...... 말로만 듣던 선거날의 금주. 세계 몇몇 나라에서 그런 법이 존재한다고 듣기만 했는데, 실제로 경험해보니 색다르면서도 못마땅하다. 이런 무더운 사막 한가운데서 맥주를 못 마신다니......
종업원이 나에게 한국은 그런 법이 없냐고 물어본다.
없다고 말하면서 한국은 오히려 선거하고 그날 술 먹으면서 떠들어댄다고 얘기한다. 과장 섞은 말이지만, 그런 나의 말에 부럽다고 얘기하는 종업원.
사막의 인공 오아시스를 따라 한 바퀴 돌아 투어 집결 장소로 모인다.
여전히 한국인이 참 많다.
남미에서 나의 마지막 투어, 버기 투어의 시작이다.
가이드를 따라 줄줄이 사막 위로 이동한다. 발이 푹푹 빠져서 걷기도 힘들다. 차라리 맨발로 걷는 게 더 좋겠다-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어디서 버기카 젤 끝에 타는 것이 제일 재밌다는 소문을 듣고 맨 뒤에 탄다.
모래바람이 너무나도 많이 날릴 것 같아 마스크에 선글라스까지 착용한다. 나름 중무장이다.
사막 언덕을 오르고 내리는 버기카는 마치 놀이공원 놀이기구를 타는 듯 재밌다.
가이드가 종종 위험하지 않을 정도로 브레이크도 적절하게 밟아주며 도로도, 신호등도 없는 사막 한가운데를 질주하는 그 기분은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하다. 호불호가 많이 갈린다는 버기카인데, 나는 이 정도만 해도 타볼 법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더니 우리는 샌드 보딩이 시작되는 언덕에 도착한다.
사막의 언덕에 올라서니 저 먼 곳에 와카치나 마을이 보인다.
가이드가 샌드보드를 인당 하나씩 나눠준 다음, 양초를 부러뜨려 주고서 샌드 보드 아래에 칠하라고 한다.
마찰을 줄이려는 의도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칠하라니까 일단 열심히 칠한다.
곧이어 모래바람이 몰아친다.
아타카마에서 찌는 듯한 태양 아래에서 맞은 모래 바람도 기분이 참 나빴는데, 이곳 와카치나도 마찬가지다.
그나마 모래 바람을 막아본다고 마스크에 선글라스까지 썼지만, 얇은 모래는 마스크 틈 사이로, 선글라스 사이로 들어온다. 모래가 들어와서 나갈 곳이 없으니 마스크 안에 머무른다. 짜증 난다.
샌드 보드를 방패 삼아 모래를 막으니 그나마 낫다. 정말 사막은 살 곳은 못 되는 것 같다.
샌드 보드도 취향을 많이 탄다고 들었는데, 나는 매우 재밌었다. 물론 2번 밖에 태워주지 않았지만, 모래 위에서 보드를 탈 수 있는 일이 흔한 일은 아니니까.
샌드 보드는 생각보다 속도가 붙진 않는다.
금세 다리를 벌리라는 가이드의 말이 떠올라 다리를 벌려주니 금세 속도가 붙는다.
엎드려서 타는데, 눈 바로 앞에 갈라지는 모래가 예술이다. 중심이 흐트러지면 바로 넘어질 것 같아 신경을 곤두세운다. 생각보다 모래 언덕은 높았는지 한참을 내려가다 멈춘다.
남미에서 첨으로 혼자 남겨진 첫 도시, 와카치나에서 걱정도 조금 있었지만, 결국 내 주위에는 또다시 한국인들이 있다. 열심히 사진 찍어줄 누군가가 없어서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한국인들은 기본적으로 사진을 잘 찍는다는 사실은 참 다행인 것 같다.
버기카에 다시 탑승해서 해가 다 질 무렵에야 다시 와카치나에 도착한다.
2시간 동안 하는 투어인 줄 알았는데 한 시간 조금 넘게 돌다가 끝이 난다. 별 상관없다. 나도 피곤하다.
사막에 올라가서 하나 둘 불이 켜지는 와카치나 마을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싶어 누군가에게 부탁할 심정으로 열심히 다시 발이 빠지는 사막 언덕을 오른다.
그리고 잠시 멈추어 뒤를 돌아 와카치나 마을을 바라보고 있는데 누군가가 말을 건넨다.
"너 왜 여기에 있어?"
H 누나다. 아니 저 누나는 왜 여기 있지? 서로 놀란다.
아타카마에서 같이 우유니로 넘어오고, 쿠스코에서도 한 번 마주친 누나다. 한국인을 찾다가 날 발견했다고 하는데 반가운 마음에 또 열심히 서로 사진을 찍어준다. 같은 방향을 돌면 언젠간 마주친다. 국룰이다.
사막의 밤이 저물어간다.
약간은 차가운 듯 선선한 사막 바람을 맞아가며 호스텔 야외 테이블에서 점심때 먹고 남은 피자를 데워 먹는다. H 누나와 다음 행선지가 또 같은 바람에 리마에서 다시 만나기로 한다.
온몸의 모래를 씻어낸다. 한국까지도 따라간다는 무서운 사막의 모래를 열심히 씻어도 씻어도 계속 나온다. 진짜 한국까지 가면 어쩌지?
에어컨도 없는 와카치나의 호스텔에서 사막의 밤은 깊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