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 끝을 찌르는 향긋함을 누리기에도 우리의 4월은 짧기에
거짓말 같던 사월의 첫날이 왔을 때, 우리는 비로소 "때가 왔다"라고 깨닫는 것이다.
2년 전 봄 우연히 들른 충무로의 아주 낡은 포장마차에서 나는 쑥통사고를 당했다. 사장님 뭐가 맛있어요? 하니 쑥전을 내어주셨다. 가까이 다가가기도 전에 온몸을 휘감는 쑥 내음에 두 다리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사실 나는 딱히 쑥을 좋아하지 않았다. 쑥절편보다는 흰 절편이 좋고, 쑥 된장국보다는 달래 된장국이 좋았다. 쑥은 자기주장이 너무 강해서 음식의 맛을 해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인지 그날 먹었던 쑥전은 아주 조화롭고 아름다웠다. 적당히 공격적이면서 적절히 뒤로 물러설 줄도 아는 제법 우아한 태도였다. 쑥은 제철 재료라 먹고 싶을 때 언제든 먹을 수 없다는 점이 맛을 더 극적으로 만드는 것 같았다. 게다가 쑥 냄새가 내 몸에 가득 차면 봄이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기분에 잠시라도 취할 수가 있다.
쑥이라는 세계에 점점 빠져들 무렵 나는 또다시 우연히 도다리쑥국을 만나게 됐다. 박준 시인의 <운다고 달라지는 일을 아무것도 없겠지만>에서였다. 통영에서의 한 끼를 고민하던 시인은 “봄이었다면 이것저것 생각할 필요 없이 향 좋은 도다리쑥국을 먹었으리라”라고 했다. 통영까지 갈 여유가 없었던 나는 봄이 끝날 세라 서울의 한 식당에서 도다리쑥국을 먹었지만 너무 급하게 먹은 탓일까, 감동이 덜했다. 쑥전을 처음 먹었을 때만큼 쑥내음이 강렬하지도 않았고, 그냥 지리탕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결국 올해 봄 그렇게 노래를 부르던 도다리쑥국을 위해 통영에 갔다. 일정이 촉박했지만 오로지 도다리쑥국만을 위해 통영에 간 셈이다. 허영만의 <백반 기행>을 보며 열심히 공부까지 했다. 식객 선생의 ‘건반 같은 맛’이라는 표현이 봄바람처럼 내 마음을 설레게 했다. 결과는 과연, 숟가락으로 한 입을 뜨는 순간 <봄의 왈츠>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도다리쑥국을 거쳐, 올해도 놓치지 않고 쑥전을 먹었다. 이왕 제철음식 챙겨 먹는 거, ‘봄멸’이라 불리는 멸치회무침도 야무지게 챙겨 먹었다. 올해 여름, 가을, 겨울은 아무래도 좋은 일이 생길 것 같다.
어릴 적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마음처럼 나는 이제 봄을 기다린다. 왜인지 봄 가루가 간지럽혀 어수선하고 일렁일 때에 쑥전과 도다리쑥국으로 쑥~ 닦으면 마음이 사르르 석연해지니까. 그렇게 나는 돌이킬 수 없이 매년 봄이 오면 쑥으로 계절을 닦아내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박준 시인의 산문집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허영만의 <백반 기행> 통영 편을 보고 다시 올봄을 기다려보자. 그리고 그때 이곳들을 방문해 보자.
내가 쑥통사고를 당했던 충무로의 ‘마돈나 포차’, 궁극의 도다리쑥국을 만난 통영의 ‘팔도 식당’, 봄멸로 화려하게 봄을 장식한 서촌의 ‘동해 남부선’
잊혀 가던 브레이브 걸스가 '롤린'이란 곡으로 역주행을 하더니, 데뷔 1854일 만에 음악방송 1위를 차지했다. 일흔다섯이 된 윤여정은 오스카상을 받으며, 지금 가장 핫한 광고모델이 됐다. 지지난해 물렸던 폭망 코인은 얼마 전 두 배가 됐다. 아쉽게도 나 말고 친구가. 기다려도 오지 않았던 봄이 왔고, 재촉해도 피지 않았던 꽃도 피고 졌다. 존버는 승리한다는 말이 먼저 생각나지만 그 보단 모든 일엔 때가 있다고 말하고 싶다. 무작정 힘들게 존버하는 것보단 조금이나마 희망적인 말이니까.
가끔 '나 잘 살고 있나 타임'이 찾아오면, 놓쳐버린 지난 '때'를 후회하고, 쉽게 올 거 같지 않은 앞으로의 '때'에 조급해진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그때 좀 더 놀껄, 더 사랑할 껄, 더 열심히 할 껄, 카카오나 삼성전자 살 껄, 아니 비트코인 살 껄...' 껄껄껄. 어차피 그때로 돌아가도 하지 않았을 것을 후회하고, 잘 알지도 못하는 남의 인생과 잘 알고 있는 나의 인생을 비교하는 패배자가 된 거 같다. 아 참으로 야박하고 얄궂은 타이밍이여.
허나 너무 속상해하진 말자. 우리에겐 때를 어긴 적 없는 사계절이 있고, 그 계절에 맞춘 제철음식이 있으니까. 1년에 한 번씩 반드시 되돌아오는, 여기저기서 대놓고 지금이라고 말해주어 놓칠 리 없으며, 혹 놓치더라도 다음을 기약할 수 있는 아주 너그러운 존재들. 슬퍼할 시간에 일단 먹고 보자. 그것마저 놓치면 우리는 정말...ㅠㅠ
겨울을 지나고, 여름으로 가는 4월은 그야말로 제철의 향연이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사람의 눈빛까지 제철이 되는 시절인 것이다. 이런 봄날엔 꼭 쑥전을 먹었으면 좋겠다. 사실 3살 더 어릴 때만 해도 이건 굳이 먹지 않는 음식이었다. 위에서 똑같이 쑥전을 논하고 있는 후배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 후배랑 술에 취해 허름한 포차에 들르지 않았더라면, 주인아주머니가 낮에 쑥을 캐러 가지 않았더라면, 나는 다른 음식을 이야기하고 있었을 것이다. 살다 보니 나에게도 쑥전을 먹을 때가 온 것이다. 그러니 먹을 것이 넘쳐나도 일단 쑥전부터 먹자. 도다리에 향을 더하는 쑥 말고, 오로지 자신을 뽐내는 쑥전. 초콜릿도 아닌 것이 달콤 쌉싸름하고, 아마도 '봄'인 듯 한 날것의 풀향이 가득한 쑥전 말이다. 어떤 전이든 빼놓을 수 없는 막걸리도 함께 먹는 것은 성숙한 어른의 기본자세다.
제대로 된 꽃놀이는 올해도 하지 못했지만, 지금의 봄을 입 속 가득 담으며 드라마 '나빌레라'를 본다. 내용은 뭐 놓쳐버린 때를 후회하지 않고 날아오르는 어느 할아버지의 이야기다. 아주 식상하고, 실현 불가능한 예쁜 말로 도배된 드라마지만 가끔 그런 뻔함에 눈물을 흘리는 뻔한 어른이 되어버렸다. 실제로 1화부터 눈물 찔끔 콧물 훌쩍이었다. 아직 3화까지밖에 안 봐서 깊은 이야기는 할 수 없지만. 이 짧은 봄을 놓치지 않고, 긴 인생 아무 때나 날아오를 수 있게 쑥전과 나빌레라를 잇플릭스 했으면 하는 4월이다.
지나간 때는 영원히 후회로 남을 것이고, 앞으로의 때 역시 여전히 막막할 테지만. 좋은 것을 먹고 좋은 것을 보는 지금 이 때라도 아무 생각 없이 누리는 봄이었으면 좋겠다.
산에는 쑥이, 바다에는 쭈꾸미가. 충무로 쭈꾸미 불고기에서 꼭 한 입
사랑도 인생도 가진 거 없이 좀 쑥스러워도 빛날 수 있음을 알게 해 준 ‘메리대구공방전’
빛나지 않는 인생을 쑥스러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토닥여주는 ‘거북이는 의외로 빠르게 헤엄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