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음식을 먹고, 재밌는 것만 보기에도 짧은 우리의 3월을 위하여-
쏟아지는 햇살, 아직은 차갑게 두 뺨을 스치는 바람, 동그랗게 움트는 꽃봉오리… 인정사정 없이 봄이라는 계절이 우리를 향해 돌진하지만, 우리는 두 팔 벌려 푸르른 복수를 꿈꾼다.
날이 풀렸다. 덩달아 나도 풀렸다. 지난 여름부터 겨울까지 철저하게 지켜냈던 술과의 이별로부터, 나는 다시 풀어지고야 말았다.
봄이라고 하기에는 나뭇가지들이 앙상하지만 10도를 웃도는 1일 최고 기온과 ‘3월’이라는 말은 나를 괜스레 설레게 만들기 충분했기 때문이다. 일주일 중 3일은 여전히 추웠고, 종종의 퇴근길에는 코트 깃을 여며야 할 만큼 겨울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러나 꽉 다문 입 안에서 이를 다그닥 다그닥 부딪히는 한이 있더라도 패딩보다는 코트, 코트보다는 자켓을 입을 만큼 섣불리 봄을 맞고 싶은 마음이 넘치는 것이다. 설레발 치는 마음을 잠재우기 위해서 나는 술을 택한다. 술에게 호기롭게 이별을 고한 쪽은 나지만 자니? 하고 문자를 보내는 쪽도 항상 나다. 사랑이란 아쉬운 쪽이 질 수밖에 없는 노릇이니까.
영광스러웠던 과거를 떠올리며 정성스럽게 한땀 한땀 술자리를 만든다. 오늘 퇴근하고 키조개 샤브샤브 고? 2차는 가볍게 꼬치로 갈 거고 3차는 술국에 소주, 어때? 그렇게 저녁 7시, 우리는 노량진의 어느 남도 음식 전문점에서 접선하기로 한다. 하지만 우리는 퇴근이 내 멋대로 되지 않는 귀염둥이들이라 약속 시간에 모두 늦는다. 그렇게 8시 반이 되어서야 전원이 출석하게 됐다.
“한 잔 빠라삐리뽀~!” 기분 좋게 술잔을 부딪히는 순간, 한 명이 산통을 깬다. 정확히 90분 남았으니 숨도 쉬지 말고 들이키자면서..
아뿔싸! 우리의 치밀한 계획에 큰 오점이 있었다니... 코로나 시대가 창궐하고서 술과 이별하느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10시 이후 영업 금지”라는 변수를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나의 어리석음을 후회하기엔 시간이 너무 없다. 그렇게 10시라는 결승점을 향해 시간과 달리기 시합을 한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늘 승자는 시간이다. 이제 막 흥이 오르기 시작할 무렵, 저 멀리서 사장님이 다가와 말한다. “저희 곧 마감 시간입니다.”
패자들은 말이 많다. 갈 곳을 잃은 주정뱅이들은 결과에 승복하지 못하고 복수를 다짐한다. “코로나 이 고약한 새끼야!! 너만 없으면…” 애먼 하늘을 향해 소리를 친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두 시간만 더 준다면 딱 좋았을 텐데, 하며 주절거린다. 뭔가 대단한 꿍꿍이가 있는 것처럼 수상한 넷은 거친 숨을 몰아 쉬며 버스 정류장에 조신하게 서있다. “진짜 코로나 가만 안 둬…” 매서운 눈빛으로 버스 전광판을 노려보던 그들은 각자의 버스가 도착하자 절도 있는 인사와 함께 누구보다 빠르게 몸을 실어 가장 좋아하는 앞자리에 착석한다.
집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나는 코로나가 보기 좋게 망쳐 놓은 나의 음주 계획의 심폐소생술을 시작한다. 일종의 복수다. “코로나야 10시에 문 닫아봐라 내가 기어코 술 마시지, 멀쩡히 잠에 드나”하는 거다. 버스에서 내린 나는 비장하게 편의점을 향한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투명하게 푸른 병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간다. 냉장고 안에서 날 기다리고 있을 명란젓을 생각하면서 거침없이 푸른 병 하나를 쥐고 집에 들어간다. 명란젓을 꺼내 뜨겁게 달군 프라이팬에 돌돌 굴려 겉의 색이 변할 정도로 지져준다. 그릇에 담아내고, 얼음을 가득 담은 큰 유리컵에 푸른 병의 소주를 채워 조용히 방으로 간다. 왓챠를 틀어, “그래, 오늘은 참 멋진 하루였지” 하며 이윤기 감독의 <멋진 하루>를 본다.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3월의 가장 푸르고 치열한 복수다.
<멋진 하루>의 ‘병운’만큼이나 속없는 인간이 자꾸만 눈에 밟힌다면,
이옥섭 감독의 <연애다큐> 속 ‘교환’도 자꾸만 생각이 날 것.
약 20년 전 엄청난 복수맨이 있었다. '복수'라는 차갑고 무서운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는 친절한 간호사로 일하고 있지만, 세상에서 복수가 가장 쉬운 사람이었다. 복수를 위해 긴 인고의 시간을 보내거나, 인생 전부를 거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일상에서 쉽고 편하게 행해지는 것이 그의 복수였다. 그 남자의 이름은 바로 표인봉. '순풍산부인과'에서 마음 여린 간호사로 일하고 있는 표간호사다. 복수의 대상은 주로 오지명원장이었는데, 사진을 찍을 때 '김치'하자고 하면 '치즈'한다거나, '원샷!'을 외치면 반샷을 하는 식으로 정신적 데미지를 가했다. 물론, 상대방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그의 복수가 실패한 것은 아니다. 이유는 복수맨 표간호사의 만족도가 상당히 높았기 때문이다. 그래 복수가 뭐 별 거 있나, 하는 사람만 만족하면 됐지... 아니 오히려 좋지 뭐...
(간이 작은) 이복수도 출근과 동시에 표간호사식의 복수를 시작한다. 그보다 조금 악랄한 점이 있다면, 원장님만을 대상으로 삼았던 그와는 달리, 이복수는 상대를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회사 생활에 분노를 안겨주는 사람이라면 모두 복수의 대상이 된다. 표간호사에게 배운대로 맘에 들지 않는 사람은 일단 못본척하고, 눈이 마주치면 얼렁뚱땅 인사한다. 회의 시간에 진짜 웃긴 이야기를 해도 결코 웃어주지 않고, 어떤 의견엔 '그거 그렇게 하는 거 아닌데', '요즘 그거 안 먹히는데'라고 큰소리내어 속으로 말한다. (가끔은 밖으로도 말한다) 다 알아들었는데 못 알아 들은척, 알고 있으면서 모른척, 좋은데 안 좋은 척, 할 수 있는데 못하는 척은 기본이다. 기본적으로 먹을 것은 나누지 않고, 무엇이든 비밀에 부쳐 정보적 소외를 이끌어낸다. 당연히 상대방은 못 알아차릴 쫌생이같고 찐따같지만... 복수가 뭐 별 거 있나, 하는 사람만 만족하면 됐지... 아니 오히려 좋지 뭐...
회사생활은 계속 될 것이고, 이제 표간호사를 넘어선 남대문 이복수, 영어로는 LEE-벤지가 될 날을 기다리며, 시트콤 'how i met your mother' 시즌 1의 15화 그리고 시즌9의 15화를 본다.(대충 바니의 말도 안되는 엄청난 복수이야기). '복수는 식혀서 먹어야 맛있는 음식과 같다'라는 말을 기억하며, 시간을 들여 완성한 와인과, 물에 씻은 묵은지 그리고 숙성회를 먹는다. 하진 않았지만 성대한 복수를 끝내고 온 사람처럼 천천히 이 시간을 음미한다. TV나 소설을 통해 경험한 바로는 복수의 통쾌함은 짧고, 이어지는 허탈감과 씁쓸함은 더 길었다. 그 허탈감은 쫀득하다가 아삭하고, 담백하다가 상큼한 묵은지를 얹은 회로 채우고, 약간의 씁쓸함을 쌉쌀한 와인으로 씻어낼 수 있다.
사실 복수할 일 없이 그냥 맛있는 거나 먹고, 재밌는 거 보면서 사는 게 제일이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크게 상처받는 일 없이, 그래서 복수같은 건 하지 않고 살았으면 좋겠지만.. 진짜 O책임... 가만 안둬...
닭볶음탕에 묵은지를 더해서, 보다 칼칼한 닭볶음탕을
돼지 등갈비에 묵은지를 더해서, 아 이건 따로 설명 안 해도...
요즘은 김밥에 넣어 먹는 것도 굿굿굿!
... 복수의 칼을 가는 사람보다 어디에도 잘 어울리는 묵은지 같은 사람이 되자...
TV속 펼쳐지는 복수가 성에차지 않는다면, 오로라공주를
유쾌한 오피스 복수극이 필요하다면, 김과장을
됐고, 먹는 게 남는 거라는 말에 공감한다면 상사세끼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