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존레순 May 24. 2021

야근에 곁들이는 EATFLIX

고작 야근이라는 것이 우리를 방해할 수는 없으니까.. 5월에도 어김없이-


웰컴 투 야근 유니버스

구십년대 생. 여자. 삼 년 차 회사원의 EATFLIX.


어린 시절 나는 혼자서 상상에 자주 빠졌다. 부모님의 “TV 그만 보고 공부해!”라는 잔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눈을 꼭 감고 생각했다.

‘“제발 TV좀 봐! 공부는 그만해!”라고 하면 공부가 하고 싶을지도 몰라..’

잔소리 없이도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고등학생이 되자, 나는 말도 안 되는 유니버스를 만들었다. 거기선 공부가 오락이요, 오락이 공부였다. 서바이벌 예능 프로그램에 목숨을 거는 지금처럼 그때 역시도 과몰입이란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기에 나에게 그런 유니버스에 스며드는 일은 누워서 떡 먹기였다. 그렇게 <무한도전>과 <꽃미남 아롱사태>를 보는 일이 의무가 되자, <쎈수학>과 <자이스토리>를 푸는 일이 오락처럼 느껴졌다.


길 가던 아무나 붙잡고 하루 종일 사무실에 앉아 일할래, 아니면 볕 좋은 테라스에서 놀래? 라고 묻는다면 망설임 없이 모두가 후자를 택할 것이다.

난 이제 더 이상 잔소리로 움직이는 어린 아이가 아니기에, 아이러니하게도 유치한 청개구리 세계관 따위의 것이 어른스러워지기 위한 방법이 되기도 한다. 난 이제 음주가무도 즐길 줄 아는 어른이니까 야근을 음주로 치환해 본다. 그러니까 야근이 음주요, 음주가 야근이란 말씀.


사실 알콜이 가진 이성적인 판단을 흐리게 하는 능력에 있어서 야근 또한 출중한 면이 있다는 점에서 둘은 닮기도 했다. 야근에 취해 충동적으로 구매한 반스 운동화만 해도 족히 5켤레는 넘으니까.. 그렇게 술 취한 것처럼 야근 기운을 빌어 평상 시에 억눌렀던 충동을 깨우면 때때로 쾌락까지도 간다. 어딘가 변태처럼 들릴 수도 있고, 주객전도가 된 느낌이지만 이것이 내가 야근을 무리 없이 해내는 비법이다… 단, 그만큼 해장도 필수니까 아래에 추천하는 것들을 EATFLIX하며 숙취 없는 출근을 다짐해보자.



야근의 숙취를 해결해줄 해장 음식

야근으로 건조해진 마음에 기름칠해줄 이태원 매덕스 피자

3년 전에 먹었던 술까지 해장되는 서울역 금자네 생등심의 소고기무국

양념으로 얼룩진 흰 쌀 밥을 감싸줄 수 있는 단 한 장의 김처럼, 야근으로 얼룩진 내 마음까지 감싸주는 김갑생할머니김

 

때로는 야근에 곁들이기도 좋은 안주같은 해장 콘텐츠

아무 것도 하기 싫을 때, 유치한 청개구리 유니버스 형성에 어쩌면 도움이 될지도? <침착맨 이상형 월드컵>


출퇴근길까지 해장하고 싶다면, 어쩌면 인생 뮤지션과 인생 음반을 만나게 될지도? 8balltown의 <TOWN ON AIR>

이게 다 무슨 소용이냐, 술이나 먹고 싶을 때, 보기만 해도 어쩌면 취한 것 같은 기분을 느낄지도? <김사원세끼>



슬퍼도 사는 건 기쁨. 

팔십년대 생. 남자. 십일 년 차 회사원의 EATFLIX.



처음 회사원이 되었을 때, 야근을 하면 괜한 뿌듯함이 있었다. 아무것도 할 줄 몰랐던 나도 팀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된 거 같고(그것이 저녁을 사다 나르는 일이 전부였으나) 취준시절에 생각했던 바쁘고 열정적인 직장인이 된 거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요. 참 철이 없었죠? 이런 생각을 했다니... 철 없던 생각은 다 사라졌으나 야근의 잔재미는 남았다. 시켜먹는 야식, 의미없이 농담과 몰래 나누는 윗사람 험담 그리고 야근 후, 술에 취한 새벽같은 것들 말이다. 그리고 지금 52시간 제도 덕분에 많이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남아 가끔씩 우리를 괴롭히는 야근을 마주하면 아주 슬퍼진다. 예전의 열정도 체력도 없는 나는 그저 눈물을 흘리며 빨리 집에가기를 기다린다.


야근에는 보통 세가지 경우가 있다. 하나는 미루고 미루고 미루다 회의가 코 앞으로 다가와 여름방학 일기 쓰듯 하는 야근.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미루는 내가 한심해서 슬프다. 두 번째는 일이 정말 많아서, 내가 정한 것은 아니지만 지키지 않으면 큰 일 나는 데드라인을 앞에두고 하는 야근. 이때는 고향에 있는 엄마가 보고 싶어져서 슬퍼진다. 마지막은 해야 할 일은 딱히 없는데, 어쩔 수 없이 해야하는 야근이다. 주로 외부에서 오는 결과물을 기다리거나, 만약에 생길지도 모르는 만약을 위해 대기가 있다. 이럴 땐, 시간이 아까워서 슬프다. 이 시간을 아껴 매일 아침마다 오분씩 붙였으면 허겁지겁 버스타는 일은 없었을텐데.


애쓴다고 빨리 끝나지 않는 이 긴 밤. 더 이상 볼 SNS피드도 유튜브도 없고, 대놓고 영화를 볼 수도 없으니 '넘버 808'을 본다. 영원히 질리지 않을 콘텐츠 살 수 있는 '물건'이 있다. '넘버 080'은 당분간 갈 수 없는, 그래서 더 가고 싶은 하와이에 있는 편집샵이다. 괜히 여행지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작은 선물가게를 구경하는 기분으로 다가오는 여름에 입으면 좋을 누가봐도 '하와이에서 샀구나'할 법한 티셔츠도 보고, 바닷바람에 해진 것 같은 빈티지 옷과 소품도 보고, 누군가에게 선물해서 센스를 뽐내고 싶은 그릇도 보고, 쓸모는 좀 부족하나 사지 않으면 안 될 거 같은 굿즈들도 본다. 바쁨에 어지럽혀진 바탕화면이나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는 '최종 최종 최종 최종.pptx'류의 파일 대신 멋지고 아름다운 것들을 보면 결코 아름답지 않은 이 밤도 조금, 아주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하는 마음으로.

한 손에 올리브가 잔뜩 올라간 식은 피자를 먹으며, 언젠가 떠날 날을 상상하며 귀여운 선글라스 하나 장바구니에 담아둔다. 혹시나 내일도 야근하게 되면 사야지.


최선을 다해서 안하는 것이 최고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오면 멋지고 아름다운 것들을 보고 맛있는 것을 먹자. 그렇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지도 모르니까.


야근의 시작과 끝을 책임질 요깃거리

야근 전: 한 입 가득 풍성하고 풍성한 '진작 후토마끼'

야근 중: 올리브 두 번 추가한 '도미노 슈퍼슈프림피자'

야근 후: 지친 몸을 일으키는 '진주집 꼬리토막'

진주집은 코로나 전, 회사 주변 몇 안되는 24시간 영업하는 식당으로, PT전에 먹으면 승률에 도움이 되는 곳.



다음 달 월급까지 가져갈지도 모를 '눈'요깃거리

insta : not_only_pizza

색감 좋은 플라스틱 빈티지 소품을 보고 살 수 있다. 플라스틱도 빈티지니까 어쩌면 친환경일수도.


노말에이(normala.kr)

교보엔 없지만 누군가의 책상엔 있는 멋진 책과 스티커와 굿즈를 볼 수 있다.


포인트오브뷰(pointofview.kr)

아이디어가 잘 나올 거 같은 연필과 다양한 소품을 구경하고 살 수 있는 곳.



이 글은 대홍기획 블로그 5월호에 발행되었습니다

https://blog.daehong.com/304?category=749845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