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노트르담 성당을 생각하며
2019년 4월의 기록
by 바다에 내리는 눈 Oct 20. 2020
나이를 먹는다고 아는 게 더 늘어나는 것도 아니고, 아는 게 많아진다고 더 현명해지는 것도 아니며, 더 현명하다고 더 잘 사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나이를 먹어 경험치가 쌓이면서 '아니 그게 그런 거였어?!' 하는 아하, 순간 (Ah-ha moment)이 가끔 있다. 내가 대학교 때 개봉한 영화 '벅스 라이프'에선 잔디밭에 굴러 다니는 종이박스 같은 걸 좋다고 이고 지고 다니는 벌레가 나오는 귀여운 장면이 있었는데 나중에 미국 유학을 나와서 보니 그건 흔한 미국식 중국식당의 테이크아웃 용기였다. 그때만 해도 포춘쿠키나 종이 테이크아웃 용기를 본 적이 없어서 무심히 넘긴 장면이었지만 나중에 그게 중국집 테이크아웃 용기였던 걸 알고 더 귀엽다고 생각했다.
유럽 여행을 하다 보면 흔하게 보는 것이 성당이고 성당마다 있는 게 피에타인데 그 성스러움에 압도된 적도 있고 '음, 여기에도 또 있네'하고 넘긴 적도 있다. 그런데 아이를 키우면서 수유를 하다 보면 하루에도 몇 번씩 나는 피에타의 한 부분이 된다. 나와 가장 가까이 끌어안고 무릎 위에 올려야만 이 아이는 생명을 이어갈 수 있으니까 저절로 이 자세밖에는 취할 것이 없다. 꿀떡꿀떡 분유 넘어가는 소리를 들으며, 내 손을 꼭 잡고 만지작거려야 안정이 되는 녀석에게 한 손을 내주면서 어느새 품에서 삐죽삐죽 삐져나오는 길어진 팔다리를 가만히 본다. 안고 먹이는 그 순간의 하나 됨이 충만하기도 하고 영원한 것 같기도 하고 찰나 같기도 하여 서글프다. 한 30년 후에는 얼마큼 여기서 더 길어질까. 내 무릎에 이렇게 누워 있을 일이 있을까?
그러면서 그동안 보아 왔던 피에타 조각들을 떠올린다. 장성하여 내 품을 벗어나 이제 내가 그에게 기대고 싶은 믿음직한 아들이 핍박받고 죽어 피 흘리며 내 품으로 돌아왔을 때 마리아의 마음은 어떤 마음이었을지...... 신이자 인간인 아들을 둔 특별한 어머니 마리아도 그 순간만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죽은 나사렛 예수가 아닌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태어난 젖먹이를 안고 있는 순간처럼 느끼지 않았을까. '전지전능한 신의 가장 무기력한 마지막을 어머니로서 함께 하는 마리아의 모습이 동서고금 시대를 초월하여 감동을 준다'는 설명에 고개 끄덕이긴 했어도 이렇게까지 수시로 피에타를 떠올려 본 적은 아이 길러 보기 전까지 없었던 것 같다.
노트르담 성당을 덮친 화마에도 피에타는 살아남았다며 안도하는 것은 많은 이들이 피에타를 단순한 돌덩어리로 보지 않고 영혼과 영성이 깃든, 인류가 지켜야 할 예술로 느끼고 있다는 증거이자 예술이란 무엇인가 생각하는 계기가 된다. 폐허가 된 성당 안에서 홀로 한 줄기 빛을 받은 십자가 앞 피에타상의 사진은 인류가 어리석은 불길로 신을 욕되게 하여도 신은 티끌조차 그 존엄이 무너지지 않고 여기 거하는 것을 보여 준다. 모든 고통받는 이의 친구인 예수가 다시 사는 부활의 날이 왔듯이 노트르담 성당의 무너진 첨탑을 다시 세우고 결국은 인류가 힘을 합하여 가야 할 방향으로 역사를 재건하기를 기도한다. 우리의 여인, 우리의 역사. Notre Dame, notre histoi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