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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크리스마스 콘서트

2015년 12월의 기록

by 바다에 내리는 눈

American Church in Paris (ACP)는 1814년에 미국밖에 세워진 최초의 미국 교회이자 아직까지도 파리에 있는 유일한 미국 교회이다. 이 곳의 크리스마스 콘서트는 익숙한 캐럴 레퍼토리로 연말의 설레는 기분을 더해 주는 꽤 기대되는 행사인지라 몇 주전에 표를 사고 지인들까지 초대했다. 평상시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던 예배당은 11월의 큰 테러 때문에 큰 문을 막아 놓고 작은 문 앞에서 시큐리티 체크를 하는 바람에 들어가는 줄이 길었다. 공항 검색대처럼 분주하게 가방을 내려놓았다가 코트를 벗었다가 다시 입었다가 가방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는 가운데 갑자기 어떤 무슈가 손을 내밀며 말을 건다.


"당신들 표를 주시오."


아, 표 받는 사람인가 보구나 하고 우리는 표를 내밀고 그는 꾸깃꾸깃 말은 팸플릿을 건네준다. 왜 팸플릿을 구겨서 주지? 의아한 느낌은 있었지만 어쨌든 예배당 안으로 들어가려 하는데 입구의 안내자들이 우리를 잡아 세운다. 표를 달라고.


"저 신사분에게 이미 냈는데요?"


안내자들은 우리가 표 없이 들어가려는 줄 알고 당황하고 우리는 표를 이미 냈다고 주장하며 혼란스러운 가운데 표를 받은 남자는 우리와 눈이 마주치자 윙크까지 찡긋하며 말한다.


"It's OK, it's OK."


응? 뭐가 괜찮다는 거지? 표가 없어도 괜찮다는 거야? 당신이 받았잖아?


따져 묻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가운데 이런 상황이 처음인지 안내자들이 결국 우리를 그냥 들여보내 주었다. 우리는 교회 스태프들끼리 서로 손발이 안 맞은 상황인가 싶어 그냥 들어왔는데 가만히 곱씹어 볼수록 이상한 상황이었다. 혹시 그 사람...... 표를 못 구해서 우리 걸 가로채고는 스태프들에게는 '(표를 사야 하는 걸 모르는 관광객들인가 본데) 좀 봐주시지요, 괜찮아요' 이런 식으로 말한 것 아닐까. 즉 도둑은 생색 내고 우리는 도둑으로 몰렸지만 용서받은 상황이라고나 할까.


결국 나가서 다시 안내자들과 이야기해 보니 역시 내 예감대로 우리 표를 들고 사라져 버린 그 사람, 교회 스탭도 뭣도 아니고 표 받는 사람들은 자기들뿐이란다. 교회라는 특성상 표를 팔긴 하지만 모두 선의를 갖고 행동하겠지, 라는 가정 하에 허술하게 운영되는 점을 악용한 사람이 표를 가로챌 쉬운 목표물을 물색하던 중 역시나 동양인이라 뜨내기에 물정 모르는 것처럼 보이는 우리가 당첨된 거다. 대단한 오케스트라의 콘서트도 아니고 기껏해야 교회의 크리스마스 콘서트일 뿐인데 이렇게까지 해서 들어와야 할 이유가 있을까? 있다면 그런 사람은 유년부 합창 순서에 사진 찍으러 온 부모들 뿐이다. 만약 정말 교인이자 학부형이면서 우리에게 이런 짓을 한 거라면...... 그것은 예수의 탄생을 기뻐 노래하는 이 자리와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악한 행동이 아닌가. 하긴 예수의 마지막 만찬에도 그를 팔아넘긴 가룟 유다가 끼어 있었다.


파리에서 시내 나들이를 할 때마다 종종 아니 거의 매일 내가 아시안이라는 이유로 관광객인 줄 알고 나에게 무슨 서명운동을 한다며 싸인해 달라고 접근하는 집시, 전철역에서 표 살 때 카드를 훔치려는 소매치기, 덤터기를 씌우는 레스토랑 서버들을 만나는데 교회에서만은 궁지에 몰린 쥐처럼 날 서 있지 않아도 되니 좋았다. 다가오는 모든 이를 잠재적 사기꾼으로 보고 언제라도 화내고 피할 준비를 하는 내가 싫어서 그냥 호의를 가지고 남을 바라보는 나로 돌아올 수 있는 이 안전한 공간이 좋았는데 여기서도 나는 역시나 이방인에 속여 먹을 대상인 것인가? 이런 생각이 들어 크리스마스 콘서트 중반까지도 은혜받기는커녕 분노가 나를 덮쳐 왔다.


비단 파리에서만은 아니다. 미국에서 학교를 다닐 때는 캠퍼스 타운 안에만 주로 있으니 이런 불쾌한 경험이 적었지만 공항이나 관광지에선 나의 이방인 됨이 도드라지기에 무지에서 비롯된 친절이 주는 불쾌함이 있었다. 난 국내선을 타고 학회를 다녀왔을 뿐인데 서른 넘은 나에게 "Welcome to America, Kid!"라며 반기던 시카고 오헤어 공항 직원, 웃음을 가득 머금고 "니하오"라며 인사하는 미술관 직원 등. 이런 사소한 차별의 현장에서 적극적으로 그들을 교정하지 않고 넘어가는 나를 미국인 친구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패배주의가 학습된 수동적인 내 태도가 오히려 인종차별을 방조하는 것 아니냐며...... 그녀의 지적이 맞긴 하지만 그때마다 얼굴 붉히고 그들과 맞서느니 내가 불쾌하고 넘어가자, 라는 태도가 다년간의 경험으로 학습되기까지 내가 한 번도 교정 노력을 안 해 봤을까. 해 봤는데 더 힘들어서 포기한 것임을 그녀는 이해할 수 없겠지. 그런데 파리에선 '캠퍼스 타운'같은 안전지대가 내게 없는 것이다. 어딜 가나 '공항'이고 '관광지'와 같은 거다. 이제는 교회에서조차. 이런 에피소드를 다 기억하면 불평쟁이가 되어 버리는 것 같아 천성적으로 투사가 되지 못하는 나는 그냥 참곤 하는데 오늘은 정말 슬펐다.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본능적으로 알아보는 이 사냥터에서 역시 예상대로 손쉬운 먹잇감이 된 내가 한심하고, 악한 사람 때문에 왜 내가 나를 한심하게 여겨야 하는지 모르겠고, 또 분노와 미움 같은 1차원적인 감정에 지배되는 나 자신이 싫다.


"It's OK, it's OK."


헛. 표를 훔친 죄인 주제에 감히 나를 용서해? 네가 감히 나를 성스러운 곳에 들어가라 허락해? 누가 누굴 인정해? 괜찮다는 그 말은 네가 나에게 잘못했다 고백하고 표를 돌려주면 내가 해야 할 말이 아니야?


나를 죄인 취급하는 죄인의 용서에 이토록 부들거리며 화가 나는 이유는 아직도 내가 교만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나에겐 예수가 씻어낼 죄가 없다는 교만, 공정한 자아에 대한 허상, 그리고 습관이 된 피해의식. 크리스마스의 의미는 아기 예수의 탄생으로 축제가 시작되는 것에 있는 줄 알았는데 나의 죄를 엉뚱한 타인이 사해 주는 것에 있는 줄 몰랐다. 캐럴을 듣고 오리고기 식당에 가서 흥청망청 와인을 마시고 푸아그라 요리를 먹으며 크리스마스 시즌을 기념하려 했던 내 계획은 무너지고 나는 계속 죄인에게 위로받고 있었다. 그가 한 말을 되뇌며.


It's OK, it's OK.


FB_IMG_1603775787845.jpg ACP 크리스마스 콘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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