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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젤] 카니발 (파스나흐트)

2020년 2월의 기록

by 바다에 내리는 눈

올해 3월 2일부터 5일은 바젤 최대의 축제 카니발, 독어로는 파스나흐트 (Fasnacht)가 열리기로 되어 있었다. 놀거리 없는 심심한 나라 스위스 각지에서 이 축제를 찾아 기차 타고 올 정도로 대단한 축제라는데 나에게는 이 축제 때문에 아이 어린이집이 문을 닫아 육아의 짐이 늘어나는 그런 날에 불과하다. 시끄럽고 사람 많고 번화가 지나갈 때 눈치 안 보이려면 축제 배지 사야 하고 (이 배지를 안 달고 지나가면 심술궂은 가면 쓴 사람들이 장난으로 종이꽃가루 같은 걸 뿌리면서 배지를 사라고 종용할 수도 있다) 배지는 당연히 비싸고 때로는 무차별적인 풍자를 하는 전통 때문에 인종차별적인 메시지의 인형 같은 게 강물에 둥둥 떠다니기도 하고 여하튼 불쾌한 행사라고 생각하며 바젤에서 3년을 살아왔다. 평소 그렇게 규율을 잘 지키고 재활용 종이 상자 하나 버릴 때도 판판히 펴서 차곡차곡 쌓고 규격 노끈을 사용하여 묶어서 배출하는 스위스에서 이때만 되면 길거리에 술병이 나뒹굴고 종이꽃가루를 하도 뿌려대서 몇 달을 치워도 꽃가루가 젖은 낙엽처럼 초라하게 땅바닥에 달라붙어 있는 걸 보며, '너무 억누르면 결국 폭발하는구나...... 이 사람들도 1년에 며칠은 풀어져야 하나 보다'라고 짐작만 할 뿐.


그런데 얼마 전 축제 때 뿌리는 종이꽃가루가 시에서나 축제 주최 측에서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백화점에서 돈 주고 사는 거라는 걸 알게 되고 깜짝 놀랐다. 공중에 뿌려대는 종이꽃가루가 사는 거였다니! 게다가 한 봉지에 7.5프랑 (거의 만원)? 그거 한 봉지 뿌려 봤자 몇 분 뿌리지도 못하고 간에 기별도 안 가니 하룻밤에 몇 봉지는 뿌릴 텐데...... 코미디언 장동민이 대학 축제 때 불꽃놀이를 보고 '여러분의 등록금이 지금 하늘에서 펑펑 터지고 있습니다! 부모님이 뼈 빠지게 번 돈이 하늘에서 펑펑 터지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는 것처럼 나 역시 이 사실을 알고 처음 들었던 생각은 '아. 깝. 다.'



난 어느새 이런 어른이 되어 버린 걸까. 어렸을 때 본 티브이 오락 프로그램에서 한 코미디언이 등장할 때 환영한다고 문 양 옆으로 치어리더들이 도열해서 꽃가루를 날려 주니 그니가 눈살 찌푸리며 '이런 거 하지 마, 다 낭비야'라고 했던 게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아마도 그 코미디언은 미니멀리즘 사고방식을 미리 깨우친 듯 그 당시에 필요 이상으로 화려한 등장을 위해 낭비되는 자원에 대한 안타까움이 앞서 그렇게 표현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어린 나에겐 그 말이 좀 차갑고 빡빡하게 들렸다. '환영해 준 치어리더들 무안하겠다, 그 사람들도 시켜서 하는 일인데 머쓱하게 왜 저렇게 말했을까, 꽃가루 같은 무대 장치와 소품 없이 무미건조한 세트에서 오락 프로를 진행하면 재미없을 텐데.' 이런 의문이 들었던 어린 나. 그때 이미 환영하기 위해 뿌려지는 꽃가루는 낭비가 아니라 삶의 재미이자 의미일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 어쩌다 그걸 잊어버리고 재미없는 어른이 되었을까.


성경에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을 환영하기 위해 예수의 발에 부어 버린 여인이 나온다. 그 향유는 당시 노동자 1년 연봉에 해당하는 가격이었다고 하니 실로 엄청나게 비싼 것이었다. 향이 진동하여 그 장소를 가득 채우고 사람들은 여인을 비난한다. 그걸 팔아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을 먹일 수 있는데 이렇게 부어 버리느냐고...... 이때 예수는 향유가 낭비된 것이 아니라며 여인을 비호한다. 예수도 그녀를 비난하지 않을진대 하물며 인간이 종교나 철학의 이름으로 그녀를 비난할 수 있을까.


먹고사는 문제가 중요하지만 우리는 재미와 추억을 위해 살기도 하는 존재다. 나이를 먹고 경험이 쌓이고 책 한 줄을 더 읽으면 더 현명해질 줄 알았는데 현명해지기는 커녕 이미 알고 있던 진리도 잊고 재미없는 어른이 되어 버린 것 같아 서글프다. 내가 잘못했소, 바젤 시민들이여. 이 축제를 마음껏 즐기시게나. 대신 아껴 뿌리기로 합시다. 7.5프랑으로 몇십 년이 지나도 남는 추억을 살 수 있다면 수지맞는 장사 같네.


그러나 이런 나의 정중한 사과가 무색하게 바젤 파스나흐트는 취소되고 말았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퍼질까 봐 우려한 시 당국에서 고심 끝에 축제 직전에 전격적으로 행사를 취소한 것이다. 1년 내내 파스나흐트를 준비했을 사람들의 허무함과 이 축제를 위해 기차표와 숙소를 예약한 관광객들의 실망과 불평에 대응해야 하고, 파스나흐트가 가져다 줄 경제적 효과를 포기해야 하는 씁쓸한 결정이었겠지만 옳은 결정이었다. 뿌리지 못한 꽃가루는 재고로 남아 창고에 머물고 있겠지. 마치 모든 재미 찾기를 잠시 미룬 채 이 머물러 있는 시간 속에서 의미를 찾으려 안간힘 쓰는 2020년의 우리처럼. 꽃가루의 색이 바래기 전에 다시 호쾌하게 봉지를 뜯어 저 회색빛 거리에 뿌리며 축제의 시작을 알릴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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