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 살면서 문화생활 중 가장 갈증을 느끼는 부분이 영화 감상이다. 오페라, 뮤지컬, 미술관 같은 문화생활에 대한 접근성은 뛰어나지만 의외로 대중예술인 영화를 감상하기에 장벽이 높은 것은 내 언어 실력이 모자라기 때문이긴 하지만. 프랑스, 독일, 스위스 영화관에서는 영화를 원어 버전으로 틀고 자막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자국어로 더빙을 하기 때문에 아직 불어와 독어가 중급 수준인 (그것도 읽고 쓰기나 그렇지 말하기와 듣기에 젬병이다) 나로선 영화를 완전히 이해하고 감상하는 것에 무리가 있다. 오히려 한국에 있을 때 예술영화와 제3세계 영화 등 다양한 영화를 감상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유럽에서는 영어로 나오는 영화 위주로 보러 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전형적인 할리우드 흥행작과 취향에 잘 맞지 않는 소위 프랜차이즈 무비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그런 가운데 가장 최근에 본 영화가 '아웃 오브 아프리카'를 연출한 시드니 폴락 감독이 1972년에 찍은 아레사 프랭클린에 관한 다큐멘터리 필름 '어메이징 그레이스'다. 아레사 프랭클린은 자기 커리어의 정점에 있던 순간에 팝 싱어가 아닌 가스펠 싱어로 돌아가 미국 LA의 한 교회에서 가스펠 노래를 녹음했다. 이건 콘서트 실황 같은 거니까 굳이 언어가 방해가 안 되겠군, 하는 마음으로 영화를 선택한 건데 의외로 큰 감동을 받고 영화관을 나왔다. 예전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캐나다 싱어 송라이터 닐 영에 관한 영화를 보다가, 아니 졸다가 도저히 못 참고 도망 나왔던 기억 때문에 음악 다큐멘터리에 대한 선입견도 있었는데 이렇게 매 장면, 감동을 주다니......'닐 영: 하트 오브 골드' '양들의 침묵'을 연출한 조나단 드미보다 시드니 폴락이 좀 더 내 취향에 맞는 감독인가? 그를 더 위대한 감독으로 부르기는 좀 뭣한 것은 영화의 개봉이 늦어진 이유 중 하나가 음악 다큐가 처음인 시드니 폴락이 영상과 소리를 따로 녹음하고 싱크를 못 맞추는 치명적인 실수를 해서 당시의 기술로는 도저히 후반 작업으로 고칠 수 없어서였다는 후일담을 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 영화는 기술의 발전이 있은 후에야 약 50년이 지나 개봉이 되었다. 이것은 너무나 큰 감동 포인트여서 나는 같이 영화를 본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 어떤 소망을 품고 있더라도, 아무리 바보 같은 실수를 해서 그 소망을 망쳐 버렸더라도, 50년이 지나도 절대 포기하지 말아요."
그 밖에도 영화 안의 많은 순간들이 아름답다. 너무나 열창해서 등장한 지 1분 만에 번지고 지워지는 아레사 프랭클린의 눈 화장. 꼭 필요한 극도의 클로즈업이 담아내는 인물의 진지함과 생동감. 편하게 스튜디오에서 녹음할 수도 있는데 굳이 여기에서 여러분과 함께 하는 이유는 당신들의 소리가 들어가길 바라기 때문이라는 연설로 청중의 참여를 격려하는 목사. 절대 겸손할 수 없는 압도적인 재능의 존재감. 애드리브까지 완벽하게 통제하는 그녀가 무너진 단 한순간 (아버지의 등장 이후 가사를 잊는 실수를 한다). 모두 박수를 치며 감동받고 있는데 좌불안석으로 있는 단 한 사람, 손수건을 꺼내 딸의 얼굴을 북북 문지르며 땀을 닦아 주는 아레사 프랭클린의 아버지. 작은 흑인 교회 합창단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이 잊히지 않고 올라가는 엔딩 크레디트......
봉준호 감독이 오스카 감독상을 받고 감사의 말을 전할 때 존경을 표한 마틴 스콜세지 역시 자신의 인생에서 놓지 않은 작품이 있었다. 나는 그의 다른 작품들을 당대에 즐겼을 만큼 연배가 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나중에 찾아 볼만큼 영화 마니아도 아니어서 이 유명 감독의 영화 중에 본 것이 별로 없다. 그 몇 안 되는 영화 중 우연히 파리의 극장에서 본 영화가 '사일런스'다. 그때도 불어 더빙의 압박을 피해 오리지널 언어로 나오는 영어 영화 중에서만 골라 봐야 하는 제약이 있었던 터라 사일런스가 어떤 영화인지 알기도 전에 덜컥 표를 사 버렸던 것 같다. 엔도 슈샤쿠의 소설 '침묵'을 원작으로 하는 이 영화는 종교적 색채가 짙어서 대흥행 작은 아니었지만 내가 좋아하는 스파이더맨의 배우 앤드루 가필드도 나오고 시간이 지나도 문득 떠오르는 질문이 남는 좋은 영화였다. 마틴 스콜세지는 소위 냉담한 가톨릭 신자로서 절실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항상 구원과 고난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가톨릭 신자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그는 1990년에 원작 소설 '침묵'을 접하고 그때부터 영화화하고 싶었지만 마지막 20쪽의 내용이 너무 어려워 도저히 구체적으로 발전시킬 수가 없었다고 한다. 다른 작품을 만들면서 몇 달에 한 번씩 그 소설을 읽고 한편으론 그러면서도 과연 이것 하나에 이렇게 매달릴 가치가 있는 것이냐는 의문에도 빠졌었다고. 어쨌거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고 영화는 2016년에 완성되어 빛을 보았다.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 내 마음 어딘가 한 구석에 묵힌, 이렇게나 쏟아부어야 할 건가 회의가 드는, 지금은 어떻게 해도 풀리지 않는, 시간이 지나야 이루어지는. 그런 무언가를 비밀리에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 이런 작품들은 적시에 도착한 선물처럼 위로가 된다. 언어 실력의 한계로 선택한 영화들에서 뜻밖의 위로를 얻기도 하니 인생 참 재미있고 살아 볼 만하다.
덧붙이는 말: '어메이징 그레이스'의 개봉이 늦어진 또 다른 숨은 이유는 아레사 프랭클린의 소송이다. 그녀는 왜인지 모르겠지만 이 영화가 개봉되는 것을 막고자 긴 세월 방해했고 결국 그녀의 사후에 법적인 문제를 피해 개봉할 수 있었다고 한다. 영화 안에서 그렇게 목이 터져라 찬양하던 그녀가 왜? 노래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큰 은혜가 되는데 왜? 자신의 명성에 누가 될 정도로 작품이 별로라서 그랬을 것 같지는 않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여러 가지 개인사로 인해 인생의 모든 순간을 경건하게 살았다고는 말하기 힘든 한 인간이 자신의 순수한 시절의 열정을 마주하는 게 부끄러워 서였을지도 모른다고 멋대로 추측해 본다. 오래 기다리는 것도 나, 기다림에 지치는 것도 나, 그러나 기다림의 종식을 방해하며 희망의 발목을 잡아 끄는 것도 나일 수 있다는 역설을 이 영화에서 엿보기도 한다는 것은 과장된 해석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