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젤은 취리히나 제네바에 비해 우리나라에 덜 알려져 있지만 나름 스위스 제3의 도시이자 세계적인 제약회사들의 본사가 있고 프랑스와 독일에 국경을 맞대고 있어서 꽤 많은 수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사는 국제적인 도시다. 인구는 17만 명 정도밖에 안 되지만 볼 것들도 꽤 있고 특히 미술관이 많다. 바젤시의 관광 관련 웹사이트에도 '다른 어떤 유럽 도시도 이런 작은 공간에 이리 많은 미술관을 갖고 있지는 않을 걸! 37 제곱킬로미터에 40개의 미술관이 있다고!'라고 자랑스럽게 적어 놨다. 예술 분야 종사자라면 아트 바젤 (Art Basel)이라는 세계적인 예술 박람회를 통해 이름을 들어 본 적도 있는 도시일 것이다.
그래도 루브르와 오르셰 미술관이 있는 파리에서 5년을 살고 온 내가 아닌가. 파리에 산다는 의무감에서라도 자주 미술관과 갤러리를 찾아다녔던지라 바젤의 미술관들은 어떤지 확인이나 해 보자는 조금은 옹졸한 마음으로 길을 나섰다. 파리의 미술관에 비하면 규모는 작지만 알찬 전시품들을 가진 쿤스트 뮤제움 바젤 (Kunstmuseum Basel)의 20세기관을 돌다가 마음에 드는 그림은 작가를 확인해 보면 스위스 화가 페르디낭 호들러 (Ferdinand Hodler)와 독일 화가 오토 딕스 (Otto Dix)여서 '미. 알. 못'도 취향이란 게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작품들 사이의 낯익은 이름들과 낯선 이름들을 확인하면서 문득 한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페르디낭 호들러, View to Infinity
혼자 있어도 얼굴 시뻘게지는 부끄러운 기억 제127호 정도 되는 이 사건은 오래전 대학원 면접 전화 인터뷰 때였다. 전화를 건 친절한 미국인 교수가 대화 초반에 내 이력서를 보고 "학부를 영문과 나왔네? 좋아하는 작가가 누구니?"라는 구태의연하지만 안전하고 매우 적절한 아이스브레이커 질문을 던졌다. 내 딴에는 농담이랍시고 "아, 나 그 질문 너무 지겹게 많이 받았어. 영문과 나왔다고 하면 다 그래"라고 감히, 인터뷰이가 인터뷰어를 면박 주었다. 머쓱해진 교수는 하하 웃더니 이내 다른 질문으로 넘어갔고 나는 그 일을 잊어버렸다. 나중에 다른 학교로 가긴 했지만 그 학교도 합격을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공정한 미국 대학이다. 이렇게 무례하고 센스 없는 지원자를 붙여 주다니.
한때 미국에서 만난 중국인 유학생들 중 일부는 너무 전투적이고 직설적이며 세련되지 못한 화법을 구사한다는 편견을 가진 적이 있었다. 공산주의 국가이다 보니 신원보장이 되어야 유학을 나올 수 있기에 중국 유학생들은 내가 만났을 때 한국인 유학생들 사이에선 보편적이 된 어학연수나 워킹홀리데이 같은 경험 없이 그것이 처음 중국을 벗어나 미국을 나온 경우가 많았고 그러다 보니 영어가 능숙하다 해도 화법이 직설적이고 공격적일 때가 있었다. 내가 한국인이라고 자기소개를 하고 별 말을 하지도 않았는데 자기는 대장금을 보지도 않았으며 한국인들은 한자를 자기들이 만들었다고 주장한다며?라는 적개심을 보여 나를 당황케 한 중국인도 있었다. 나는 내가 그런 사람들보다는 더 세련된 커뮤니케이터인 줄 알았지만 사실 전혀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어떤 교수들은 자기가 심사위원으로 있는 학생의 박사논문 심사에도 논문을 안 읽어보고 들어와서 이상한 소리를 하는데, 아직 입학도 하지 않은 지원자의 이력서를 읽고 학부 전공이 뭐였는지 물어봐 준 친절하신 분께 내가 얼마나 큰 결례를 범한 것인가! 그것도 전혀 재미있지 않은 농담으로. 그분이 나에게 '셰익스피어라고 하면 실망할 거야.'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왜 혼자서 '제임스 조이스 정도는 대답해 줘야 하지 않나, 비록 율리시스는 읽지 않았지만.' 이런 부담감에 사로잡혀 너무 유명하지 않지만 어느 정도는 알려진 작가 이름을 댈 자신이 없다고 짜증을 내 버렸나.
내가 편견을 가졌던 자들과 나 자신이 별반 다르지 않았으며 나는 전공한 커뮤니케이션이라는 행위에 조금도 보다 능숙한 것이 없었다는 생각에 빠져 있다 보니 미술관에 와서 그림은 보지 않고 딴생각만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휴, 또 이렇게 본질보다 이름에 얽매여 감상을 놓치는구나.
읽어 보지 않고도 아는 척하는 수많은 작가들의 이름.
지금 눈 앞에 그림을 두고도 찬찬히 그림 속으로 들어가기보다는 누가 그렸는지 서둘러 확인하게 되는 화가들의 이름.
그리고 초라한 이력 앞에 붙은 아무도 알지 못하는 내 이름.
이름, 이름들.
이름보다 그림이 남는 화가처럼, 나도 무언가를 남기고 싶은데 그게 내 이름은 아닐 텐데 어디서 어떻게 다시 시작해야 좋을지 작은 미술관에서 길을 잃은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