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물처럼 살기

2021년 1월 25일 월요병 기록

by 바다에 내리는 눈

침사추이 스타의 거리에 있는 스타벅스는 빅토리안 항구와 센트럴의 고층 빌딩들이 한눈에 보이는 굉장한 뷰를 갖고 있는데도 아침 일찍 가면 한산하다. 예년이라면 관광객으로 넘쳐 났을 스타의 거리엔 산책을 하는 홍콩 주민들 뿐이고 바다조차 한가롭다. '스타'의 거리답게 이 곳 스타벅스 앞에는 홍콩이 사랑하는 스타, 이소룡의 동상이 졸졸 흐르는 물 위에 서 있다. 스타의 거리 재단장을 주도한 조경 건축가 제임스 코너 (James Corner)는 스타의 거리에서 가장 좋아하는 요소를 설명할 때 이소룡이 했던 유명한 말을 인용한다.


당신은 물처럼 형체가 없어야 하고, 모양이 없어야 한다. 물을 컵에 따르면, 그것은 컵이 된다. 물을 병에 따르면, 그것은 병이 된다. 물을 주전자에 따르면, 그것은 주전자가 된다. 물은 똑똑 떨어질 수 있고 부술 수도 있다. 친구여, 물처럼 되시오.
-이소룡
You must be shapeless, formless, like water. When you pour water in a cup, it becomes the cup. When you pour water in a bottle, it becomes the bottle. When you pour water in a teapot, it beocmes the teapot. Water can drip and it can crash. Become like water, my friend.
- Bruce Lee
IMG_20210118_121747_824.jpg 스타의 거리 이소룡

이소룡의 이 말은 무술이 아닌 삶의 어떤 마디에 적용해도 진리라 그가 무술가일 뿐 아니라 철학자였다는 말에 수긍이 간다. 유연한 사고와 강인한 힘, 자아를 극복한 경지가 스타의 거리 디자인에 잘 반영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2019년에 새로 단장한 스타의 거리는 곡선을 많이 사용했다. 하버시티 쇼핑몰, 스타 페리 선착장, 인터콘티넨탈 호텔 같은 화려하고 번잡스러운 관광지에서 출발하여 MTR 홍함 역까지 물처럼 흘러가다 이소룡을 만나 사진 한 장 찍고 들어간 스타벅스에서 커피 한 잔 값으로 누리는 여유가 새삼 고마운 월요일이다.


아침부터 분주하고 신경 쓸 게 많아서 하루가 시작된 지 몇 시간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짜증이 나 버렸다. 분명히 어제가 일요일이라 하루 쉬었으니 오늘은 새 기운으로 가득 차야 할 텐데 오히려 더 피곤하고 지치다니,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차라리 쉬면 안 돼, 쉴수록 더 늘어진다니까' 하며 일 중독자의 길로 가기엔 내가 너무 게으르고 쉼의 가치를 절실하게 느끼는 사람이니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다. 제대로 잘 쉬지 못했다는 것. 어제 나는 쉬었다고 생각했지만 쉰 게 아니었던 거다. 보고 싶은 친구를 만나 브런치를 먹고, 오후엔 아이와 실컷 놀아 주고, 밤에는 밀린 예능 프로그램을 유튜브 조각 영상으로 눈이 시뻘게지도록 보았는데도 쉰 게 아니었다니, 더 이상 어떻게 격렬하게 잘 쉴 수 있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시편 23:1-2)


어른으로서의 책임에 시달리게 된 나이부터 이 시편 말씀에 나오는 고즈넉하고 평화로운 풍경 속의 완전한 쉼을 꿈꿔 왔다. 부족함이 전혀 없는 상태란 어떤 걸까? 아, 그곳에서 늘어지고 싶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시는 다윗왕이 노년에 자기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켜 도망칠 때 지은 시였다. 젊은 시절 산전수전 공중전 다 겪고 이제 좀 쉬고 싶은데 아들이 날 죽이겠다고 해서 노구를 이끌고 도망치면서 수치와 분노, 절망을 느끼는 가운데 쉴만한 물 가 타령을 한 거다. 그래도 그의 마음이 이미 평안한 풀밭에 가 있으니 몸은 동굴에 있든 산중에 있든 부족한 것이 없었다.


나는 차마 다윗왕처럼은 아직 못 살겠다. 몸이 부서져라 몇 시간을 놀아 주고 나서 식초물로 깨끗이 씻어 4등분으로 일일이 잘라 준 딸기를 먹는 아들 녀석이 혹시 내가 뺏어 먹을까 봐 '엄마 저리 가'하고 나를 밀어내면 진심으로 서운한데...... 만약 다윗왕의 처지에 놓인다면 '부족함이 하나도 없다, 정말 평안해!' 할 자신은 없다. 지금은 일단 이소룡이 말한 대로 물처럼 살아야겠다. 바쁘고 지치는데 도와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 같은 월요일이면 '월요일은 원래 그러려니', 거기에 맞춰 살고, 신나는 일이 있어야 할 것만 같은 금요일인데 아무런 약속도 특별한 계획도 없으면 '이런 금요일도 있으려니', 그런대로 살아야겠다. 짜증이 날 때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물방울 하나만큼의 인내로 참고 넘기면 언젠가는 바위도 부서지는 물길이 나겠지. 자, 커피도 다 마셨고 아직 월요일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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