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근육 단련하기

2021년 1월의 기록

by 바다에 내리는 눈

확실히 나이 들고 있다. 자꾸 식재료와 음식의 맛보다 효능에 집착하게 된다든지, 거친 사내 느낌을 내겠다고 치명적인 표정을 짓는 남자 아이돌 가수의 무대를 보고 반하는 게 아니라 웃음이 터진다든지, SNS로 친구 신청을 한 사람이 고등학교 동창인지 대학교 후배인지도 가물가물하다. 그래도 나이를 먹으니 덤으로 따라오는 장점도 있다. 바로 나 자신에 대해 조금 더 속속들이 알게 되는 거다.


어릴 때라면 절대 알 수 없었던 나의 깊은 내부를 알기 위해 많은 돈을 병원에 갖다 주었다. 눈에 날파리가 날아다니는 비문증과 안구 건조증, 습관적 다래끼, 녹내장 의심 소견, 약간의 번짐과 초점이 안 맞는 듯한 느낌 등으로 인해 안과를 들락날락거리며 수많은 사진을 찍어 보고 알아낸 것은 비문증은 못 고치고, 안구 건조증은 그냥 인공누액 뿌리면 되고, 다래끼는 눈 세척 잘하면 되고, 녹내장 아니고, 어릴 때 한쪽 눈 근육이 덜 발달해서 입체적인 것을 잘 못 보는 눈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이제껏 "사람들이 왜 돈 주고 3D 영화를 보는 거지? 별로 효과도 없고 자막만 튀어나와 보이고 어지럽던데." 하며 불평했었다. 입체 이미지가 안 보이니 3D 영화를 관람하는 내내 뭐라도 튀어나오는 게 있는지 보려고 지나치게 집중해서 두통까지 얻은 거였다. 파리의 안과 의사가 이 증세를 고치기 위해 치료사를 만나보라고 해서 클리닉을 간 적이 있다. 색맹 검사 책 같은 걸 주면서 나에게 보이는 그림과 숫자를 말해 보라고 했을 때 웃으면서 '농담하는 거지? 아무것도 없는데?'라고 대답했더니 치료사가 심각한 얼굴로 '정말 미안한데 여기 모든 페이지에 그림과 숫자가 있어.'라고 했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 없다. 30여 년을 남들이 보는 걸 못 보고 살고 있었다니!

이 증세는 약시, 소위 '게으른 눈 (Lazy eye)'이라는 것으로 어릴 때 양 눈의 시력이 다를 때 더 시력이 나쁜 눈에서 오는 흐릿한 이미지를 무시하고 그쪽 눈의 근육을 쓰는 것을 게을리하면서 선명한 이미지가 보이는 눈만 쓰게 되면서 결국 시력이 더 떨어지는 그런 악순환을 겪게 되는 거라 한다. 몇 번을 방문해서 치료사가 주는 책을 매직아이 보듯 눈동자를 이리저리 모아 보고 굴려 보면서 입체 이미지를 보려고 애써 봤지만 별로 효과 있는 것 같지 않아서 치료사에게 '이렇게 해서 고쳐지는 거 맞아?'라고 물어보니 치료사가 또 심각한 얼굴로 '정말 미안한데 사실 5살 이전에 해야 효과가 있어. 지금은 근육이 너무 굳어서 안 될 거야.'라고 말했을 때의 황당함도 잊을 수 없다. 그러면 애초에 왜 안과 의사는 치료사를 만나 보라고 추천을 했으며 치료사는 어찌하여 아무 말도 없이 계속 돈만 받으면서 매직아이를 권하고 있었단 말인가. 어쨌든 그때 나는 게으르다 못해 안구 근육까지 게으른 자로구나, 그리고 내가 통제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안구 근육 같은 것도 단련이 가능한 거였군, 이런 깨달음을 얻었다.


나이를 먹으면서 내 눈에 대해서만 속속들이 알게 된 것이 아니다. 숨이 안 쉬어져서 사진을 찍어 보니 비중격 만곡증인데 수술할 정도는 아니라 하고, 소화가 안 돼서 사진을 찍어 보면 식도염인데 심각한 것은 아니라 하고, 생리통이 심해서 사진을 찍어 보니 자궁근종이 많은데 자궁을 들어낼 필요는 없다 하고, 손목이 너무 아파서 사진 찍어 보면 건초염인데 쉬는 것밖에는 답이 없다 하고, 허리가 너무 아파서 사진 찍어 보면 디스크가 약간 있는데 이 정도면 괜찮다고 한다. 40대의 나는 하루하루 삭신이 쑤시는데 사진 상으로는 멀쩡하니까 참 약 오를 정도로 감사하다. 허리 근육을 강화하면 덜 아프다고 하니 슬슬 운동을 시작해 봐야겠다. 마침 연말에 우리 집에 왔다 가신 산타 할아버지가 나에게 운동량이 확인되는 시계 하나를 선물해 주신 게 있다. 작은 상자를 보고 '크기가 작은 걸 보니 귀걸이인가' 기대하다가 '나는 시계를 안 차는데?'라고 실망스러워하니 옆에서 남편이 이거 핸드폰이랑 연결해서 온갖 신기한 걸 다 할 수 있고 하루에 몇 보 걸었는지도 체크할 수 있는 거라고 설명해서 '나는 걷지를 않는데?'라고 더 실망했던 시계다. 하지만 내 허리 근육을 강화시켜 줄 고마운 친구라고 생각하니 정이 가서 매일 차려고 노력 중이다.


연말에 받았던 크리스마스 선물 중 내 것은 아니지만 내 근육을 강화시켜 준 선물이 또 하나 있다. 아들의 어린이집에서 종업식 날 아이들끼리 새 책을 교환하는 행사를 한다고 꼭 새 책을 사서 포장까지 해서 들려 보내라고 안내문을 받았다. 마침 기차를 좋아하는 아들을 위해 크리스마스 선물로 기차 동화책을 주문한 게 있었다. 모르는 남에게 기부도 하는데 같은 반 친구에게 아들이 제일 좋아하는 동화책 하나 선물 못하랴 싶어서 아들 몫으로 산 거지만 예쁘게 포장해서 들려 보냈다. 종업식 날 우리 아이는 어떤 책을 받아 올지 내심 기대가 되었다. 좋아하는 기차 책일까? 귀여운 동물 책일까? 누나 형아들이 읽는 글밥 많은 어려운 책일까? 이런 즐거운 상상을 하며 집에 온 아이의 책가방을 열어 보았는데 들어 있던 책은 누가 보아도 낡고 오래된 책이었다. 국제학교를 보내는 집들이니만큼 형편이 어려워서 중고 책을 보낸 건 아닌 것 같고 그냥 어떤 부모가 까맣게 잊고 있다가 그 날 아침에 '아 참! 오늘 책 교환한다고 했지.' 하면서 아무거나 집에 있는 책을 들려 보낸 것 같았다. 그래도 좀 깨끗하고 상태가 좋은 책을 보낼 것이지 이미 한참 어릴 때 읽어서 지금 연령 수준과는 맞지 않는, 그래서 남에게 주거나 버려도 아깝지 않을 만한 책을 보냈는데 누군지 모를 아이의 코딱지가 묻어 있고 주스 자국과 얼룩 묻은 책장이 끈적거려 딱 붙어 잘 떼어지지도 않았다. 그 책을 본 순간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고 내가 시시한 선물을 받은 것보다 더 낙심이 되었다.

21-01-12-14-43-21-948_deco.jpg 바로 그 책

화려한 일러스트가 그려진 책, 유명한 작가가 쓴 책, 비싼 책을 바란 것도 아닌데...... 그저 성의 있게 고른 새 책이길 바란 마음도 욕심이란 말인가. 하필 그 많은 아이들 중 우리 아이가 이런 책을 받아 왔는지 원망스러운 마음도 이기심인 걸까. 나는 아직도 한참 내려 놔야 하는 소인배인 것 같아서 기분이 가라앉았다. 내 기분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는 그 책에 기차가 그려져 있다고 좋아하며 읽어 달란다. 이 녀석은 선물은 포장지에 싸인 것이라고 배워서 돌멩이를 주워다 신문지로 싸서 주어도 좋아할 녀석이다. 위생에 신경 써야 하는 시국이니만큼 그냥 버려 버릴까, 아니면 조용히 어디 구석에 처박아 둘까 하는 생각도 스쳐 지나갔지만 아무리 그래도 아이가 선물 교환식에서 받아 온 어엿한 '선물'인데 그럴 수 없었다. 이제껏 내가 받은 선물들에 대한 내 태도는 내 본성에서 나오는 대로 즉각적으로 정해졌다. 많이 베푼 상대에게서 기대에 못 미치는 선물이 돌아오면 뒤에서 화를 내고, 어떤 선물은 서랍에 넣어 놓고 잊고 있다가 이사할 때 발견했는데 유통기한이 지나 버릴 수밖에 없었고, 어떤 선물은 당연하게 받아 헤프게 썼던 것 같다. 마음에 안 드는 거지만 소중하게 다루고 매만지며 최고의 선물처럼 여겨 본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나에겐 그런 겸손함이 없다. 그런 내가 자식이 받아 온 선물은 아무리 보잘것없어도 아무렇게나 대할 수 없었다. 친구가 준 책에 기차까지 그려져 있어서 신난 아이에게 어디서 이렇게 더러운 걸 받아 왔냐고 만지지 못하게 하면 한 순간에 '선물'은 '지지'가 된다. 이른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아 최고로 기쁜 하루에서 처음으로 인간에 대한 비애를 느끼는 하루로 변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기를 쓰고 악착같이 낙담하지 않으려 내 마음 근육을 모았다. 어느새 깊은 우물 속으로 빠진 내 심장에 감사함이라는 두레박을 던져 주고 부들부들 떨리는 근육으로 끌어올렸다.


"와, 이거 진짜 멋진 책인 걸!"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물수건으로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닦아 조금 말끔해진 책을 정성을 다해 읽어 주었다. 낡은 책에는 귀여운 동물들이 색색깔의 기차를 타고 있어서 내가 상상했던 기차 책과 동물 책을 한꺼번에 받은 느낌이었다. 이게 되는 거였구나, 절대 통제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마음 근육도 단련이 가능한 거였다니......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내 본성대로 반응하지 않고 한 박자 쉬면서 사건의 의미를 소화시킨 다음 실망이 아니라 감사로 향하게 근육을 힘껏 모아 본 첫 경험이었다.


오래전 배우 김해숙 님의 인터뷰 기사에서 기억에 남는 말이 있다. 40대에 큰 빚을 지고 매일 힘들어했던 그녀는 어느 날 더 이상 이렇게 살아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두 가지를 끊었다고 한다. 하나는 술, 다른 하나는 음악. 슬픈 노래 틀어 놓고 술 마시며 질질 짜는 것 그만해야겠다 싶어서 그 날 이후로 한 번도 음악을 듣지 않았다고, 앞만 보고 달렸다고 하는 그 얘기에 '어떻게 음악을 끊을 수 있어?' 하고 놀랐기 때문에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다. 그 이후로 흥행 영화들과 주말 드라마에 쉼 없이 출연하는 그녀를 보면 이제는 시간이 많이 지나 빚도 다 해결되고 경제적으로 여유를 되찾았을 테니 다시 음악을 듣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그녀가 다시 슬픈 노래도 듣고 기쁜 노래, 신나는 노래도 듣고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어쨌거나 나의 경우엔 '자식', 배우 김해숙의 경우엔 '빚'이 우리가 본성을 거스르고 마음 근육을 모아 낙담에서 탈출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자식도 빚도 그다지 영구적으로 효과 있는 동력 같지는 않지만 무엇이 되었든 간에 자기만의 원천을 찾아 이 훈련에 도전해 보는 것이 초심자에겐 유용할 것이다.


사실 삶은 우리에게 수시로 시시한 선물들을 준다. 코딱지 묻은 책, 산타 할아버지가 착각하고 잘못 떨구고 간 것 같은 크리스마스 선물, 두근두근하며 확인했는데 명단에 내 이름이 없는 공모전을 준비하며 새운 날밤들, 괜히 소중하게 3주씩이나 간직했던 '꽝, 다음 기회에' 경품 행사 응모권, 또 한 살 더 먹은 나를 누가 기억해 주나 싶어 기쁜 마음에 들여다보면 단골 브랜드에서 발송한 생일 축하 메시지...... 그래도 삶은 나에게 한 번도 돌멩이를 신문지로 싸서 준 적은 없었다. 그 모든 시시한 순간들에 돌멩이보다는 옹골찬 내용물들이 들어 있었다. 단지 내 마음 근육이 약해서 그것들을 길어 올리지 못하고 툭, 끊어졌을 뿐이다.


아니, 삶은 억울할지도 모르겠다. 언제 그렇게 너에게 시시한 선물들만 주었더냐고. 거창한 순간들은 선물이 아니라 네가 노력하여 쟁취한 전리품인 줄 아느냐고. 며칠 전 한국에 있는 친구로부터 선물을 받았다. 나를 생각하며 골랐다는 그 선물에 담긴 의미가 너무 커서 내 안의 두레박이 넘쳤다. 내가 이런 것을 받아도 될지 모를 정도로 과분한 선물이었다. 나는 아직 손가락에 힘도 들어가지 않는데 좋은 글을 쓸 수 있다고 연필을 선물 받은 어린아이처럼 벅찼다. 그러고 보면 살아가며 내가 받은 그 모든 값진 것들은 노력이 아니라 거저 얻은 것이었다. 격려, 우정, 사랑, 존중, 수용, 기억, 그리고 용서.


조금 더 마음 근육을 단련하면 시시한 선물들에 낙담하지 않는 수준이 아니라 과분한 선물들을 잊지 않는 수준까지 발전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올해는 내 마음 근육 단련을 위한 선물들은 적당히 받았으면, 가끔은 아차상이나 로또 4등 같은 순간들도 찾아왔으면 좋겠다.




이전 08화[홍콩] 어휘 늘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