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봉투 선물

2021년 설날의 기록

by 바다에 내리는 눈
빈 봉투들은 선물인가 짐인가

예년에 비해 조용한 2021년이지만 원래 홍콩에서는 춘절을 떠들썩하게 쇤다. 온라인 쇼핑몰에서 생필품을 주문하거나 카페에서 커피를 사니 얼마 전부터 사은품을 껴 주기 시작했다. 사은품이 뭔가 하고 기대에 차서 뜯어보면 그건 바로 라이시 (利是) 봉투. 워낙 여기저기 라이시 뿌릴 데가 많으니 선물로 봉투를 주는 거다. 어린 시절처럼 세뱃돈을 받는 것도 아니고 장성한 자녀로부터 용돈을 받는 것도 아닌, 돈 나갈 데만 많은 중년의 처지를 상징하듯 이번 설에는 빈 봉투만 잔뜩 받았다.


춘절 문화도 중국 본토와 홍콩이 달라서 본토에서는 주로 가족 간에 나이가 많은 사람이 어린 사람에게 홍바오 (紅包)를 주고, 홍콩에서는 가족뿐만 아니라 친구 간에도 기혼자가 미혼자에게, 회사에서 부하 직원에게, 평소 서비스를 제공한 경비원, 청소부, 단골 식당 종업원, 미용실 직원 등에게 주는 걸로 확대된다. 아무리 봉투 하나 당 10, 20 홍콩달러에서 100 홍콩달러의 소액을 넣는다 해도 (한화로 만 오천 원 이하) 한 사람이 주변에 줘야 할 봉투가 50군데씩 되다 보니 라이시 액수가 부담되어 차라리 남들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여행을 떠나 버리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평소 친하지도 않은데 "꽁헤팟초이, 족네이쳉꽁(恭喜發財, 祝你成功,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당신의 성공을 빕니다)" 하며 봉투를 기대하는 얌체들이 있기 때문이다. 요즘은 모바일로 돈 보내기가 쉬워서 중국 본토에서는 홍바오도 다 모바일 결제로 오간다는데 만약 SNS로 신년 인사를 보낸 지인들에게 다 알리페이로 돈을 보내야 한다면 너무나 큰 부담일 거다. 중국은 아주 친한 사이나 가족 간에 큰 액수를 주고받으니 모바일로 홍바오를 보내지만 홍콩은 안 친한 사이에도 소액을 뿌리는 개념이다 보니 아직까지 라이시는 이 빨간 봉투에 넣어 서로 얼굴을 볼 수 있을 때 건네는 게 대세인 것 같다.


홍콩에 온 지 얼마 안 되어 아는 사람이 별로 없고 코로나 때문에 나다니지도 않아서 주변에 라이시 봉투를 돌릴 데가 많지는 않다. 아이 학교에서는 투명하고 공정해야 한다고 스탭과 선생님들이 절대 라이시를 받을 수 없다고 안내 메일까지 보내온 터라 그러면 아파트 청소해 주는 사람과 스쿨버스 기사와 마마 정도만 챙기면 될 거 같았다. 한국에서 요즘은 안 친한 사이에도 축의금을 5만 원은 하니까 한국식으로 생각해서 그 정도 넣었는데 사실 중추절에도, 크리스마스에도, 신년에도 이렇게 드리다 보니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게 다행이란 생각도 든다. 유럽에 있을 때는 파이 (갈레트 데 후아 gallette des rois) 먹는 날인 주현절, 크레페 먹는 날인 성촉절이 차라리 더 큰 행사였지 음력 설은 따로 달력에 표시하지 않으면 잊기 쉬운 그런 날이었는데 여기 와서 설을 챙기다 보니 내가 아시아에 있다는 게 실감이 난다.


그나저나 이 봉투들을 다 어쩐담? 라이시는 신권으로 줘야 하는 문화 때문에 새 지폐 만들고, 봉투 만드느라 나무가 많이 죽는다는데 환경을 생각해서라도 버릴 순 없고 이 봉투들에 마음을 담아 어떻게든 재활용할 방법을 생각해 봐야겠다. 봉투 하나에 '발 마사지 10분' '어깨 마사지 10분' '두피 마사지 10분' 이런 쿠폰 하나씩 담아 다음 주에 있을 밸런타인데이에 남편에게 선물할까 보다. 물론 마사지는 내가 받는 것으로...... 아내를 행복하게 해 줄 기회를 선물하는 거야,라고 생색을 내면 이게 무슨 선물이냐고 팔짝팔짝 뛸 남편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재미있다.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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