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Pottinger Street 탐방기
원어민과 대화를 하다가 'Fun Friday'를 중국어로 뭐라 해야 할지 몰라 '요우이쓰 (有意思)'한 금요일이라고 했더니 그것보다는 '하오완 (好玩)'이라는 단어가 더 맞는 표현일 것 같다고 교정받았다. 사전을 찾아보니 전자 '요우이쓰'는 영어로 'interesting (흥미 있는)'에 가까운 뜻이고 '하오완 (好玩)'은 '재미있다, 흥미 있다, 귀엽다, 놀기가 좋다'라는 뜻이니 후자가 좀 더 영어 fun에 가까운 단어가 맞는 것 같다. 약간 절제된 감정인 '흥미 있는'은 중국어로 알고 있었지만 재미있고 놀기가 좋다는 단어는 모르고 있었으니 이런 게 어른의 삶인 건가. 자기소개, 물건 구입, 식당 주문, 길 찾기, 여행사 예약, 출장, 취미생활에 관한 대화까지 중국어 교과서 한 권을 다 떼도록 단 한 번도 '하오완 (好玩)'이란 단어가 나온 적이 없으니 어른을 위한 생존 중국어에 재미란 개념이 감히 낄 자리는 없다.
소위 '노는 금요일', '하오완더싱치우 (好玩的星期五)'란 단어를 알고 싶었던 이유는 매주 금요일마다 아이 어린이집에서 하는 행사 때문에 때로는 일주일 내내 고민하고 며칠을 수고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린이집에서 금요일마다 재미있는 행사를 계획해서 애들의 귀여운 모습 사진을 찍어 학교 웹사이트에 올려주는 것은 참으로 고마운데 이 행사를 위한 준비물이 골치가 아프다. 돈이 안 드는 준비물일 때도 있지만 곤충의 날이라고 벌레 의상을 입고 와라, 밸런타인데이라고 빨간 옷을 입어라, 크리스마스니까 산타 옷을 입어라, 새해니까 중국 전통 의상을 입어라, 스포츠 데이라고 좋아하는 스포츠팀 유니폼을 입어라, 등등 딱 한 번 입을 게 분명한 특이한 의상을 준비하라고 할 때가 난처하다. 코로나 때문에 크리스마스 파티가 취소되었다기에 그러면 산타 옷을 안 입혀도 될 줄 알고 그냥 보냈는데 나중에 올라온 사진을 보니 다른 애들은 다 산타 옷을 입었고 우리 아들만 일상복을 입고 있었던 적이 있어서 그 이후론 '에휴, 한 번을 입어도 사야지' 하는 마음을 먹게 되었다. 손재주가 좋은 엄마들은 직접 이런 준비물들을 만드는데 나야 그런 재주도 없고 시간도 없으니 인터넷 검색 신공과 신용카드의 도움으로 버티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최근엔 공동체 도우미의 역할에 대해 배운다고 소방수, 경찰관, 의사, 청소부 같은 의상을 입고 오라는데 너무 급박하게 며칠 전에 알려 주는 바람에 온라인 사이트에서 의상을 배송시킬 시간이 없었다. 결국 홍콩 섬 센트럴 지역에 있는 포팅어 가 (Pottinger Street)의 코스튬 마켓까지 길을 떠났다.
포팅어 가는 언덕 위의 할리우드 가 (Hollywood Street)와 코넛 가 (Connaught Street)를 연결하는 가파른 돌길을 일컫는데 경사가 많은 센트럴의 지형적 특색을 잘 보여 주는 곳이다. 실제로 이 돌길은 영국 식민지 시대의 양식 그대로인 주변 건물들과 초록색 계단 손잡이가 사람들의 향수를 자극하여 영화 촬영지로도 유명하다고 한다. 탕웨이, 양조위가 출연한 영화 '색, 계 (2007)'에도 여기에서 찍은 장면이 있다. 센트럴의 지리를 잘 몰라서 돌길을 한참 내려왔다가 '어라, 여기가 아닌가 봐?'하고 또다시 한참 언덕을 올라가는 수고 끝에 각종 가발과 특이한 의상들을 파는 가판대들이 몰려 있는 구역을 찾았다. '어린이집에서 애 재미 좀 보게 하겠다고 엄마는 이렇게 개고생 하는구나, 그놈의 재미가 무엇이기에?' 하는 의문이 머릿속을 맴도는 가운데 요즘 한창 소방차에 꽂힌 아들을 위해 소방수 의상을 또 한 푼의 에누리도 없이 거머쥐고 터덜터덜 돌길을 내려가노라니 도가니가 쑤셔 왔다 (흥정이 제 맛인 홍콩의 시장에서 언제나 한 푼도 깎지 못하고 물건을 사곤 하는 것은 이전 글의 중국 전통의상 구입기에서 밝힌 바 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이 곳에 가발과 핼러윈 의상 전문점들이 모여 있는 걸까? 사실 너무나 짧은 시기 동안 한정적인 수요만 있는 것이 가발과 코스튬이라 핼러윈을 떠들썩하게 보내는 미국에서도 상설매장보다는 단기간 임시 매장이 대세인데 왜 홍콩에는 코스튬 전문 시장이 존재하게 되었는지 그 유래가 궁금해서 이리저리 정보를 찾아보니 그 역사는 이러하다. 런던 상부의 명령을 거스르고 홍콩을 영국이 다스려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여 난징조약을 관철시킨 홍콩의 초대 총독 포팅어의 이름을 딴 이 거리에 시장이 생겨난 것은 2차 세계 대전 직후이다. 그때는 옷을 비롯한 생활 용품과 각종 잡동사니를 다 팔았지만 홍콩의 경제가 발전하고 센트럴이 주거지역이 아닌 상업 지역으로 변하면서 점점 생활 용품 상점은 사라졌고 수공예품과 장식품을 파는 가판대 위주로 운영되다 오늘날에는 홍콩 최대의 핼러윈 행진이 벌어지는 유흥지 란콰이퐁과 가까운 포팅어 거리의 특성상 가발과 코스튬 위주 상점들만 남아 있다고 한다 [1]. 이렇게 포팅어 가의 역사에 대해 알게 되니 귀찮은 준비물을 마련해 오라고 한 어린이집에 도리어 고마워진다. 소방수 옷을 서둘러 사야 하지 않았으면 이 곳에 와 보지도 않았을 것 아닌가. 돌길 등반을 하며 숨을 헐떡이고, 기가 센 시장 상인의 시끄러운 목소리에 주눅 들어 속으로만 소심하게 '좀 깎아 달라고 할 걸' 속삭이며 얼굴 붉히고, 집에 와서 포팅어 가의 역사에 대해 찾아보는 경험들을 통해 이 거리의 이름은 내 마음속에 단단히 새겨진다.
포팅어 가의 코스튬 상점들 사실 아이 때문에 이렇게 길거리에서 버리는 시간이 많다. 아이의 하교 스쿨버스는 교통 사정에 따라 어떨 때에는 좀 일찍 오기도 하고 어떨 때에는 말도 안 되게 늦게 오기도 해서 항상 픽업 시간보다 미리 나가 있어야 한다. 주차장에서 스쿨버스를 기다리고 있으면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하는 듀스의 노래가 절로 떠오를 정도로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는 기분이 들었다. 매연을 맡으면서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하는 20분, 30분의 시간이 모이면 한 달에 7~10시간이니 얼마나 아까운가. 책을 읽어도 몇 권은 읽을 테고, 운동을 하면 1kg는 빠질 텐데! 코로나 기간 동안 불어난 몸집에서 1kg 빠져 봐야 티도 안 나겠지만 왠지 이 스쿨버스 기다리는 시간만 없어도 나는 운동을 열심히 해서 살이 안 쪘을 것 같고, 뭔가 의미 있는 '요우이이 (有意义)'한 일을 해 냈을 거 같은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이런 기다림과 헤맴이 없이 부모가 될 수 있을까? 픽업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전속력으로 달려가는 시간, 왜 오늘따라 차가 늦게 오는지 무슨 사고라도 난 건 아닌지 걱정하며 기다리는 시간, 그러다가 노란 차가 모퉁이를 돌아 내게로 다가올 때 안도감에 눈물이 핑 돌 정도로 반가운 순간, 차 문이 열리고 아이가 환하게 웃으며 내게 안기고 내 머리카락을 잡아 뜯으며 '오늘 재미있었어?'라는 질문에 '응' 대답하는 순간들이 모여 비로소 나는 부모가 된다. 돌길을 헤맨 경험 덕에 조금 더 내가 사는 곳을 잘 아는 홍콩 주민이 되어 가고, 마땅한 문장을 찾지 못해 썼다 지웠다 하며 빈 종이 위를 헤매면서 작가가 되어 가고, 실족했다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하며 신자가 되어 가고, 사랑했다 반목했다 화해하는 과정 속에 사람이 되어 간다. 기다림과 헤맴 속에 '요우이쓰 (有意思)'하고 '요우이이 (有意义)'한 순간들이 빼곡히 접혀 있구나, 그래서 미래가 잘 안 보인 거였구나, 그래서 삶이 재미있는 거였구나, 깨달으면서 어른이 되어 간다.
[1] Ask Mr. Know-It-All: Why does everyone go to Pottinger Street for their costum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