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톱 밑의 가시

by 바다에 내리는 눈

매일 우버를 타면서 기도한다. 생판 모르는 타인에게 맡기는 이 연약한 목숨 좀 지켜 달라고. 그러나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는 말처럼 기어코 2주 전에 사고가 나고야 말았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데 그 날따라 경차가 왔다. 안 그래도 출발할 때부터 부주의해 보였던 우버 기사는 (아직 사람이 타지도 않았는데 자동문을 조작해서 문을 닫으려 함) 공사장에서 나오는 큰 건설용 트럭을 보지 못한 채 직진했으나 뒷자리에 앉아 있던 나는 트럭이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엇, 저 차가 왜 이리로 다가오지? 왜 이 차는 보지 못하고 그냥 가지? 이러다 치이겠는 걸?' 오만가지 생각이 지나가는데 얼어붙어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있는데 순식간에 쿵, 트럭은 내가 탄 자리 옆문을 박아 버렸다. 다행히 서행하면서 친 거라 차만 망가지고 사람은 다 무사해서 경찰차와 소방차까지 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병원에 갈 필요 없이 바로 다른 우버를 불러 가던 길을 갈 수 있었다.

비록 몸은 안 다쳤지만 정신적으로는 충격이 있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고는 정말 찰나의 순간에 일어나는구나, 일이 일어나려면 하나의 요인만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고 정말 여러 가지 요인이 결합되어 발생하는 거구나 (비 + 경차 + 부주의한 경차 기사 + 하필 공사장을 지남 + 트럭 기사의 불법 주행), 하루하루 안전하고 별 일 없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거구나, 뭘 좀 더 해 내고 뭘 좀 도전하지 않아서 죄책감 느낄 필요 없이 오늘을 살아야겠구나, 나에게 내일이 없을 수 있구나, 이런 뻔하지만 겪지 않으면 절실하게 다가오지 않는 그런 깨달음 속에서 허우적대는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매일 우버를 타야 하니 소심해서 기사에게 당부는 하지 못하고 뒷자리에서 제발 안전 운전하게 해 달라고 기도만 하고 있다.


131612337_10158926641924321_1359811649291617987_n.jpg 홍콩의 택시. 탈 때마다 아슬아슬하고 멀미 난다.

그런데 얼마 전, 교통 체증이 있어서 차들이 도로에 다 서 있고 좀처럼 움직이질 않는 것이다. 차가 움직이질 못해서 짜증이 잔뜩 난 기사가 앞에서 교통사고가 난 것 같다고 말한다. 막히는 길로 접어든 게 내 잘못도 아닌데 눈치가 보인다. 나는 늦어도 괜찮으니 여유를 가지라고 답했지만 이미 젊은 기사는 참을성을 잃고 신경질적으로 경적을 울려 댄다. 웬만해서는 경적을 울리지 않는 나라에서 오래 살다 왔더니 서로에게 화풀이하듯 빵빵거리는 홍콩의 운전 문화가 놀랍기만 하다. 그렇게 공허하게 경적 소리는 하늘로 흩어지고 차는 여전히 꿈쩍도 하지 못한다. 나는 순간 울컥한다. 지금 저 앞에 사고가 난 현장에서는 누가 죽었을지, 얼마나 다쳤을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내 한 줌의 불편 때문에 경적을 울려 대는 게 인간이란 종의 본성인가?


이렇게 평소에는 교양으로 포장해서 드러나지 않던 인간들의 이기심이 까발려지는 순간이면 영화 '기생충'이 떠오른다. 피고용인들에게도 젠틀하게 대하고 부도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노력으로 이루었으며 여러 모로 흠잡을 데가 없는 사람 같았던 부자가 죽은 소녀를 보고도 동정이나 충격 때문이 아니라 악취 때문에 흠칫 멈췄던 그 순간, 소녀의 아버지는 격분했다. 남의 죽음보다 내 코 밑의 냄새가 더 괴로운 '면역력 제로, 자의식 과잉'의 괴물들을 배양해 내는 현대사회의 꼭대기에 있는 무균실을 탓해야 할까.


따지고 보면 꼭 이 사회의 정점에 서 있는 사람들만이 그렇게 타인의 냄새에 예민한 것은 아니다. 예전에 샌프란시스코 살 때 교회 청년부에서 해외 봉사 활동을 가고 싶은 사람들끼리 모인 적이 있었다. 서먹한 분위기를 풀고 서로 알아 가기 위해 가진 아이스 브레이크 시간에 각자 자기가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을 말하기로 했다. 좋아하는 것은 고양이, 초콜릿, 샌프란시스코의 다양성, 석양, 미술관 뭐 이런 것들이었는데 한 처자가 싫어하는 것으로 대중교통을 꼽았다. 자기는 특히 대중교통의 냄새를 참을 수가 없다고. 나 역시 비위가 약해서 오래된 택시와 버스를 타면 멀미를 하는데 그래도 평생을 한국에서 대중교통만 타고 다녔고 싫어하는 것으로 대중교통을 꼽을 생각은 하지 못해서 그녀의 대답이 생경했다. 놀라운 것은 다들 웃으면서 그녀의 말에 공감을 표시하는 거였다. 샌프란시스코의 트램과 지하철은 파리와 뉴욕의 지하철에 비하면 양반인데 (한국의 지하철은 5성급 호텔) 청소년기부터 면허를 따서 자차를 몰고 다니는 중산층 미국인들에게 대중교통은 기생충에 나오는 반지하방만큼이나 지울 수 없는 불쾌한 냄새를 품은 것인가 보다. 이래 가지고 이 사람들 해외 빈국 봉사 활동은 어떻게 가려는 건가, 하는 생각에 걱정이 되었다. 봉사활동 가면서 향초에 향수에 아로마 오일까지 가져가서 냄새 지우겠다고 할까 봐...... 해외 봉사활동을 앞둔 사람들이 처음에는 무소유의 정신, 불편을 기꺼이 감수하려는 정신으로 봉사활동을 신청했다가 준비하다 보면 점점 짐이 늘어나서 나중에는 아프리카가 건조하다고 '가습기를 가져가야 되나요?'라는 문의까지 담당자에게 온다고, 제발 그러지 말라는 우스개 소리가 있는데 딱 그 짝이었다.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말이다.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주머니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것도 가지지 말며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하시고 (마가복음 6:9-10)

가만히 놔두면 감상에 살을 붙여 끝없이 비관적인 생각으로 빠지는 나답게 교통체증에 경적을 울리는 기사를 보고 영화 '기생충'을 떠올리고 오래전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난 철없는 아가씨의 악의 없는 농담 한 마디까지 끄집어내어 점점 더 인간들에게 정이 떨어지려고 한다. 고작 조금 약속에 늦는 것, 조금 더 도로에 머무르는 것, 조금 돈을 덜 벌게 되는 것 때문에 타인의 고통을 거추장스러워하는 장면에 혐오감이 들려는 차, 내 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러는 너는 얼마나 달라서? 너도 얼마 전 교통사고가 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초조해하며 속으로 시간 계산하고 있지 않았겠어? 지금 네가 이렇게 교통 체증에 너그러울 수 있는 건 네 목숨을 부지하고 싶은 욕구와 또다시 사고가 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남보다 커서 그런 것 아니야? 그런 주제에 누가 누굴 혐오해?'


우리의 교통 체증이 처참한 사고 현장보다 시급한 것처럼.

내 손톱 밑의 가시가 남의 죽을병보다 중한 것처럼.

남의 티끌만 한 이기심이 내 태산 같은 교만보다 더 큰 허물인 줄.

또 그렇게 착각하였구나.


아프고 힘들 때마다 되뇐다. 잊지 마, 이건 그저 손톱 밑의 가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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