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바다에 내리는 눈 Apr 13. 2021
1.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일을 한다고 스쿨버스가 집 앞에 오는 시간을 놓칠 뻔한 날이 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다 끝내고 갈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오래 걸려서 이제 와서 멈추고 떠나자니 조금만 더 하면 일이 마무리가 될 것 같고, 계속 이러고 있자니 버스를 놓쳐 애가 미아가 될 것 같아 발을 동동 굴렀다. 기적적으로 픽업 시간 직전에 겨우 일을 끝내고 미친 듯이 집 앞으로 달려가면서 '게으르고 느린 주제에 왜 이렇게 욕심 많고 벌린 일이 많을까. 이런 상황에도 뭐가 중요한지 몰라 결단하지 못하고 미적거리며 그곳에 머물 생각을 했다니 난 진짜 자격 없는 부모다.' 자책하는 마음이 들어 괴로웠다. 그렇게 달려서 숨을 헐떡이고 있는데 노란 버스에서 아이가 무사 태평한 얼굴에 해보다 더 밝은 웃음을 띠고 내리는 걸 보니 맥이 탁 풀린다.
괜히 나 혼자 지옥을 갔다 왔네? 이렇게 아무 일도 없을 건데......
그러고 며칠 후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는데 그 날 따라 힘든 아침이었다. 어린이집에서 챙겨 오라는 준비물이 많아 손이 무거운데 비는 오고 애는 비옷 모자를 쓰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려 차는 많이 지나다니는 길에서 소리를 꽥 질러 버렸다. '우산 들 손도 없어서 엄마는 비 다 맞으면서 준비물 들고 너 안고 길 건너가야 하는데 제발 모자 좀 써!' 토라진 아들이 울기 직전 얼굴로 등원하자 평소와 다른 모습에 선생님이 놀란다. '그냥 오늘 기분이 좀 안 좋은가 봐요' 했더니 선생님이 고백한다. 어쩌면 자기가 요즘 엄하게 해서 그럴지도 모른다고. 미끄럼틀에서 사람이 내려오는 쪽으로 올라가면 안 된다고 몇 번 말했는데도 눈치 살살 살피면서 장난치듯이 계속 그래서 미끄럼틀을 바로 못 타게 하고 1부터 10까지 센 다음에 타게 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규칙을 가르치는 차원에서 평소보다 조금 엄하게 대하지만 다른 선생님들은 다 받아 주고 자기가 놀이터에서만 악역을 담당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너도 하루 중에 힘든 순간이 있었구나.
놀이터에서 놀고 싶은 대로 못 놀고 혼나서 속상한 순간이 있었는데 엄마를 보는 순간 다 잊고 그렇게 환하게 웃으며 스쿨버스에서 내린 거였구나. 속상한 순간이 있었어도 '오늘 학교 재미있었어?' 물어보면 언제나 '응! 재미있었어!' 대답해 준 거였구나.
2. 한 모임에서 작은 다툼이 일어난 적이 있다. 사실 아직도 그 이유를 잘 알 수 없다. 다툼이라기보다는 한 사람이 섭섭하다고 감정을 토로해 내면 나머지 사람들이 쩔쩔매며 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느끼게 했다면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해명했는데 얘기가 끝나지 않고 계속 같은 지점을 맴돌아 밤을 새울 지경이었다. 결론이 나지 않은 채 '그냥 앞으로 잘해 보자' 하는 형식적인 화해로 대충 자리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마음이 무거워 잠이 오지 않았다. 열심히 일하고 누구보다 최선을 다했는데 다른 사람으로부터 지나치게 추궁당한 한 사람을 생각하니 나라도 위로를 건네야 하는 게 아닐까 싶었지만 많은 생각이 들어 주저했다. '내가 뭐라고? 내가 하는 말이 값싼 동정이나 주제넘은 참견으로 보이지 않을까? 친하지도 않은 애가 오버한다고 생각하진 않을까? 그냥 입 다물고 있어 주는 게 그분의 자존심을 지켜 주는 일 아닐까? 게다가 밤도 너무 늦었고.' 이렇게 망설이다가 시간이 너무너무 너무 늦어 버렸고 결국은 새벽 시간에 문자를 보냈다. 오늘 속상했을 텐데 마음 풀라고, 당신이 열심이고 진심이었던 것을 내가 안다고 메시지를 보내고 없어지지 않는 '1'을 보며 고민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어 경쾌한 어조의 짧은 답장이 밝은 이모티콘과 함께 내게 도착했다. 신경 써 줘서 고맙다고,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라며.
괜히 나 혼자 밤새 염려했네? 당사자는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은데......
맥이 탁 풀리면서 오지랖 떤 걸 후회했는데 그 후에 알게 되었다. 내가 어떤 일을 겪고 속상했지만 수많은 생각과 망설임 끝에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웃음 이모티콘까지 덧붙여 답장을 보내는 일이 있고서야.
그때 당신도 어떻게 답해야 하나 망설였겠네요. 아무렇지 않은 척하느라 고생했군요.
3. 괜히 나 혼자 애쓰는 것 같아 억울한 날이 있다. 괜히 나 혼자 신경 쓰고 사는 것 같아 지치는 날이 있다. 괜히 나 혼자 종종거리고 사는 것 같아 허무한 날이 있다. 괜히 나 혼자 애면글면하고 남들은 다 유유자적한 것 같아 머쓱한 날도 있다.
그럴 때 한 번 뒤집어 본다. 돌돌 말린 양말 까뒤집듯이 웃는 얼굴과 괜찮은 척하는 말들을 뒤집어 본다. 까맣게 탄 껍질 속에서 포슬포슬 노랗게 부서지는 군고구마 속살 같은 여린 마음 덩어리. 애나 어른이나 그렇게 점잖게 힘든 티 내지 않고 넘어가는 순간들에 서로 빚지며 삶을 감당하고 있다. 괜히 나 혼자 이렇게 사는 줄 알았다가 너 역시 그러고 사는구나, 깨닫는 순간에 가슴 뭉클해 아픈 것도 벌써 다 나았다.
일본 작가 Gotte의 햄스터 Sukeroku 시리즈 "I'll cure 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