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화(Lingnan Painting) 도전기 (1)

by 바다에 내리는 눈

어릴 적 우리 아빠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있었다.


"공부는 그냥 반에서 10프로 안에만 들 정도로 하면 돼. 체력 단련하고 악기도 할 줄 알고 많은 경험을 하는 게 중요하지."


어린 마음에도 '10프로 안에 들면 잘하는 거 아닌가?'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아빠에게 한 번도 직접 따져 묻진 않았다. 아빠의 어린 시절이 어땠는지 알고 있었으니까. 국민학교에서 전교 1등을 놓친 적 없었지만 너무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상급 학교에 진학할 수 없었던 그는 졸업 후 중학교를 가는 대신 목공소였는지 철물점이었는지로 며칠 일을 배우러 나갔다. 그러다가 지역 유지 어르신이 이런 학생이 공부를 그만 두면 너무 아깝다고 학비를 대 주어 겨우 중학교를 갈 수 있었다. 고등학생일 때는 대학생도 아닌데 똘똘하다고 소문이 나서 중학생을 가르치는 과외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해결했는데 아빠의 소원은 남 가르치는데 시간 뺏기지 않고 자기 공부를 원 없이 해 보는 거였다. 그러니 50명 중 5등은 그냥 놀면서도 하는 거로 생각한 거다. 는 자신이 돈과 시간과 기회가 없어 경험해 보지 못한 것들을 자식들에게 경험하게 해 주고 싶어서 우리를 여러 예체능 학원에 보냈다. 국영수야 교과서만 봐도 잘할 수 있지만 (?) 본인이 음치인 것이 어려서 악기 한 번 배워 보지 못하고 제대로 음악 한 번 들어본 적 없어서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아니 아빠, 음반 살 돈은 없어도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라도 들었을 거 아니야?"

"라디오가 어딨어? 집에 시계도 없었는데."

"뭐? 그럼 아침에 학교는 어떻게 시간 맞춰 갔어?"

"새벽에 일어나서 해뜨기 전에 느낌으로 나갔지."

"......"


아빠와의 대화는 늘 이런 식이었다. 겨우 한 세대가 지났을 뿐인데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로 척박한 시절을 지나 온 사람과의 대화는 이해되지 않는 여러 지점들에서 덜컹댔다. 돈이 없어 대학교도 아닌 중학교를 못 갈 정도의 가난이란 게 어떤 건지 와 닿지 않아서 딸은 아빠의 얘기를 흘려 들었다. 몇 번이나 같은 얘기를 들었는데도 목공소로 일하러 갔었다는 건지 철물점으로 갔었다고 했는지 기억도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외아들이라 사고가 나서 대가 끊기면 안 된다고 조부모님이 허락하지 않아 수학여행 한 번 가 본 적이 없다는 아빠가 방구석에서 움직이기 싫은 나를 각종 국내외 캠프와 여행에 참여시켰지만 귀찮아서 투덜대며 억지로 따라갔다. 사실은 참가비가 없어 수학여행을 가지 못한 아빠의 한풀이였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면 좀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기분 좋은 모습을 보여 줬을 텐데..... 아무튼 나도 철없는 어린아이였으니까.


그 모든 한풀이 투자의 결과물이 바로 오늘날의 어중간한 나이다. 피아노를 분명 체르니 40번까지 배웠지만 너무 어릴 때 그만둬서 분명히 배울 때는 잘 친다고 전공시키는 게 어떠냐는 권유도 받았다는데 지금은 손이 다 굳어 버렸고, 바이올린을 2년 동안 배웠는데 학원 가는 길에 만화방으로 빠지고 농땡이 쳐서 '반짝반짝 작은 별' 보다 어려운 곡 연주가 불가능하다. 그림도 못 그리는 편은 아니었지만 밑그림은 잘 그려 놓고 (연필로 그린 선은 마음에 들 때까지 계속 지워 가며 고칠 수 있으니까) 채색을 할 때 만족스럽지 않아 종이가 우글우글해질 정도로 자꾸 덧칠을 해서 적당한 선에서 채색을 그만두는 법을 배우기 위해 미술학원을 가 봤는데 결국은 완벽주의 기질 탓에 수채화를 잘 그릴 수 있는 법을 터득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연필만 사용하는 소묘를 아주 잘하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고등학교 때 미술 시간에 잘 그린 연필 소묘 작품을 몇 점 뽑아서 미술 선생님이 앞에 전시해 놓고 어떤 점이 좋고 어떤 점이 부족한지 설명해 준 적이 있는데 내가 그린 손은 잘 그리긴 했는데 너무 차가워서 사람 손이 아니라 로봇의 손 같은 느낌이라고 했다.


이렇게 음악, 미술 분야에 복숭아뼈도 안 닿게 야트막하게 발만 담그고 빠져나와 배워 본 척은 하지만 실체는 처참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어중간함'이 나이를 먹고 나니 아쉬워서 뒤늦게 태교를 빙자해 전자 피아노를 사기도 하고, 틈나는 대로 미술관과 공연장을 다녔다 (이마저도 아이가 태어난 후는 피아노 뚜껑을 열어 본 적 없고 마지막으로 공연을 보러 간 게 언젠지 가물가물하지만). 이러던 차에 최근 주변에서 영감을 받아 새로운 예술적 도전을 해 보기로 했다.


첫 번째 사례는 나의 인생에 울림을 주는 말을 남긴 여인들을 인터뷰하는 시리즈를 기획하고 스위스에 계신 '영임' 선생님을 인터뷰하다가 그분이 동양화를 다시 그려 보고 싶다는 꿈을 나눠 주셨던 것이 계기가 되었다 (https://brunch.co.kr/@snowflakesea/46). 재료 구하기도 힘든 스위스에서 동양화를 그리는 사람도 있는데 나는 홍콩에 살면서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싶어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그래서 검색을 통해 완차이에 있는 홍콩 미대 (Hong Kong Art School)에서 일반인을 위한 영남화 (Lingnan Paining) 주말반 강좌가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영남화? 난생처음 들어 보는 말이라 또다시 검색을 해 본다. 20세기 초 청 왕조가 몰락하고 새로운 국민정부가 들어서며 중국이 혼란에 빠졌을 때, 문화 전반에도 변혁이 일어났다. 각 지역에서는 새로운 사상과 학설을 연구하는 단체가 우후죽순 생겨났는데 영남 지역에서는 전통 중국화와 일본에서 익혀온 서양화 기법을 독창적으로 융합시켜 참신하고 독특한 화풍을 형성한 미술사조가 발생했고 이를 '영남화파'라 통칭한다고 한다 [1]. 영남 지역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의 그림을 배울 수 있다고 하니 이거야말로 홍콩에서만 가능한 예술 체험이구나, 싶어 구미가 당겼지만 몇 가지 장애물이 있었다. 첫째로 정부의 방역 지침 때문에 강좌가 실제로 개설될지가 불투명했고, 두 번째로 만약 개설된다 하더라도 10주 동안 꼬박 주말에 수업을 들으러 가야 하는 게 부담되었다. 사람 많은 주말 완차이 지역에 가서 모르는 사람들이랑 섞여 실내 공간에서 수업받다가 코로나라도 걸리면 3주 동안 격리 센터로 끌려가게 될 텐데, 하는 불안감도 무시할 수 없는 요소였다.


그러다가 브런치에서 '볕이드는창가' 작가님이 난징에서 서법 학원에 다닌 이야기를 읽게 된다 (https://brunch.co.kr/@jineye2199/124). 중국 사람들과 섞여 서법 배우기에 도전하고 일이삼( 一二三)과 같은 단순한 글자도 제대로 쓰려면 어렵다는 걸 깨달았다고 하는 글에 자극을 받아서 결심했다. 그래, 나도 안전한 버블 (bubble) 안에만 머물지 말고 현지인들과 어울려 새로운 걸 배워 보자!


홍콩 미대 측에 문의하니 아직 수강 인원은 차지 않았지만 거의 매주 단위로 바뀌는 정부의 방역 지침 때문에 개강 전 주까지는 실제로 강의가 열릴지 모르겠다고 한다. 강의를 열기로 결정이 나면 돈을 빼 가겠다고 하여 신용카드 정보를 비롯한 개인 신상을 담은 지원서를 작성하고 기다려 보았더니 몇 주 후 집으로 수강료 영수증과 안내문을 담은 나름의 합격 통보 편지가 왔다.

이 얼마나 오랜만의 합격이란 말인가, 비록 선착순일지언정.

비가 부슬부슬 오는 4월의 어느 토요일 아침. 드디어 첫 수업일이 되었다. 초행길이라 헤맬 수도 있으니 서둘러야겠다는 것은 그저 내 결심일 뿐, 주말에 애를 떼어 놓고 나오려니 뭐 이리 챙겨 놓고 나와야 할 게 많은지 아침 10시 반 수업인데 정말 딱 10시 반에 강의실에 도착했다. 와 보니 이미 다른 수강생들은 앉아서 뭔가 쓰면서 연습을 하고 있고, 두 명의 새로운 수강생들은 선생님 앞에 서서 안내를 받고 있다. 지각한 건 아니지만 내가 가장 늦게 왔다는 사실에 놀라 정신이 번쩍 든다. 일주일에 두 시간 빼서 붓질 좀 하다 갈 생각으로 대충 해선 안 되겠단 생각이 든다.


사실 그저 새로운 취미 생활을 시작했다는 한 줄로 끝날 이야기다. 뭐 하나 설명하려고 하면 개념 정의부터 하고 그것의 역사와 배경을 설명하며 듣는 이의 귀한 시간을 잡아먹는 박사병에 걸린 건지, 아무도 궁금하지 않은 유년 시절 일화와 특별한 것 없는 무용담을 늘어놓고 '라떼는 말이야~'가 입에 밴 중년이 된 걸 증명이라도 하는 건지 이렇게 또 서론이 길어졌다. 하지만 주말에 영남화를 배우기 위해 완차이에 나와 있는 수강생들 각자에게 그 교실에 이르기까지 거쳐 온 뒷이야기들이 있을 것이다. 한글 교실에 앉아 있는 노인들의 지나온 세월이 말하지 않아도 어떤 질곡의 시간이었는지 알 수 있는 것처럼, 우리 교실에도 꿈과 미련과 결심이 너울대고 있었다. '또 하나 어중간하게 하는 걸 늘릴 셈이야? 차라리 통계, 언어, 새로운 IT tool 등 살아가는데 필요한 기술을 연마하는데 시간을 투자해!'라는 내 안의 꾸짖는 목소리와 투쟁하여 힘겹게 확보한 이 시간에 생활인에서 노는 인간으로 자유로워지기를 소망한다.


[1] 영남화파 (2006), 황홍의 저/장정란 역, 미술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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