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춘절은 처음이라

2021년 2월의 기록

by 바다에 내리는 눈

춘절이 지난 지 벌써 일주일이 넘어가지만 홍콩은 아직도 신년 분위기다. 춘절 이후 15일간은 마주치는 회사 직원들이나 서비스직 종사자들에게 빨간 용돈 봉투 (라이시)를 주는 기간인지라 아직도 어딜 가나 유달리 친절해진 사람들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인사를 받고 있으니 말이다. 지난 글에서 빈 봉투는 잔뜩 생겼는데 아는 사람이 별로 없으니 봉투가 남을 것 같다고 내뱉었던 것은 나의 경솔한 착각이었다. 봉투가 남긴커녕 모자라서 더 얻어 왔다. 별로 줄 사람이 없을 줄 알고 10~20 홍콩달러 정도 넣으면 되는 봉투에 그것의 10배 넘는 돈을 넣어서 주었는데 생각보다 돌릴 데가 많아서 부담이 되는데 혹시나 직원들끼리 서로 비교해 보고 '너한테는 그만큼 주고 나는 왜 이것밖에 줘', 하고 불평할까 봐 액수를 줄일 수도 없다. 심지어 어젯밤에는 악몽까지 꿨다. 수영장에서 수영을 배우는데 미처 봉투를 준비하지 못했더니 수영장 직원들이 물을 빼 버려서 맨바닥에서 수영하는 꿈이었다. 보통 50군데씩 뿌려야 하는 라이시가 부담되어서 연휴에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휴가를 가 버리는 경우도 있다는 걸 듣고 웃겨서 지난 글에 썼는데 내가 지금 그런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그래도 길게 이어지는 춘절 분위기가 싫지 않다. 사실 1월에는 생일이 있어서 '또 한 살 먹었구나' 하는 씁쓸함과 억지로 새벽에 깨서 운동을 시작하고 성실하게 살아야 할 것 같은 의무감에 마음이 무겁다. 그런데 2월에 긴 춘절 연휴가 있으니 가라앉은 기분이 다시 들뜬다. 거리에는 용 장식이 보이고 우리나라의 사자탈춤 같은 용춤도 춘다. 왜 이렇게 용이 여기저기 보이나 했더니 춘절에 몸통의 반은 용, 반은 사자 모습의 괴물 녠(年)이 사람들을 공격한다는 전설이 있어서 그렇단다.


쇼핑몰 앞의 용 장식

녠은 붉은색과 시끄러운 소리를 싫어한다고 해서 중국인들은 붉은 옷을 입고 시끄럽게 폭죽을 터뜨리며 신년을 맞이한다. 아이의 어린이집에서 중국 전통의상을 입혀 보내라고 하길래 재래시장에 가서 용이 그려진 어두운 남색 옷을 사서 입혔는데 나중에 어린이집에서 찍은 사진을 보니 우리 아이를 제외한 전원이 붉은색 계열의 전통의상을 입고 있었다. 아마도 그 날 시장 상인은 현지인들이 선호하지 않아서 재고로 남을 게 분명한 남색 옷을 나에게 떠넘기면서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지도 모른다. 코로나 여파로 명절 대목에도 썰렁한 시장 분위기에 마음이 약해져서 흥정도 제대로 못하고 비인기 색상 제품을 집어 들고 돌아선 한 한국인의 희생으로 조금이라도 그 가게의 춘절이 따뜻해졌기를 바랄 뿐이다.


홍콩에서는 신년이 아니라 하더라도 일상 중에 용의 존재감을 느낄 기회가 많다. 바다 근처의 건물들이 대부분 '용문'을 갖고 있기 때문에 드라이브를 하면서, 산책을 하면서, 창 밖을 바라보며 때때로 용을 떠올리게 된다. 처음엔 그런 건물들을 보면서 '왜 중간에 저렇게 구멍을 뚫어 놨지?'하고 의아했는데 산에 사는 용이 바다에 매일 내려가야 하는데 높은 건물에 부딪혀 못 갈까 봐 건물 중간에 용이 지나가는 구멍을 만들어 놨다고 한다 [1]. 고급 아파트는 시원하게 큼직한 용문을 뚫어 놨고 서민 아파트는 형식적으로 아주 작은 용문만 뚫어 놓고 같은 면적에 한 세대라도 더 지어 놓은 걸 볼 수 있다. 용은 항상 하늘로 승천한다고 생각했지 산에서 바다로 내려갈 거란 생각은 못해 봐서 같은 용에 대해서라도 중국 문화와 한국 문화는 사고방식이 참 다르구나, 싶다. 풍수지리는 중국 문화지만 본토에서는 80년대까지 미신을 엄격하게 배격하는 공산당의 기조 때문에 풍수지리 사상에 의거한 건물을 지을 수 없어서 용문이 있는 건물은 홍콩에서만 볼 수 있다는 얘기도 있다.


용문 (Dragon Gate) 출처 Millevache / WikiCommons

명절이라면 사실 어른보다는 아이들이 들뜨는 시기 아닌가. 내가 어릴 때엔 세뱃돈을 받으면 엄마가 가져가서 잘 쓰시고 내 소유를 주장할 수 있을 만큼 커서 엄마한테 절대 뺏기지 않게 되었을 때엔 그 돈으로 음반 CD나 청바지를 사는 재미가 있었는데 요즘 애들은 게임기나 아이패드 같은 고가의 물건을 사거나 심지어 주식 투자까지 한다니 세상이 많이 변하긴 변했다. 우리 아들도 엄마가 열심히 여기저기 봉투 뿌리는 만큼 뭔가 받아 오긴 하는데 아쉽게도 애들이 받아 오는 봉투 안에는 동전 모양의 초콜릿 한 알이 들어 있는 게 보통이다. 그나마도 기쁘게 받으면 좋으련만 부의 신 (财神)으로 분장한 아저씨가 무서워서 안 받겠다고 내뺀다.


수염이 너무 길어서 아들이 무서워 한 차이션

이러다가 아이가 명절 트라우마가 생기면 어쩌나 싶다. 스위스에 있을 땐 검은 산타를 보고 자지러진 적이 있다. 스위스는 좋은 산타 (자미클라우스 Samichlaus)와 나쁜 산타 (슈므쯜리 Schmuzli)가 있어서 나쁜 산타는 온통 까만 옷으로 차려 입고 말을 안 들은 말썽쟁이 아이들의 선물을 뺏어 간다. 좋은 산타라고 해서 마냥 좋기만 한 것도 아닌 게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는 걸 가르쳐 주려는 것인지 그냥 선물을 주는 게 아니라 애들을 불러서 시를 외우게 하고 시를 외운 것에 대한 보상으로 쿠키나 땅콩을 준다. 스위스 전통 크리스마스 문화를 알고 참 지독하게 스위스답다고 생각했는데 (좋게 말하면 규율을 강조하고 검약하는, 사실대로 말하면 뻣뻣하고 짜다) 요즘은 살짝 그립다. 아들이 말을 안 듣는 날 (매일)이면 홍콩에도 슈므쯜리 도입이 시급하다는 생각이 든다.


슈므쯜리와 자미클라우스에게 억지로 안겨 있는 아들

현지인들은 나에게 하필 이럴 때 홍콩에 와서 첫 춘절이 시시하니까 아쉽겠다고 한다. 원래는 폭죽도 터뜨리고 시끌벅적 요란한 행사도 많고 거리의 장식도 더 화려한데 코로나 때문에 다 취소되어 올해 춘절은 정말 별로였다고. 하지만 이런 시시한 춘절도 처음 겪으니 나름 재미있었다. 라이시 봉투에 얼마를 넣어야 하는지, 어디까지 돌려야 하는지 잘 몰라 실수하고, 붉은 옷을 입어야 액운을 쫓는데 파란 옷을 입고, 산타클로스보다 무서운 부의 신에 놀라서 도망가는 이런 소동들이 조용한 춘절에 찬란한 빛깔들을 칠해 잊지 못할 기억들을 선물해 주었으니까. 어쩌면 첫사랑처럼 처음이라 더 특별했던 춘절 연휴가 지나간다.


[1] Why Do Some Buildings in Hong Kong Have Holes in Them? by Matthew Keegan, 11 October 2018

https://theculturetrip.com/asia/china/hong-kong/articles/why-do-some-buildings-in-hong-kong-have-holes-in-them/


이전 12화[홍콩] 봉투 선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