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훈 중독자

by 바다에 내리는 눈

엄마의 말로는 내가 아주 어릴 때 외출을 하면 어딜 가는데 오래 걸렸다고 한다. 길가에 핀 꽃 하나하나를 들여다보느라 꽃이 핀 자리를 떠나질 않아서였다. 돌쟁이였을 때는 엄마 배 위에 올려놓고 TV 외화 '초원의 빛'을 보고 있는데 주인공이 우는 장면에서 아기였던 내가 따라 울었다나? 피아노 선생님이 결혼을 한다고 그만두었을 땐 더 이상 보지 못하는 게 슬퍼서 훌쩍이며 선생님이 가르쳐 주신 곡을 처연하게 쳤다느니 하는, 엄마의 시선으로 MSG가 듬뿍 들어가 각색된 영유아기 시절 일화를 들어 봐도 날 때부터 감수성이 풍부했던 건 사실인 것 같다. 지금도 일상의 사소한 장면이나 예술 작품에서 깨달음과 감동을 자주 받는 편인데 이런 감성이 나에게는 복이지만 같이 사는 사람에게는 때로 괴로움인가 보다. 책을 읽고 감명받은 문장을 소개하거나, 남편의 고민을 상담해 주거나, 창문 밖으로 떠오르는 태양을 보면서 내가 감탄을 시작하면 남편은 '이 여자가 또 무슨 교훈을 주려고 그러나' 하는 표정으로 긴장한다.


남편의 지인 중에 아버지가 교육학 교수이신 친구가 있다. 온갖 교육학 이론에 빠삭한 전문가답게 대한민국의 여타 무뚝뚝한 아빠들과는 달리 자식과의 대화를 중요하게 여겨 기회만 되면 끊임없이 아들에게 말을 걸고 소통을 하려 했다고 한다. 그리고 매 번 대화할 때마다 그 상황에서 도출할 수 있는 교훈을 아들에게 심어 주고자 했다.


"뭘 보고 있니?"

"월드컵 예선이요."

"방금 공격수가 자기보다 골대에 더 가까이 서 있는 동료 선수에게 공을 양보하지 않고 무리하게 본인이 슈팅하다가 결국 골을 넣지 못했네. 봤지? 네가 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되어도 세상 일이란 게 다 협업인 거야. 때로는 내가 다 끌어안는 것보다 남에게 양보하고 기회를 주는 게 장기적으로 보면 나에게 더 득이 되어 돌아오는 법이지. 지금 당장은 내가 일한 공을 다 빼앗기는 것 같아 억울해도, 그래서 남에게 기회를 주지 않다가 득점을 못하느니 남에게 양보해서 우리 팀이 1점을 얻으면 나도 역시 승자가 되는 거야. 협업이 바로 승리의 비법이란다, 자 예를 들어 우리 아무개의 학교 생활에서도......"

"아, 쫌! 그냥 축구 보면 안 돼요?!"


아버지와의 소통이 늘 이런 식이어서 교훈적인 대화에 질려 버린 아들은 친구들과 얘기할 때도 조금만 진지하게 대화가 흘러가면 질색하곤 했다. 남편은 이 친구 얘기를 나에게 하면서 세상만사에 가르침을 주려고 하는 대화의 부작용을 모르겠냐며, 이러다가 우리 애도 나중에 너랑 대화 거부할지도 모른다고 경고를 한다. 그러면 내가 섭섭해져서 부부싸움이 시작된다. '지금 내 말 듣기 싫다는 거야? 들으면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좋은 말을 해 주는데 그렇게 귀 닫고 소통 거부해 봐라. 다 네 손해지!'


하지만 이렇게 씩씩대면서도 마음 한 구석엔 찔리는 데가 있다. 내가 정말 그랬나?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건 듣는 사람이 판단할 몫인데 내 감흥을 항상 강요했나?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항상 주관을 개입해서 유익한 교훈을 쥐어 짜내는 병에 걸렸나? 나는 꼰대인가? 이런 질문들이 피어오르면 김이 팍 새면서 일상 속에서 얻은 소중한 감상들로 멋지게 채색된 삶이 갑자기 쓸데없는 줄글이 들어찬 흑백 신문지처럼 초라하게 구겨지는 기분이 든다.


사실 나도 저 '아, 쫌!'을 들어본 적이 있다. 예전에 미술관에서 전시를 보면서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이해하고자, 마음에 다가오면 다가온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기뻐서, 쉴 새 없이 쫑알대며 같이 간 친구에게 예술작품에 대한 내 감상을 나누었는데 친구가 조용히 부탁을 하는 거다.


"우리 이제 그냥 말 안 하고 보기로 하자."


내 감상이 남에게 방해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못했던 배려 없는 수다쟁이가 처음으로 일격을 당한 거다. 그 후로는 (늘 실패하기는 하지만) 밖에 나가서는 하고 싶은 말의 반만 하려고 노력하는데 집에 있으면 편해서 그런지 남편과 아들에게는 아직도 끊임없이 교훈 주는 버릇을 못 고쳤나 보다. 변명을 하자면 나는 이미지보다는 활자에 탐닉하는, 철저하게 문자 중심으로 생각하는 인간이라서 그런지 이런저런 감상이 오면 그냥 마음속에 이미지로 담아 놓을 수가 없다. 그것을 밖으로 끄집어내어 문장으로 완성을 시켜야 직성이 풀리는 인간이다. 그래서 미술관에 가서도 전시관 초입에 쓰여 있는 소개글의 한 글자라도 빼놓을까 봐 꼼꼼히 읽고 거기에 쓰여 있는 낯선 단어들을 수집한다 (예전 tvN '알쓸신잡'이란 프로그램에서 작가 유시민이 미술관이든 유적지든 여행을 가면 쓰여 있는 글자는 하나도 빼놓지 않고 읽는다고 했을 때 나와 같은 버릇을 갖고 있는 사람이 또 있구나, 해서 반가웠다). 심지어 미술관에 가서도 그림 그 자체보다는 작가의 삶과 그림이 그려졌을 때의 배경 같은 이야기에 더 관심을 갖고 감동을 받는다. 미술에 문외한이라 좋은 작품을 구별할 수 있는 눈이 없어서 그런 것 같아 작가의 이름이나 거창한 예술 사조에 휘둘리지 않고 작품 그 자체를 느끼려고 하지만 아직은 잘 안 된다.


얼마 전에는 샤틴에 있는 홍콩 문화 박물관 (Hong Kong Heritage Museum)에서 영남화의 거두 차오샤오안 (1905-1998)의 작품들만 모아 놓은 전시관에 [1] 오래 머물렀다. 그 전이라면 한국 수묵화랑 뭐 별다를 것도 없네, 하고 쓱쓱 지나쳤을 테지만 영남화를 배우고 나니 그림 하나하나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기교와 기개를 갖고 있는 게 보여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저렇게 곤충과 나비의 날개를 표현했지? 동물의 털 표현도 기가 막히네. 작은 소품은 오밀조밀 앙증맞게, 대작들은 비전형적이면서 강렬하게 구도도 기똥차게 잘 잡았구나.'


그렇게 그림 그 자체에 집중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나는 '이야기'에서 더 큰 감동을 받는다는 걸 차오샤오안의 서재를 재현해 놓은 걸 보고 깨달았다. 대가는 어떤 문방사우를 썼나 하고 유심히 보았는데 대부분 제자들의 선물이었다는 소개글을 읽으니 중국 역사소설이나 대하사극에서 나올 법한 스승과 제자 사이의 존경, 의리, 사랑 이런 것들이 느껴지는 거다. 또한 선생님이 쓰는 종이와 다른 걸 사서 내 그림이 이상하다고 탓했던 게 떠오르며 (내가 서점에 가서 산 종이는 먹물을 흡수하지 않고 토해내서 그림을 망친다. 왜 화선지에 코팅이 되어 있는 것 같지?) '대가는 연장을 탓하지 않는 법이로구나, 명품 붓만 썼을 것 같은데 제자들이 선물해 주는 거라면 상관하지 않고 그냥 썼구나, 이런 대가도 아무 붓이나 썼는데 내가 뭐라고 종이를 탓했나' 하는 깨달음이 덤으로 왔다. 제자들이 선물한 붓도 다 명품이었을 가능성에는 애써 눈 감음으로써 감동과 반성의 정도를 극대화시키고 흡족스러워하는 교훈 중독자가 바로 여기 있었다.

차오샤오안의 책상

전시관을 돌아보다가 차오샤오안의 일대기를 다룬 30분짜리 다큐멘터리 영화를 인내심 있게 보았는데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소나무 그림에 얽힌 뒷이야기를 듣고는 '아 오늘 이거 하나 건져 가는구나!' 싶었다.


차오샤오안, '소나무' 1963

광조우 미술관에 있는 이 작품은 차오샤오안이 일본에 갔을 때 특이하게 생긴 소나무를 보고 밑그림을 그려 놓고 어떻게 그릴지 계속 구상하다가 10년 후 아이디어를 재방문하여 (revisit) 완성한 대작이라고 한다. 어떤 이슈나 생각, 대화, 과거의 일을 revisit 한다는 표현을 좋아하는데 마치 기억과 생각이 내 안에 그것들만의 작은 방을 한 칸씩 차지하고 있다가 내가 조심스럽게 똑똑 문을 두드려 재방문하면 자기들을 잊지 않고 있었음에 감사하며 다시 문을 열어 주어 빛을 보는 그런 느낌이기 때문이다. 어떤 경험도 하찮지 않고, 어떤 구상은 오래 묵어야 완성된다. 시시해 보이는 아이디어, 별 거 없는 일상, 흔해 빠진 이야기라 할지라도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는 대신 간단한 스케치로나마 간직하고 있다가 때가 무르익어 내가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을 때 풀어 보면 의미 있는 작품이 될 수 있다. 이 얼마나 감동적인가! 다큐멘터리를 보지 않았다면 이렇게 영감이 되는 이야기를 영영 몰랐겠지!


소나무 그림보다는 소나무 그림을 10년 동안 구상해서 그렸다는 이야기에 더 감동받는 한계가 단점일 수도 있겠지만 어쩔 수 없다. 이게 나인 걸. 감흥을 함축적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또 주저리주저리 떠들어 대서 다른 사람의 감상의 자유를 망쳐 버렸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래도 계속 털어놓고 싶은 걸.


소통은 하되 가르치려 들지 않는 것, 솔직하되 묻지도 않은 것은 답하지 않는 것. 중용은 늘 어렵다.



[1] Chao Shao-an Gallery

https://www.heritagemuseum.gov.hk/en_US/web/hm/exhibitions/permanent_exhibitions/permanent_chaoshaoan.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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