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결혼 생활을 원한다면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사소한 몸의 변화도 괜히 임신 증상처럼 느껴져서 온라인 맘 카페에 자주 들어가 글을 정독하곤 했었다. 병원을 가는 게 당연히 더 빠르고 정확하지만, 산부인과를 가기에는 별일 아닌 거 같기도 하고 혹시라도 의료진분들이 친절하지 않아서 마음이라도 상할까 봐 인터넷 글을 더 많이 찾아보게 되었다. 스크롤을 내리다 보면, 임산부인데 남편이 가사 노동을 하나도 하지 않기 때문에 너무 힘들다는 내용, 아이를 낳았는데 육아는 거의 혼자 하고 있고 남편은 일하느라 지쳐 도와줄 엄두도 못 낸다는 내용, 아이가 어려 말도 안 통하고 답답한데 주변에 친구도 없고 남편은 너무 바빠서 외롭다는 내용 등 사랑하는 아이를 품고, 낳아 기르며 가장 행복해야 할 시기에 우울감과 좌절을 호소하는 수많은 '엄마'들의 하소연을 접하게 된다. 내가 여성이라서 더 그런 걸 수도 있겠지만 분명 임신의 과정엔 남성과 여성이 함께하는데 육아에 한해서는 너무 "한쪽"에게만 희생을 요구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덧: 혹여나 '남자는 돈 벌어오잖아. 여자는 집에서 하는 일이 뭐 있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더 이상 읽지 마시고 뒤로 가기를 눌러주세요. 누추한 페이지까지 왕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부모님 세대에 비하면 여성의 사회 진출이 폭발적으로 많아졌기 때문에 여성의 권익이 이전과는 다르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한국일보의 2020년 7월 30일 자 기사에 따르면 여성의 '독박 가사'는 여전하다. "평일 가사노동에 10분이라도 참여한 남자 비중은 5년 전보다 8.4% 포인트 상승한 60.8%인 반면, 여자는 0.6% 포인트 오른 91.6%였다. 직전 조사인 2014년에 비해선 남녀 격차가 완화됐지만 '가사노동은 여성의 일'이라는 고정 성역할 인식이 여전한 셈이다. 부부가 모두 일을 하는 맞벌이 가구에서도 양상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맞벌이 가구 남편은 지난해 하루 평균 54분 간 가사노동을 한 반면, 아내는 3시간 7분이나 했다. 아내가 2시간 13분 더 가사노동에 참여한 것이다. 심지어 아내만 취업한 외벌이 가구에서도 아내의 가사노동시간이 2시간 36분으로 남편(1시간 59분)보다 37분 더 길었다. 이런 여성의 '가사 독박' 현상은 다른 나라와 비교해도 압도적인 수준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에 따르면, 15~64세 기준 한국의 가정관리 시간은 여자가 2시간 25분, 남자가 39분으로 1시간 46분 차이가 난다. 반면 미국은 2018년 기준 남자가 1시간 31분 가정관리에 참여해 여자와의 차이가 1시간이었다. 영국(1시간 10분), 캐나다(49분), 네덜란드(54분) 등에서도 1시간 남짓 차이가 났다. 한국보다 성 역할이 더 고정된 나라는 여자가 2시간 34분 더 가사노동을 하는 일본 정도였다."(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0073010270001965?did=NA) 비단 '전업주부'만 가사 노동을 하는 것이 아니고 맞벌이 가정의 여성들도 가사 노동에 남성들보다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남녀는 평등하다'라고 교육받고, 또 그렇게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지만 당장 앞선 통계만 봐도 '평등'이라는 느낌을 찾아보기 어렵다.
유년시절 가끔 텔레비전에서 최수종이라는 탤런트 아저씨가 보기 드문 사랑꾼이자 공처가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남편들의 적'이자, '아내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라고 했다. 최근 어떤 방송을 봤는데 최수종 아저씨는 여전히 그런 수식어로 불리고 있었다. 어렸을 때는 잘 몰랐는데, 결혼하고 나서 그가 방송에 나와서 하는 말이나 행동을 보니 왜 그런 말을 듣는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다른 남성 연예인들과 다른 점을 알게 되었다.(덧: 그가 실제 지인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그의 '진짜'모습이 무엇인지는 논외로 한다.)
최수종은 그의 아내 하희라를 타자화하지 않는다. 남성 연예인들이 방송에 나와 아내 이야기를 할 때 가장 거슬렸던 게 자신의 아내가 자유를 구속하는 사람인양 표현하는 것이었다. 분명 좋아서 한 결혼이 아닌가? 내가 진지하기 때문이 아니라, 정말 순수한 의문이었다. 아내를 독불장군이자 집안의 경제권을 모두 쥐고 쥐꼬리만 한 용돈으로 한 달을 살라고 명령하는 독재자처럼 묘사해서 대체 무슨 이득이 있을까. 그리고 그런 개그는 재미도 없다. 그런 남성 연예인들은 자신의 발언을 농담으로 치부하며 웃으며 넘어가겠지만 그런 발언들이 한편으로는 아내에 대한 남편들의 (이를테면) 적대감을 돈독하게 해 주는 것 같다. 적어도 최수종은 그의 발언에서 항상 하희라와 한 팀인 것처럼 이야기했고 나는 '결혼 한 남성'으로써 그런 발언들이 바람직하다고 느꼈다. 앞에서 가사 노동과 관련된 수치를 예로 들기도 했지만, 최수종 아저씨는 집안일도 열심히 하겠지. 그는 빨래를 개고, 밥을 짓고, 어쩌면 그 나이 대의 남성은 해 본 적도 없고 귀찮고 성가실 일들을 척척 한다. (적어도 방송을 보니, 처음 해본 솜씨는 아닌 것 같았다.) 결혼은 최수종 같은 사람만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이라는 단어를 생각할 때, 가사노동, 힘든 육아, 책임감 등을 먼저 떠올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는 그래서 결혼 생활이 더 힘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이제 아무도 안 해준다. 나는 독립된 가정을 이뤘고 엄마를 떠나왔다. 결혼 자체가 행복한 행위이자 이벤트가 아니고, 부부 당사자들이 책임감을 가지고 서로 노력해서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지 누군가 나 대신 아침을 지어주고, 나 대신 애를 키워주고, 나 대신 빨래를 다 도맡아줘서 행복한 게 결혼 생활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결혼은 최수종 같은 사람만 해야 한다"라고 했을 때 친구가 "그럼 너는 하희라냐"는 말을 하긴 했지만, 적어도 행복한 가정은 아내 혼자, 남편 혼자, 혹은 각자가 아니라, 함께 만드는 것이라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그리고 아직까지 가정을 위한 훈장 없는 희생을 요구하는 태도는, 어떤 한쪽에 더 많이 치우쳤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