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수능이라도 칠 판... 어디로 가야 하죠 아저씨
원래도 독서를 좋아했지만 대학원에서 문학을 공부하면서 난 이런 게 좋다는 깨달음이 왔다(아이러니하게도 석사 졸업은 하지 못하고 수료로 끝났지만). 뭔가 체계가 생겼다고 하나, 뼈대가 생겼다고 해야 하나. 겉으론 세상 한량처럼 보였을지 몰라도 나에게는 두꺼운 책 한 권과 하루종일 씨름하면서 창 밖도 보면서 다 식어버린 커피를 홀짝대는 게 일생일대의 즐거움이었다. 마음을 저릿하게 만드는 부분에 밑줄도 긋고, 오랫동안 그 문장을 바라보기도 하고, 그 마음이 너무너무 커서 넘칠 듯 넘실거릴 땐 SNS에 와 미쳤다-라는 글과 함께 사진으로 찍어 올리기도 했다. 그게 나의 가장 큰 쾌락이자 사치였다. 적어도 내면은 굉장히 부지런했던 거 같다. 계속해서 새로운 지식을 갈구했다. 계속 읽고 싶었다. 임신 중에도 몸은 부지런히 움직이려고 했다. 남편은 바란 적도 없는데 열심히 반찬을 만들었다. 쓸고 닦았다. 만삭 때까지 화장실 청소도 열심히 했다. 물론 낮잠도 이따금씩 자곤 했지만 뭔지 모를 열심이 있었다. 아이를 낳고도 돌 쯤까지는 계속 정신없이 살았다. 여느 엄마들이 다 그렇겠지만.
갑자기 생각이 난다. 만삭 때였는데 어느 날 남편과 둘이 TV를 보고 있는데 남편이 내 무릎에 난 털들을 보고 웃었다. 좀 길었기 때문이다. 나는 '나 고3이야. 내버려 둬!'라고 외쳤고 남편과 나는 낄낄거렸다. 만삭땐 발톱 깎는 것도 쉽지 않았는데 다리털쯤이야. 그렇다고 남편한테 밀어달라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나 고3이야.'는 약간 핑계를 댈 때 쓰는 무적의 문장이 되었다. 시간이 조금 흘러 이제는 아이도 어린이집에 가고, 약 6시간 이상을 혼자 쓸 수 있게 되었지만 나는 그 시간이 낯설다. 온전히 내 것도 아니고 아이의 것도 아니고. 물론 짧은 시간은 아니지만.
나는 아직도 내가 '고 3 같다.' 수능이 끝나기를 기다리지만 지금은 어쨌든 공부만 해야 되는 고3. 멋을 부려도 안되고 재밌는 걸 해서도 안 되는 고3. 어디 중간에 껴있는 고3. 어쨌든 내 인생이 끝나지 않은 건 나도 안다. 근데 뭘 시작할 수 있는지는 아직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