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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이지 Jan 02. 2024

언니들이 생겼다

멋있으면 다 언니

“아니, 아는 사람 아무도 없는 곳에 어떻게 살아? 너도 참 대단하다.”

지방으로 간다고 하면 다들 이렇게 얘기한다. 연고가 있냐고. 학연, 지연, 혈연을 펼쳐 뭐라도 걸쳐 있는지 묻는다. 어차피 아파트에 사는데도 반응은 늘 이렇다. 서울로 이사한다고 하면 이렇게 말하지 않을 텐데 말이다.


새 출발을 하듯 아는 사람 아무도 없는 곳에서 살고 싶었다. 은퇴 후에 벌어진 사무실 상황에서 멀어지고 싶었다. 그동안 일하면서 너무 많은 말을 했다. 누구시더라…. 내 기억력을 의심하는 상황에 놓일 만큼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부동산 앱에서 찾아본 주요 후보지들을 둘러보다 이 도시로 이사하기로 최종 결정한 것도 동네가 조용해서였다. 구도심 외곽, 새롭게 조성한 택지개발지구라 교통도 나쁘지 않고 부족한 인프라는 차차 갖춰질 것 같았다. 무엇보다 내 집이 아니므로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 다른 도시로 떠나리라 마음먹었다. 자연히 만나는 사람들과도 적당한 거리를 두었다.  


동네 친구 모임이 만들어진 건 A언니 덕분이었다. 우린 도서관 프로그램을 함께 듣느라 매주 만나는 사이였다. 어느 날 A언니가 B에게 ‘비슷한 또래’인 것 같다고 넌지시 나이를 묻는다. 사실 질문이란 관심의 표현인데, 여덟 살 차이가 나니 살짝 민망해졌으리라.  

“제가 그렇게 나이 들어 보이나요?”

농담처럼 던진 B의 말이 걸렸던지 며칠 뒤 A언니가 밥을 사겠다고 했다. 50대 언저리에 있는 사람들은 나이 가늠하기 힘들다고, 다들 본인이 나이 든 건 인식하지 못하니 그럴 수 있다고 했지만, 아무튼 시작은 그때부터였다.


모든 모임이 그렇듯 돌아가며 한 번씩 밥이나 커피를 산다면서 드문드문 만났고, 이왕이면 정례 모임으로 만들자 해서 매달 뭉친다. 함께 인문학 강좌를 들었던 막내 C(그도 오십 줄에 들어섰지만)까지 충원해 우린 넷이 됐다. 날씨 좋으니 가볍게 산에 오르자, 커피 쿠폰이 생겼다, 이번에 내가 영화표 쏜다, 다양한 ‘꺼리’가 우리를 만나게 했다. 새롭게 누군가를 만나고 엮이는 걸 꺼렸던 나도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가볍게 만났지만 우리는 진지하다. A언니는 살짝 예순이 넘었지만 여전히 일을 하고 싶어 한다. 분 단위로 스케줄을 짜며 일했던 사람이라 여전히 바쁘게 움직인다. 체력 관리도 열심히 하고 배우는 데도 열심이다. 얼마 전엔 시에서 뽑는 일자리에 지원했다가 미끄러져 위로 겸 번개 모임을 했다. 아무래도 면접에서 실수를 한 것 같다고, 우리에게 참고하라고 당시 상황을 말해준다. 우린 혹시 내정된 것 아니겠냐고 삐딱하게 말하는데 언닌 자기가 부족해서라고 일축한다. 그리고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일할 수 있을 때 기회를 잡으라고 조언한다. 그런 얘기를 들으면 다들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B는 1년여 꾸준히 서예 학원에 다니고 있다. 작품전 준비하는 것 아니냐고 했더니 아직 많이 부족하다고 미루고 있다 한다. 전업주부였기에 아이들이 독립한 뒤 허전한 마음이 들 법도 한데 나름의 루틴을 잘 만들고 있는 듯하다. 눈이 아파 책을 못 읽는다고 했는데 어느 날 독서용 돋보기를 발견했다고 좋아라 하더니 요즘엔 도서관에 자주 가는 모양이다. 우리 모임이 소소한 변화를 만들어가는 모습이 보기 좋다.


이제 더 이상 함께 듣는 강좌는 없지만 우린 여전히 도서관을 사랑한다. 얼마 전 서가에서 이슬아 작가의 신간을 발견해 읽었다고 했더니 C가 말한다.

“그거, 제가 희망도서로 신청한 건데….”  

“정말?”

반가웠다. 나와 취향이 비슷하다는 생각에 더욱 친밀한 느낌이 들었다. 무엇보다 아직 아이들 챙기느라 바쁠 텐데 우리들이랑 함께 해줘서 고맙다. 슬쩍 떠넘긴 총무 역할을 기꺼이 해주며 칼같이 N분의 1로 자동이체 하게 하니 그것도 편하다.




얼마 전, 아파트 게시판에 자원봉사자를 모집한다는 공고가 붙었길래 신청했다. 커뮤니티 센터에 <어린이 도서관>을 만들 계획이라고 한다. 뭔가 보람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세밑이라 선뜻 하겠다고 마음먹은 건지도 모른다. 그 얘기를 했더니 A언니가 잘했다고 칭찬한다. 자원봉사도 이력서에 한 줄 올릴 수 있는 경력이 된다고. 역시 큰 그림을 보는 사람, 무슨 일이든 해보라고 격려하는 사람. 그저 아이 있는 엄마들보다는 시간이 많고, 책을 좋아하는 아이들을 볼 수 있다니 재밌겠다 싶어서 지원한 건데 모르겠다. 그림책을 맛깔스럽게 읽어주는 재주는 없지만 도서관을 찾아온 아이들에게 미소를 날려줄 자신은 있다.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2024년에 새롭게 그리고 싶은 기분 좋은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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