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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이지 Jan 29. 2024

괜찮다, 안 아프다

아, 아버지….

추모공원(납골당)의 2층 휴게 코너엔 늘 볕이 잘 든다. 한파가 몰아닥친 날씨인데도 창밖 풍경은 평화롭다.

2년 전 그날은 다행히 날이 많이 춥지 않았다. 상조회사 리무진 버스에서 내리는 우리를 맞이하며 직원이 얘기한다.

“겨울인데 이렇게 날이 따뜻한 걸 보니 고인이 좋은 분이셨나 봐요.”

기분 좋으라고 건네는 덕담인 줄 알면서도 아버지는 그런 얘길 들으실 만한 분이라고 생각했다.


어느새 이렇게 시간이 지났구나.

언제부터였을까. 세수를 하고 가만히 거울을 들여다보면 내 얼굴에서 아버지 모습이 보인다. 혼자 웃음 짓는다. 많이 닮긴 했네….


때론 아직도 어딘가에 계실 것만 같다. 카페에 앉아 계신 분의 옆모습을 보고 아버지인가 싶을 때(카페 같은 데 오실 분이 아님에도), 식당 옆 테이블에서 코다리에 막걸리를 드시는 어르신들을 뵐 때(아버지도 어디선가 소주 한 잔 하고 계시지 않을까), 휴게실에서 호두과자 봉지를 들고 가는 사람들을 볼 때(그때처럼 사위 먹으라고 호두과자를 건네실 것 같아서), 이렇게 설 명절이 다가올 때(딸이 빨리 오길 기다리시겠지) 아버지 생각이 난다. 그리고 어디에서도 뵐 수 없는 아버지의 부재에 가슴이 아려온다.


살아생전 아버지가 내게 하신 말씀을 담는다면 하루치나 뵐까. 정말 아버진 말씀이 없는 분이었다. 집안 내력처럼 무뚝뚝함의 대명사였다.

그래도 난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싶었나 보다. 동생이 태어난 뒤, 난 아버지가 동생을 더 예뻐하신다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동생을 안고 있는 흑백 사진. 눈이 부셔하는 살짝 찡그린 표정의 동생과 활짝 웃고 계신 아버지. 마치 내가 그 현장에 있던 것처럼 선명하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내 사진이 없을 리가 없는데. 아무튼 부러웠고 샘이 났다.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아버진 학교에서 돌아온 내게 늘 “1학년, 꼴학년!”이라고 놀렸다. 내가 싫은 표정을 지을수록 더했다. 장난스러운 아버지가, 마치 고무줄을 끊고 도망가는 남자애들 같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다음엔 초등학교 4학년 무렵이었을까. 그 바쁜 아버지가 운동회 하는 날 학교에 나타났다. 아버진 내가 몇 반인지도 몰랐을 텐데, 그 많은 애들 속에서 나를 찾은 게 신기하다. 아마도 엄마가 수술을 하셨던가, 무슨 일이 있어서 못 오셨던 것 같다. 아버진 주머니에서 한 뭉치나 되는 현금 다발을 꺼낸 다음 내게 맛있는 거 사 먹으라고 지폐 몇 장을 쥐어 주셨다. 그때 아이들 표정이란. 와~ 너네 집 부자구나! 그 말에 철없이 우쭐댔던 기억이 난다.


세월이 흘러 대학 졸업식. 아버지와 엄마가 번갈아 사각모를 쓰고 사진을 찍는다. 아버진 지금의 내 나이보다 젊고 멋있다. 고집스러운 딸을 뒷바라지하느라 얼마나 고생하셨을까.


부끄러운 기억도 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야학일을 할 때였다. 수업 끝나고 뒤풀이를 하면 늘 시간이 촉박했다. 매일 1호선 막차를 타기 위해 뛰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전속력으로 달렸는데 막차를 놓쳤다. 수중에 돈도 없고, 하는 수없이 엄마한테 택시비 좀 들고 나와 달라고 전화했다. 택시에서 내리는데 멀리 아버지가 보인다. 택시 기사에게 돈을 건네주고 내게 한마디 하실 법한데 아무 말씀도 안 하신다.

“아이고, 저걸 빨리 시집보내든지 해야지 원. ”

엄마의 잔소리보다 아버지의 걱정스러운 표정이 더 무겁게 다가왔던 그날이 새삼 떠오른다.  




“아버지, 저.. 집에 내려갔다가 다시 올게요.”

“나도 가냐?”

“아니. 아버진 여기 계셔야지.”


잠깐 잠드셨는지 내가 간다는 말에 화들짝 놀라신다. 우리집에 가고 싶으셨을까.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으니 가지 말라고 잡고 싶으셨을까.

아버지와의 대화는 그게 마지막이었다.  

아버진 시간이 더럽게 안 간다고 투덜거리시기도 하고, 섬망 증세가 와서 횡설수설하시기도 했다. 그러다 큰 고비를 넘기시더니 조금 안정되신 듯했다.


그로부터 열흘 전이었던가. 아버지가 그런 말씀을 하신 건 처음이었다.

“이렇게 깨끗이 목욕도 했으니 내일 아침에 그냥 갔으면 좋겠다.”

아버지 방에 나 혼자 있을 때였다. 그때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말걸. 나는 잠자코 있다가 “아버지 마음대로 하셔….”라고 대꾸했다.

차마 아버지의 표정을 살필 순 없었다. 그저 방바닥만 쳐다볼 뿐이었다.  

어떻게 딸이 돼 가지고 그런 말을 했을까. 그렇게 약한 소리 하시지 말라고, 기운을 내시라고, 그게 될 말이냐고 해야 하는데, 나는 그때의 아버지가 너무 힘겨워보였다. 아버지가 이제 그만 내려놓으셨으면 싶었다.


아무리 힘을 내고 먹으려 해도 식도를 옥죄는 암덩어리 때문에 밥알조차 넘기지 못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지켜보는 게 힘들었다.

목구멍에 달라붙어 있는 가래를 뱉어낼 때 내는 그 힘겨운 소리를 듣는 것도 괴로웠다. 가래를 뱉어내느라 화장실을 자주 오가시는 게 안타까웠던지 요양사가 페트병을 잘라 가래받이 통을 만들어 준 게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어느새 가득해지는 그 분비물을 보는 것도, 가래 뱉는 소리를 배경으로 자식이라는 것들이 꾸역꾸역 밥을 먹는 것도 고역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모를 그 아득한 표정과, 뼈밖에 남지 않몸을 마주하는 게 괴로웠다. 당신 몸을 누구에게도 맡기지 않으려 한사코 혼자 목욕탕으로 들어가시는 그 안간힘이 안쓰러웠다.


3년은 살지 않겠냐고 했던 당신의 바람과 달리 아버지의 병은 깊었다. 암 진단을 받았을 때 이미 림프절을 통해 온몸에 암이 퍼진 후였다.

지금도 의아한 것은 많이 아프시냐는 말에 단 한 번도 아프단 말씀을 하시지 않은 점이다. 그저 머리가 좀 아프다 정도였다. 늘 괜찮다고만 하셨다. 그땐 다른 장기에 전이되지 않아서 그런가 보다 생각했는데, 암이라는 녀석이 그렇게 호락호락할 리가 없지 않나. 오후에 오는 요양사가 따뜻한 수건으로 찜질해 드리면 좋아하셨다니, 자식들 걱정할까 봐 그 고통을 참아내셨던 걸까. 진통제로 그냥 버티신 걸까.


힘들다고 하시지…. 아버진 그런 분이었다.

난 어른이 되면 모두 아버지 같아지는 줄 알았다. 생선 가시를 발라 자식들에게 좋은 살만 얹어주는 그 마음은 저절로 생기는 줄 았다. 그런데 아비라고, 어미라고 다 그렇지 않다는 걸 주변에서 많이 본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아버지에 대한 고마움과 사랑짙어지는 듯하다. 내가 이제야 철이 드는 걸까.

아버지가 보고 싶다. 다시 만나 뵐 수 있다면 아버지 듣기 좋은 말씀을 많이 해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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