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에서 보았던 인터뷰가 생각난다. 노익장 뮤지션 중 한 명이 말한다.
“내가 살아생전에 하고 싶은 일들이 있었는데 다 이룬 것 같네요. 하나, 최소한 나무 한 그루를 심어야겠다….”
인상적이었다. 하고많은 소원 중에 이 땅에 나무 한 그루를 남기겠다는 그 마음.
그 인터뷰를 보며 나는 언제 나무 한 그루 심을 내 마당, 내 정원을 가져볼까 생각했다. 그림책 <작은집 이야기>에 나오는 언덕 위 작은 집과, 내 아이들의 아이들이 타고 놀 그네가 매달린 나무를 떠올렸던 것 같다. 인터뷰의 의도와 다르게 나는 영원히 내 소유로 남을 나무만을 상상했다.
그런데 나무 한 그루가 아니라 18만 평 부지의 수목원을 세상에 남긴 이가 있다. 미군 장교로 우리나라에 와서 한국은행에서 일했던 민병갈(1921~2002) 박사이다. 그는 자신을 키워준 나라에 가치 있는 일로 남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수목원을 개발하기로 결심한다. “당시 한국은 너무 가난하여… 아름다운 화초나 여러 가지 식물에 대한 관심은 감당할 수 없는 사치”라고 여겨지던 때였다. 한국 최초의 민간 수목원인 천리포 수목원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지난 주말 드디어 천리포 수목원에 다녀왔다. 지난봄에 갈까 했는데 아직 꽃이 피지 않았다고 미루다가 가을 문턱에 이르러서야 가게 되었다.
안내도를 따라 걷기는 했는데 아마도 반의 반도 못 보았을 것이다. 다시 안 올 것처럼 샅샅이 보려 하지 않았고, 식물 이름이 적힌 팻말도 꼭 알고 싶은 것만 참고했다. 세월에 따라 조화롭게 자리잡은 식물군락들이 무엇보다 반가웠다.
한여름에 예뻤을 연꽃이 없어도 하늘이 담긴 연못은 아름다웠고, 작은 오리가 노니는 듯한 작은 논의 가을 정취도 정겨웠다. 구불구불 이어진 길을 걷다 보면 길을 잃을 것 같고, 군데군데 뱀을 조심하라는 표지판도 보이지만 하나도 무섭지 않다. 마치 비밀의 정원에 발을 들인 듯 두근거린다. 큰 나무 아래 꽃무릇이 핀 바로 그 자리에 마치 조명이 켜지듯 햇빛이 비치면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빛깔에 황홀해진다. 그 찰나를 놓칠세라 사진에 담아보지만 역시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억새가 이렇게 탐스럽게 높게 자랄 수도 있던가. 수목원 입구 쪽에 핑크뮬리도 있지만 제아무리 은은한 핑크빛이라 해도 수목원 억새에는 밀릴 듯하다. 높다랗게 자란 억새와 가을 하늘은 환상적인 조합이다. 식물 이름이 붙은 군락을 오르내리다 보면 자연스럽게 서해 바닷길로 이어진다. 잠시 벤치에 앉아 윤슬이 반짝이는 바다를 바라본다. 해질녘은 아니지만 낙조를 기다리던 그리스 이드라 섬의 추억이 떠오른다. 세상 걱정이 사라지는 평화로움,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자연의 경이로움 때문일 것이다. 이 아름다운 공간을 남긴 이에게 경외감마저 느껴지는 순간이다.
천리포수목원은 당연히 식물이 돋보이는 곳이다. 민병갈 기념관도 세월과 함께 낡았고 편의시설도 작은 카페 2곳이 전부다. 온전히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며 걷고 호흡하면 된다. 그런데 가든스테이가 있는 언덕 너머에서 공사장 소음이 들려온다. 리조트를 짓는 중이란다. 수목원을 품은 리조트라고 홍보하며 이 공간을 전유할까 두렵다. “나의 수목원이 정말로 가치 있는 곳이 될지는 미래가 결정할 문제”라고 말한 민병갈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들리는 듯하다.
천리포수목원 가을축제는 오는 19일부터 시작한다. 사실 언제 가 보아도 좋은 곳이다. 봄날 목련이 필 땐 또 얼마나 아름다울까. 내년 봄엔 잊지 않고 다녀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