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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유 Apr 20. 2024

순도 100%의 불행은 없다

<우리는 누군가의 사랑받는 아이였다> (클랩북스, 2024) 중

실연의 상처로 울던 여주인공은 한밤중에 냉장고를 뒤져 양푼이 가득 밥을 비빈다. 입이 터져라 밥을 욱여넣는 그 모습에선 마음의 허기로만 볼 수 없는 어떤 동물적 배고픔이 느껴진다. 그래, 아무리 슬퍼도 배는 고프고 비빔밥은 밤에 먹는 게 더 맛있다. 웃기려고 작정한 드라마라지만 저 장면만은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어떤 사람도 깨어 있는 내내 울 수는 없다. 먹고 자고 숨을 쉬듯 울음 사이에도 웃음이 끼어든다. 삶은 그렇게 이어진다.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어도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그 겨울, 장례식장 손님들이 돌아가고 자리에 누웠다. 뜨뜻한 장판에 몸을 뉘이니 금세 노곤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불현듯 졸음이 밀려와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그때 낮은 상다리 너머로 나처럼 누워 있는 누군가가 보였다. 검은 상복을 입은 어깨는 어둠 속에서 연신 들썩이고 있었다. 잠들 시간이 지났는데 아직도 울고 있는 걸까, 안쓰러운 마음에 조심스레 다가갔다. 그런데 그는 우는 게 아니었다. 모로 누워서 핸드폰 속 개그짤을 보며 숨죽여 웃고 있었다. 순간 맥이 탁하고 풀려서 그만 웃음이 났다. 그제야 내 그날 처음으로 웃었다는 걸 알았다. 떠난 이에게 잘하지 못한 게 죄스러워 웃는 것도 잊었다. 하지만 가족의 죽음이란 비현실적인 상황 앞에선 차라리 웃는 게 나았다. 웃음은 내가 아직 현실에 발을 딛고 살아있다는 걸 알려주었다.


살아보니 ‘순도 100퍼센트의 불행’이란 건 없었다. 더 이상 추락할 수 없을 것 같은 순간에도 붙잡을 곳은 있었다. 절망 속에도 아주 작은 희망이 살아 있었고, 울다가도 잠깐은 웃을 일이 생겼다. 물론 불행의 한가운데서 행복을 찾기란 어렵다. 당장 괴로워 숨이 넘어갈 판인데 누군가 다가와선 시간이 약이다, 다 지나간다, 언젠가 그땐 그랬지 할 거다, 같은 한갓진 소리나 하고 있으면 화가 치민다. 그런 말은 남에게서 들을 말이 아니라 내가 나에게 해줄 말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충분히 슬퍼하고 나서야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러니 일단은 마음껏 슬퍼할 수 있도록 나를 기다려주어야 한다. 대신 슬퍼도 밥은 먹자. 잠을 자자. 웃음이 나오면 참지 말고 웃자. 당신은 그래도 된다. 무엇보다 우는 데도 많은 힘이 들기 때문이다. 


아빠와 동생이 차례로 세상을 떠났을 때 참 많이 울었다. 원래부터 눈물이 많은 나는 굳이 눈물을 참지 않는다. 이제 겨우 만 세 살이 된 아이는 처음에 엄마가 우는 모습을 보고 낯설어 하다가 저 때문인 줄 알고 속상해했다. 그런 아이를 끌어안아 눈을 맞추고 제대로 이야기해주었다. 


"엄마는 지금 이모가 너무 보고 싶어서 우는 거야. 너 때문이 아니야.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아이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휴지를 가져와서 내 얼굴을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엄마, 이모가 보고 싶으면 울어도 돼요. 괜찮아요. 내가 있잖아요."


제법 어른스레 나를 위로하는 아이에게 환하게 웃어주었다. 우는 모습도 웃는 모습도 아이에게 감추지 않은 건 누구에게나 슬픔이 자연스러운 감정이라는 걸, 충분히 슬퍼해야만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는 걸 내 삶으로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깊은 슬픔 사이에도 언제든 기쁨이 끼어들 수 있다는 것 역시. 


충분히 울고 나면 조금씩 다른 관점에서 문제를 볼 여유가 생긴다. 눈앞의 문제에서 약간만 시선을 옮겨도 문제 너머의 의미가 보인다. ‘그 일’이 꼭 일어났어야 했다는 건 아니다.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이미 일어났다면 고통이 알려주는 삶의 의미를 찾자는 것이다. 바로 그 의미가 나에게 살아갈 힘을 준다. 


코칭에선 세상 모든 일에 양면성이 있다고 말한다. 이런 양면성을 발견하기 위해서 일부러 형용사가 적힌 단어 카드를 뒤집어 반대말을 보도록 한다. ‘변덕이 심하다’는 ‘눈치가 빠르고 유연하다’로, ‘우유부단하다’는 ‘협력적이고 조화롭다’로 재해석된다. 마찬가지로 내가 어찌 할 수 없는 불행을 겪을 때도 나쁜 면만 보며 낙심하거나, 좋은 면만 보며 안심하지 않는다. 모든 경험의 양면성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내 행복에 도움이 되는 면에 더 집중할 수 있다. 


이렇게 내 삶을 균형 있게 바라보면 무엇을 해야 할지가 보인다. 작은 것부터 하나씩 행동으로 옮겨본다. 천천히 가도 된다. 삶을 바꿀 수 있는 아주 사소한 행동이면 된다. 이를테면 집 주변의 상담센터를 검색해보는 일 같은 것이다. 바로 상담을 받지 않아도 된다. 정말 버틸 수 없어질 때 나를 도와줄 상담자를 최후의 보루로 남겨두는 것이다. 날마다 '어제보다 딱 1센티미터만 앞으로 나아간다'는 마음으로 무엇이든 실천해보자. 그런 날들이 하나둘 모이면 조금씩 어둠 밖으로 벗어나게 될 것이다. 


죽고 싶을 만큼 힘든 날도 있지만 살아서 다행이다 싶은 좋은 날도 분명히 온다. 그러니 나는 당신이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이 글은 <우리는 누군가의 사랑받는 아이였다>(클랩북스, 2024)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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