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누군가의 사랑받는 아이였다>(클랩북스, 2024) 중
나는 초조하게 손목시계를 힐끗거리며 문제를 풀고 있다. 시험지엔 뜻 모를 암호만 가득하다. 입술이 마르고 손바닥에 땀이 찬다. 눈을 들어 보니 친구들은 편안한 얼굴로 문제를 풀고 있다. 모두가 여유로운 교실에서 나만 불안한 것 같다.
“그만! 뒤에서부터 답안지 걷어오세요.”
선생님의 차가운 목소리가 정적을 가른다. ‘백지 답안지를 낼 순 없지. 일렬로 줄이라도 세우자.’ 절망적인 기분으로 정신없이 마킹을 한다. 그리고 땡! 이제 성적은 운에 맡겨야 한다.
살면서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있을 때마다 이 꿈을 꿨다. 정해진 시간 안에 정답을 찾아야 한다는 압박감, 혼자만 낙오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운에라도 기대보고 싶은 절박함…. 복합적인 감정이 뒤얽혀서 이런 꿈을 꿨던 것 같다. 대입을 앞두고 있던 열아홉 살, 이직과 결혼을 고민하던 스물아홉 살에는 이 꿈을 더 자주 꿨다.
처음엔 이 꿈이 그저 싫었다. 잠에서 깨고 나면 물먹은 솜처럼 몸이 무거워졌고 온종일 기분이 찜찜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나는 왜 이 꿈을 반복해서 꾸는 걸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때 알았다.
내가 인생의 모든 문제에 수학 문제처럼 ‘정답’이 있다고 믿었다는 걸. ‘정답’은 하나뿐이니까 그걸 찾으면 행복해지는 거고, 찾지 못하면 뒤처지는 거였다. 마음속으로 이렇게 내 인생 등수를 매기고 있으니 무섭고 초조하고 절망적일 수밖에. 게다가 이런 인생엔 ‘제한 시간’까지 있었다. 대학은 언제까지 가야 하고, 취업은 언제까지 해야 하며, 결혼은 몇 살쯤엔 해야 한다는 제한 시간 말이다. 누구도 정해놓지 않았지만, 모두가 암묵적으로 지키고 있는 그런 제한 시간이었다.
학교를 졸업해도 달리기 시합은 계속되었다. 이제는 직장과 결혼으로 주제만 바뀌었을 뿐이었다. 내가 이 시합의 패배자가 될 거라는 게 점점 더 분명해졌다. 서른을 세 달 앞두고 사표를 내는 것으로, 나는 시합에서 스스로 기권해버렸다. 회사엔 “쉬면서 진짜 하고 싶은 일을 찾아보겠다”고 호기롭게 외쳤지만 실은 그냥 지쳐서였다. 나보다 잘 나가는 친구를 보는 것도 여기저기 친구 결혼식에 불려 다니며 들러리 서는 것도 싫었다.
그냥 아무도 나를 모르는 나라로 훌쩍 떠나버리고 싶었다. 질 것이 분명한 경기에서 계속 달리느니 기권해 버리는 게 나았다. ‘못한’ 게 아니라 ‘안 한’ 거라고 하면 차라리 폼날 것 같았다. 그래도 아무런 계획 없이 사표를 내려니 불안했다. 사표를 내는 두 손이 덜덜 떨렸다는 걸 직장 상사도 느꼈을까.
그런데 이상했다. 사표를 내고 돌아서는 순간, 마음이 개운해졌다. 마치 깊은 잠을 자고 일어난 것처럼. 그즈음 나는 심한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말이다. 살고 있던 오피스텔 전세를 빼고 네팔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 데 일주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경유지 공항 벤치에 내 지친 몸을 뉘었을 때 기분 좋은 뻐근함이 심장에서 몸통으로 다시 팔다리로 뻗어나갔다. 나는 이제 자유였다! 그날은 아주 오랜만에 단잠을 잤다.
네팔에서는 삶이 단순해졌다. 매일 뭘 먹을지, 뭘 볼지, 어디서 잘지만 결정하면 되었다. 별것 없는 삶의 루틴 속에서 조금씩 내 삶의 주인이 나라는 감각을 되찾았다. 이제는 남들과 경쟁하느라 내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내 속도로 천천히 걸어도 되었다. 마음에 드는 곳에선 좀 더 머물고, 내키지 않는 곳은 건너뛰어도 되었다.
오래전부터 도전하고 싶었던 안나푸르나 트레킹에 나섰을 때의 일이다. 트레킹 셋째 날 아침에는 히말라야에서도 해돋이가 아름답기로 소문난 해발 3,210미터의 푼힐 전망대에 올랐다. 새벽 네 시, 숙소를 나설 때만 해도 친구들과 함께였지만 도중에 친구들을 먼저 올려 보냈다. 제대로 된 등산을 해본 적도 없고 허리디스크까지 있던 나는 트레킹 내내 홀로 뒤처졌었다. 눈물, 콧물이 다 흘러내릴 만큼 춥고 힘든 등산길이었다. 몇 번이나 포기하고 싶었지만, 그럴 때마다 마음속으로 나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고 싶어? 포기할 거야?’ 다행히도 매번 ‘가보고 싶어. 끝까지 가볼래’라는 대답이 들려왔다.
이미 해가 떠서 주위가 밝아졌다. 마침내 다리엔 아무런 감각이 없어졌다. 정상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이 손사래를 치며 “날이 흐려서 아무것도 안 보이니 내려가는 게 좋을 거야”고 말해 주었다. 그래도 나는 내 마음의 목소리를 따라서 계속 산을 올랐다. 마침내 푼힐 전망대에 올랐을 땐 주위 360도가 온통 짙은 안개에 가려져 있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던 내가 자랑스럽고 뿌듯했다.
사람들의 말대로 멋진 풍광은 볼 수 없나보다 생각하며 내려갈 채비를 할 때였다. 갑자기 사람들이 “와아아아” 환호성을 질렀다. 고개를 드니 한순간 안개가 걷히고 그림처럼 아름다운 안나푸르나의 설경이 펼쳐졌다. 보고 있어도 믿을 수 없는 마법 같은 풍경이었다. 마치 하늘이 나에게 주는 선물 같았다.
해발 5,000미터에 있는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ABC)를 목표로 했던 나는 푼힐 전망대에서 발길을 돌렸다. 함께 간 친구들은 모두 ABC로 올라갔다. 예전 같으면 그들과 나를 비교하며 속상해했겠지만 그때는 그러지 않았다. 내 정상은 푼힐 전망대라는 걸 받아들였다.
안나푸르나를 여행하는 많은 여행자가 ABC를 최종 목적지로 삼는다. 그러나 ABC도 결국 전문 산악인의 베이스캠프일 뿐이다. 여행의 목적지는 사람마다 다르다. 각자의 정상이 있고, 각자의 코스가 있다. ‘여행에서 남들과 나를 비교하지 않듯이 인생에서도 줄 세우기를 그만두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그날 처음으로 해보았다.
나는 오늘도 나의 산을 오르며 살아간다. 그 산은 높지도 낮지도 않은, 나에게 딱 알맞은 높이다. 나는 늘 빠른 길 대신 삐뚤삐뚤 둘러서 난 길을 택하며 살아왔다. 그 편이 더 아슬아슬하고 재미있기 때문이다. 길이 고르지 않으니 넘어질 때가 많다. 그때마다 힘들다고 불평하며 주변 사람들을 괴롭히지만 걸음을 멈추진 않는다.
멀리서 보면 이제 꽤 나답게 산을 오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예전보다 남의 인정을 덜 바라고 나를 더 돌본다. 틈틈이 풍경을 바라보며 감탄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품는다. 그렇게 달리기 시합 대신 등산 하듯 살아가는 지금의 삶이 나는 퍽 마음에 든다.
아, 더는 수학 시험 보는 꿈을 꾸지 않는다. 인생에 정답이 없다는 걸 안 순간부터 그 꿈을 꾸지 않게 되었다. 정답은 없지만 나만의 답은 찾고 있다. 오직 그 답만이 나를 행복하게 해줄 것이다.
*이 글은 <우리는 누군가의 사랑받는 아이였다>(클랩북스, 2024)의 일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