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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유 Apr 20. 2024

당신의 생애 첫 기억은 무엇인가요

<우리는 누군가의 사랑받는 아이였다>(클랩북스, 2024) 중

흙먼지가 날리는 누런 시골길 위로 할아버지의 낡은 자전거가 달린다. 흰머리가 듬성듬성한 할아버지는 도망치듯 페달을 밟는다. 뒷자리엔 흰 원피스를 입고 짧은 머리칼을 나풀거리는 여자아이가 앉아 있다. 서너 살 정도 된 여자아이는 나다. 저 멀리 엄마가 까만 점이 되어 사라져 간다. 엄마는 한 번도 나를 돌아보지 않는다. 나는 서럽게 운다. 어제도 그제도 헤어진 엄마지만 오늘은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



이건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오래된 기억이다. 내가 어릴 때 엄마는 아침마다 나를 친가에 맡겼다가 밤이면 집으로 데려가곤 했는데, 나는 그걸 엄마에게 버림받은 순간처럼 기억하고 있다. 엄마가 다신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는 두려움. 가족 중 나만 버려졌다는 소외감. 어른이 되어서도 그 부정적인 감정들은 쉽게 잊히지 않았다. 


심리학자 아들러는 ‘생애 첫 기억’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우연한 기억이란 없다”고 말했다. 개인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경험 중 자신의 상황과 관련이 있다고 느끼는 경험만 ‘선택적으로’ 기억한다는 것이다. 생애 첫 기억은 내가 나를 어떤 사람으로 보는지와 관련이 있다. 다시 말해 생애 첫 기억 때문에 내가 나를 이렇게 보게 된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이렇게 보기 때문에 그 기억을 생애 첫 기억으로 골랐다는 것이다. 그래서 생애 첫 기억은 만들어진 기억인 경우일 때가 많다고 한다. 주변에서 들은 일화나 사진 같은 기억의 파편들을 조합해 만든 가짜 기억이라는 것이다. 진짜 기억이든 가짜 기억이든 간에 생애 첫 기억에는 큰 의미가 있다. 그 기억은 나의 핵심 감정과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엄마는 왜 세 아이 중 나만 친가에 맡겼을까. 내가 다른 형제보다 못나서였을까. 진실은 이랬다. 몸이 약했던 엄마는 아이 셋을 한 번에 키우기가 힘들었다. 친가에선 한 아이만 맡아주기로 하고 나를 데려갔다. 제법 자라 엄마 손을 덜 탄 오빠나, 날 때부터 골골댄 동생보단 뭐든지 잘 먹고 건강한 내가 적당해 보였던 것이다. 물론 할아버지, 할머니는 나를 아껴주었다. 모두가 무서워하던 호랑이 할아버지도 내게는 나긋나긋했다고 한다. 


내가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된 건 어이없게도 아이를 낳고 나서였다. 아이를 키우다 보니 그때 엄마가 왜 그랬을까 궁금해져서 처음으로 물어봤다. 구구절절 설명을 듣고 보니 너무 허무해서 웃음만 나왔다. 왜 나는 한 번도 엄마에게 직접 묻지 않았을까. 왜 혼자 상처받고 있었을까. 그러나 진실을 알고 나서도 달라진 건 없었다. 버려짐에 대한 과도한 불안이나, 남과 나를 비교하는 열등감, 무리에서 겉돈다는 소외감은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았다. 그건 왜일까.


모범생 형제들 틈에 자란 나는 늘 열등감이 많았고 내향적인 성격 탓에 나만 소외되고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었다. 그래서 수많은 기억 중 저 기억을 내 생애 첫 기억으로 떠올린 것이다. 무릇 기억이란 반복 재생되는 동안 점점 강렬하고 선명해지는 법이라, 내 기억도 그렇게 긴 세월 덧칠되고 부풀려졌을 것이다.


‘기억은 일종의 약국이나 실험실과 유사하다. 아무렇게나 내민 손에 때로는 진정제가, 때로는 독약이 잡힌다.’


영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은 프랑스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이 문장으로 시작된다. 나에게는 이 문장이 ‘기억을 진정제로 쓸지 독약으로 쓸지는 너의 선택에 달렸다’는 말로 읽혔다. 주인공 폴의 첫 기억은 ‘독약’이었다. 그 기억은 ‘천사 엄마와 악마 아빠’로 요약된다. 아기 폴이 처음 “아빠”라고 옹알이를 한 순간 엄마는 기뻐했지만, 아빠는 폴을 돌아보며 무서운 표정을 짓는다. 폴은 이 기억 때문에 모든 가족사진에서 엄마와 자신만 남기고 아빠를 오려낸다. 


두 살 때 부모를 잃고 실어증에 걸린 폴은 두 이모와 함께 산다. 이모들이 운영하는 동네 댄스 교습소에서 피아노를 치는 그에게 유일한 낙은 매일 사먹는 달콤한 슈케트(Chouquette·겉에 설탕이 붙은 속이 빈 빵)다. 그런 폴이 우연히 같은 아파트에 사는 마담 프루스트를 만난다. 마담 프루스트는 집 안에 자신만의 비밀정원을 갖고 있다. 그녀의 비밀정원에서 딴 아스파라거스로 끓인 차와 달콤한 마들렌을 먹고 추억이 담긴 레코드판을 틀면 추억 속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 폴도 그 비밀정원에서 몇 번의 꿈을 꾸는 동안 아빠에 대한 오해를 푼다. 폴은 엄마 아빠가 서로를 뜨겁게 사랑했으며 부모님도 자신을 사랑했다는 걸 비로소 알게 된다. 


“(부모의) 죽음이 그 애를 못 살게 하는 게 아냐. 쳇바퀴 도는 삶이 문제지. 그 애에게 필요한 건 바로 충격이야. 어른들이 가만 놔두면 그 애는 평생 두 살로 살 걸.” 


마담 프루스트는 처음 만난 순간부터 폴의 문제를 알아본다. 그가 말문을 닫고 부모에게서 심리적으로 독립하지 못한 건, 사실 과거의 기억 때문이 아니라 현재의 삶 때문이라는 것을 말이다. 폴의 두 이모는 폴을 사랑했지만 어떻게 사랑해야 될지는 몰랐다. 그를 아기처럼 보살피며 과잉보호하거나, 피아니스트가 되라고 강요하기만 한다. 폴이 부모에 대해 양극단의 감정을 갖게 된 데도 이모들의 시선이 투영됐다. 폴의 부모는 집안이 반대하는 결혼을 했기 때문이다. 


영화의 원제인 ‘아틸라 마르셀(Attila Marcel)’은 사실 아빠의 이름이다. 폴은 아빠에 대한 오해를 풀면서 다시 가족사진을 이어 붙인다. 마지막 장면에선 드디어 말문을 튼다. 늘 부정했던 자신의 반쪽을 긍정하는 것으로, 진짜 어른이 된 것이다. 폴과 폴의 아빠는 같은 배우가 연기했다는 건 그래서 더 재미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내게도 마담 프루스트처럼 커다란 나무 같은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비밀정원에서 나쁜 기억을 하나하나 좋은 기억으로 바꾸는 상상을 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영화는 영화일 뿐, 과거로 돌아가는 마법 같은 일이 내게 일어날 리 없다. 그리고 과거의 기억을 바꾼다고 해서 현재의 내가 달라지지 않는다는 걸 이제 잘 알고 있다. 대신 나는 마담 프루스트가 폴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를 기억하기로 한다.


"나쁜 추억은 행복의 홍수 아래 가라앉게 해. 네게 바라는 건 그게 다야. 수도꼭지를 트는 건(홍수를 내는 건) 네 몫이야. 네 인생을 살아."


나쁜 기억을 말끔히 잊겠다는 게 아니다. 좋은 기억으로 나쁜 기억을 덮어버리자는 것이다. 언젠가부터 나는 행복한 순간을 핸드폰에 바로바로 적어둔다. 아이의 재롱을 바라보며 남편과 웃음을 터뜨리는 순간, 마음 맞는 친구와 취향을 공유하는 순간, 내가 하는 일로 인정받으며 으쓱하는 순간, 아름다운 공간에서 예술적 영감을 받으며 감탄하는 순간, 홀로 여행하며 나로서 존재하는 순간…. 그 모든 순간 속에 보석처럼 행복이 반짝인다. 그 순간은 짧아서 더 아름답다. 


그 찰나의 행복을 기억하려고 오늘도 글을 쓴다. 그건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도 아니고, 자랑하려고 쓰는 글도 아니다. 그저 나만이 가끔 꺼내 보는 그 글들은 나만의 비밀정원이다. 나의 비밀정원에는 이제 행복한 기억이 불행한 기억보다 많아졌다. 그렇게 하나하나 나의 이야기를 고쳐 쓰는 동안, 나는 과거에서 조금씩 벗어난다. 



*이 글은 <우리는 누군가의 사랑받는 아이였다>(클랩북스, 2024)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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