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누군가의 사랑받는 아이였다> (클랩북스, 2024) 중
그날 교실의 공기는 여느 때와 달랐다. 반 친구들은 단정한 자세로 앉아서 세상 착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선생님은 입 꼬리를 올린 채 연신 어색하게 웃었다. 우리 모두 뒷자리의 엄마들이 몹시 신경 쓰였지만 애써 태연한 척했다.
“자, 오늘은 각자 써온 글을 한번 읽어볼게요. 누가 해볼까요.”
우리는 미리 연습한 대로 자연스럽게 손을 들었다. 오늘만은 모두가 모범생이 되기로 선생님과 약속했으니까. 나도 손을 높이 들었다. '설마 날 시키겠어'하는 마음이었다. 그래서 선생님이 나를 지목했을 때 그만 머리가 하얘지고 말았다. 주춤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짝바짝 입술이 말랐다. 간절한 눈빛으로 선생님을 바라봤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선생님은 인자한 표정으로 내 발표를 기다릴 뿐이었다. 이제 피할 수 없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글을 읽어나갔다.
“제목.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은 나 자신이다….”
넓은 교실이 한순간 조용해졌다. 작은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날 나는 사람들 앞에서 내가 나를 싫어하는 이유를 줄줄이 읊어 나갔다. 이제 와선 그 글이 어떤 내용이었는지, 그날 발표가 어떤 분위기로 끝났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기억나는 건 우주의 먼지가 되어 사라지고 싶었다는 것뿐이다.
어쩌자고 나는 작문 과제로 그런 글을 쓴 걸까. 남들처럼 평범하게 시험이 무섭다든가 겨울이 지겹다든가 하는 내용을 적었으면 좋았을 걸. 아니면 아이답게 가지나 브로콜리가 싫다는 이야기나 적었다면 모두가 웃고 넘겼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어쨌든 그 글은 진심이었고, 예나 지금이나 나는 글을 쓸 때 지나치게 솔직한 편이다.
성경에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구절이 나온다. 늘 이해가 안 되었다. 도대체 누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걸까. 나처럼 스스로가 모자라고 서툴고 부족해 보이는 사람에겐 차라리 남을 사랑하는 일이 더 쉬워 보인다. 그런데 세상엔 나 같은 사람이 많은 것 같았다. 서점에 있는 책들이 모두 ‘나를 사랑하자’고 외치는 걸 보면 말이다. 하지만 거기 적힌 대로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일은 내게 멀고 어렵게만 느껴졌다. 오랜 세월 익숙해진 열등감, 소외감, 자기 비난과 어떻게 하루아침에 작별할 수 있을까.
그래도 ‘나를 사랑해야 행복해진다’고 하니 나도 나를 사랑하고 싶었다. 다만 방법을 몰라서 내 식대로 나를 사랑했다. 속상한 일이 있을 땐 속이 쓰리게 매운 음식을 먹으며 기분을 풀었다. 매일 퇴근하면 좋아하는 드라마를 정주행하며 공허한 마음을 달랬다. 딴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좋아서 쇼핑에만 몇 달치 월급을 쏟아 부었다. 그래도 채워지지 않는 마음의 허기는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나며 풀었다. 만족감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텅 빈 지갑과 불어난 몸을 보며 내가 더 미워졌다. 악순환이었다.
오랜 시간이 흐르고서야 내가 나를 사랑한다고 했던 모든 행동이 ‘진짜 사랑’이 아니었다는 걸 알았다. 진짜 사랑을 배운 건 연애를 하면서였다. 처음 누군가를 사랑하면 온종일 그 사람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은 무엇인지, 성격은 어떤지, 무슨 일을 하는지, 취미는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의 모든 것이 궁금해진다.
분위기 좋은 곳에 가면 꼭 그와 다시 오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가 힘든 일이 생겼다고 하면 제일 먼저 달려가서 위로해주고 싶고, 좋은 일이 있다고 하면 덩달아 마음이 설렌다. 함께 있는 시간이 점점 늘어나면서 그의 일이 내 일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가 항상 건강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매일 안부를 묻는다. 더 이상 완벽해 보이지 않아도 장점과 단점을 모두 포함한 그를 사랑한다. 그가 늘 편안하길 바라지만 한편으론 안주하지 않고 제 꿈에 도전하길 응원한다.
나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우리는 이대로만 하면 된다. ‘나를 사랑하듯 남을 사랑’할 일이 아니라 ‘남을 사랑하듯 나를 사랑’하자는 것이다.
모든 연애는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아온 두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관계가 되어가는 과정이다. 이 관계 맺기에는 충분한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한다. 나를 사랑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나와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관계가 되려면 나를 잘 아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나의 특별함을 이해하고 그 특별함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나를 보살펴야 한다. 나만큼 나를 잘 아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되물을지도 모르겠다.
글쎄, 생각보다 나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많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우리는 그 답을 몰라서 평생을 찾아 헤맨다. 나를 잘 알면 이 모든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나를 위한 가장 좋은 선택을 내릴 수 있다. 그 좋은 선택들이 모인 게 나다운 삶이다.
나는 나와 연애를 시작했다. 일단 내 마음이 가는 대로 좋아하는 것들을 찾아다녔다. 좋아하는 식당, 좋아하는 책, 좋아하는 영화, 좋아하는 길 같은 나만의 취향을 차례차례 만들었다. 일부러 시간을 내어 나와 데이트를 했다. 회사 사람들에겐 “(나와) 약속이 있어서요”라고 말하고 점심시간에 잠깐 가고 싶은 곳에 다녀왔다. 주로 책방에 파묻힐 때가 많았지만 남들은 모르는 나와의 시간이 있다는 게 뿌듯했다.
가끔은 휴가를 내고 먼 곳에 다녀오기도 했다. 그게 익숙해지자 직장을 그만 두고 몇 달간 혼자 해외여행을 떠났다. 낯선 나라에서 그 어떤 꼬리표도 없이 오롯이 나라는 사람으로 존재해보니 내가 어떤 사람인지가 더 투명하게 보였다.
점점 더 내가 궁금해졌다. 개인 상담, 집단 상담, 코칭을 받으며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이해했다.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를 만들었다는 걸 이해하고 나니, 어제에 매여 있는 대신 오늘을 살고 싶어졌다. 어른이 되었지만 가끔씩 아이로 돌아가 여전히 두려워하는 나를 괜찮다고 다독이며 한 발씩 나아갔다.
상담심리대학원에 들어가 늘 배우고 싶었던 심리학도 배웠다. 틈틈이 좋아하는 운동을 찾아하는 게 삶의 낙이 되었다. 때때로 몸과 마음이 지쳐 있으면 제대로 된 결정을 내릴 수 있을 때까지 충분히 쉬어 주었다. 그렇게 나를 이해하고 돌보려 애쓰는 동안 조금씩 내가 좋아졌다. 남몰래 자살에 대해 검색해보던 나는 그렇게 시나브로 나를 사랑하게 되었다.
이제 칠순인 엄마는 전화를 끊기 전에 언제나 내게 다짐을 받아내듯 말한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 너야. 네가 있고 남편과 아이가 있는 거야.”
‘나를 가장 사랑하라’는 엄마의 말을 감사히 가슴에 품는다.
하지만 내게 있어 나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라는 말은 ‘우선순위 정하기’보단 ‘차례 지키기’에 가깝다. 비행기를 타면 이륙 전에 언제나 안내 방송이 나온다. 비상시에는 반드시 내가 먼저 산소마스크를 착용하고 노약자의 착용을 도와주라는 것이다. 아이와 함께 비행기를 타면서부터 그 안내방송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나라면 반사적으로 아이부터 산소마스크를 씌워줄 것 같았다. 하지만 만약 내가 산소마스크를 착용하지 않고 정신을 잃는다면 나도 아이도 위험해질 것이다.
관계도 마찬가지다. 나를 먼저 사랑할 줄 알아야 너를 사랑할 여유가 생긴다. 내 안에 있지도 않은 사랑을 너에게 줄 수는 없었다. 만약 내 사랑을 준다 해도 그 사랑은 우리 두 사람을 모두 피어나게 할 만큼 충분치 않았다. 그러니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차고 넘쳐 너에게로 흘러가게 하고 싶었다. 내가 사랑하는 네가 다치지 않고 내 곁에 오래오래 피어 있을 수 있도록. 그러다 언젠가 우리를 가득 채운 사랑이 더 큰 세상으로 흘러갈지도 모를 일이다. 하여 세상이 예전보다 조금은 더 따뜻해질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나는 나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기로 결심했다.
*이 글은 <우리는 누군가의 사랑받는 아이였다>(클랩북스, 2024)의 일부입니다.